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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재능으로 환생-29화 (29/200)

# 29

29화 제 그릇으론 감당할 수 없는 사내예요(1)

루크는 드래크프 영지에 서신을 보내어 바리엘을 공국으로 되돌려 보내라는 명령을 내린 후부터 한동안 왕궁에 상주하며 시간을 때웠다.

시간을 때우는 동안 마냥 놀지만은 않았다. 관광을 핑계로 그란데 백작의 안내를 받아 골디브를 구석구석 둘러보았으며, 왕궁 안에서 지내며 왕궁 내부의 분위기를 살펴보았다.

왕궁 내부, 정확히는 외궁에서 세 명의 왕위 계승권자들을 중심으로 세 개의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다.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도 누구에게 줄을 섰느냐에 따라 무리를 이루었으며, 각 세력끼리 견제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저자가 이번에 청문회에서 공국의 사절단을 박살 냈다던 그 사람이지?”

“드래프트 영지의 루크 남작이라고 하더군.”

“드래프트 영지가 어디야? 남쪽에 그런 영지가 있다고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남쪽이 아니라 남서쪽이었나?”

“그 왜 저번에 남서부 귀족 독살 사건 있잖아. 그때 활약했다더구먼.”

“능력은 있는 것 같다만, 아무래도 변두리 시골 출신의 남작이면 좀…….”

“들어 보니 이미 엘리나 왕녀님께 붙은 것 같더군. 그란데 백작이 중간 다리를 놓은 모양이야.”

“쯧쯧, 왜 하필 붙어도 엘리나 왕녀님께 붙었담. 거긴 미래가 없건만.”

외궁에서의 세력 다툼은 얼마나 많은 하원 의원을 밑에 두느냐에 따라 달려 있었다. 가장 많은 자들이 따르는 이는 다름 아닌 제1왕위 계승권자인 제1왕녀 나탈리였다. 전체 하원 의원 중 5할이 나탈리 왕녀를, 4할이 제2계승권자인 블린트 왕자를, 1할이 엘리나 왕녀를 따르고 있다.

다른 왕위 계승권자들에 비해 엘리나의 세력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그마저도 나탈리파나 블린트파에 붙고 싶은데, 능력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일단 아무 줄이나 잡고 보자는 심정으로 엘리나에게 붙은 자들이라 사실상 전력으로서의 가치는 없었다.

외궁에 있는 대부분의 귀족이 루크를 두고, ‘능력은 있는데 줄을 잘못 선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리 생각하는 것은 비단 귀족뿐만이 아니었다.

왕궁에 머무르며 계획이 준비되길 기다리고 있던 차에, 루크에게 별안간 제1왕녀로부터 호출이 날아들었다.

“루크 남작, 나탈리 왕녀님께서 자네를 보고자 하시네. 따라오게나.”

양해 따윈 일절 없고, 그냥 오란다. 말에서 ‘나탈리 왕녀가 부르면 와야지’라는 뉘앙스가 강하게 풍겼다. 용건은 대강 보인다. 청문회에서 볼트 후작을 깔아 짓뭉갠 것을 전해 듣고서는 마음에 들면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려고 부른 것이리라.

평소 같으면 적당히 핑계를 대었겠으나 나탈리 왕녀의 옆에 렌디가 붙어 있다. 루크는 렌디의 근황을 두 눈으로 확인할 겸 초대에 응했다.

“한 번쯤 뵙고 싶었는데, 잘됐군요. 안내해 주시죠.”

* * *

나탈리가 머무르고 있는 별궁은 굉장히 호화로웠다. 건물의 외양은 다른 별궁과 다를 게 없는데, 안쪽은 완전히 별세계였다. 값비싼 보온용 마법 도구인 홍염 루비를 벽에 일정 간격으로 설치하여 내부는 봄처럼 따뜻했다. 궁녀 대신 늘씬한 체격의 미남들이 시중을 들고 있었으며, 종이로 만든 조화의 봉오리 안에 향수를 채워 넣었는지 진한 향기가 궁 전체에 맴돌고 있었다.

저 홍염 루비 하나면 4인 가족이 1년을 먹고살 수 있고, 봉오리 하나 분량의 향수는 기마대 한 명을 중무장시킬 수 있었다.

그야말로 개인의 욕망이 탄생시킨 사치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별궁이었다.

안내를 받아 나탈리의 방으로 들어서자 더더욱 가관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나탈리의 방에 들어선 순간…….

‘세상에서 제일 정신 사나운 방이라고 해도 무방하겠어.’

방 안은 보석투성이였다. 벽에는 각종 보석으로 만든 목걸이와 팔찌가 못에 걸린 채 다닥다닥 전시되어 있었다. 바닥은 단단한 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유리 밑에 반지며 티아라 등이 오와 열을 맞춰 전시되어 있었다. 마치 방 전체가 보석방의 보석 보관대처럼 장신구 천지였다.

방 한가운데 있는 기다란 소파에 한 여인이 옆으로 누워, 기다란 곰방대를 입에 물고 있었다.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 긴 흑발 생머리에 짙은 눈 화장을 하고, 눈썹을 그렸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선이 가는 것에 비하여 풍만한 가슴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눈 밑의 눈물점이 화려해 보임에도 우수에 찬 느낌을 주어 마치 남자를 말려 죽일 듯 진한 색기가 풍겼다.

여자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자세를 똑바로 고쳐 앉았다. 그러고선 일부러 의도한 양다리를 꼬아 슬릿 사이로 희멀건 허벅지를 드러냈다.

“만나서 반가워요, 루크 남작. 저와 대면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죠?”

루크는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허리를 살짝 숙이며 형식상 예를 갖췄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탈리 왕녀님.”

“후후, 들었던 것보다 훨씬 미남이시네요. 그런 소리 자주 듣지 않나요?”

“겉치레로는 몇 번 들어 보았지요.”

“전 겉치레가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이쪽에 와서 앉으시지 않겠어요?”

방 안에 앉을 곳이라곤 나탈리가 앉아 있는 소파밖에 없다. 나탈리의 옆에 앉으면 자연스럽게 피부끼리 접촉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언행으로 보건대, 나탈리는 색기를 통해 여러 귀족을 홀려 온 것으로 추정된다. 제1왕위 계승권자라는 간판과 그녀 본연이 지닌 색기를 구심점으로 삼아, 외궁 최대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듯하다. 그녀 본인도 그것을 즐기는 모양이고 말이다.

루크는 치근덕거리는 유형은 싫을뿐더러, 나탈리의 모습에서 비춰지는 것이라고는 창부의 모습밖에 없는지라 그다지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소파 뒤에 서 있는 그녀의 개인 호위 기사 때문에라도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렌디.’

소파 뒤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안 보고 있고, 아무것도 안 듣고 있다는 양 장승처럼 서 있는 한 사내.

렌디를 실제로 두 눈에 담은 순간, 루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 등에 칼을 꽂고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잘 먹고 잘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속에 불꽃이 일렁였다. 당장이라도 놈을 꿇려 목을 치고픈 마음이 샘솟는다.

그러나 참아야 한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한순간의 감정으로 일을 망치기엔 루크는 너무나도 신중한 사내였다. 때문에 차분히 감정을 추스르며 나탈리와의 대화에 집중했다.

“이대로도 괜찮습니다. 볼일이 있다 하셨는데, 무슨 용건이십니까?”

“흐응~ 보기보다 성격이 딱딱하네요. 용건은 루크 남작도 짐작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되네요. 엘리나, 그 아이보단 내 밑으로 오는 게 어때요? 권력도, 몸매도 빈약한 그 아이보다는 가 훨씬 많은 걸 줄 수 있을 것 같네요.”

“구체적으로 뭘 얻을 수 있습니까?”

일순 나탈리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엘리나가 소박한 국화꽃 같았다면, 나탈리는 마치 흐드러지게 핀 장미꽃 같았다.

나탈리는 루크가 흥미를 보이는 것을 보곤 우월감을 느꼈다.

‘그럼 그렇지. 이 내가 직접 권유하는데 제깟 게 승낙하지 않고 배기겠어?’

“원하는 건 뭐든지 얻을 수 있죠. 원한다면 뭐든지.”

그러면서 괜히 다리를 꼬고 있던 방향을 바꾸며 강한 자극을 남기는 나탈리였다.

여기까지 해서 안 넘어온 귀족은 없었다. 귀족에게 있어 왕족은 구름 위의 존재이자 절벽 위의 꽃이다. 육식계처럼 적극적인 나탈리의 앞에서, 모든 이들이 자신이라면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착각과 함께 그녀의 노예로 전락한다.

루크 또한 예외는 아닐 거라고 여겼다.

하나 루크의 대답은 단호했다.

“흥미로운 제안이긴 하지만, 대가가 썩 만족스럽지 못하군요. 거절하도록 하겠습니다.”

긍정의 대답만을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던 나탈리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대답이었다.

얼굴은 웃고 있었으나 그녀의 눈썹은 미미하게 파르르 떨렸다.

“나중에 후회하게 될 텐데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엘리나 그 아이라면 원하는 바를 이뤄 줄 거라 믿는 건가요?”

루크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몸을 돌렸다.

“제가 원하는 건 제가 이룹니다.”

* * *

루크가 떠난 후, 나탈리는 소파 뒤에 서 있던 렌디에게 손짓했다. 그러고는 렌디를 옆에 앉히고 아양을 부리듯 머리를 어깨에 기대며 코웃음을 쳤다.

“훗, 확실히 네 말대로 대책 없는 녀석이긴 하네.”

이번에 루크를 부른 것은 렌디의 의사였다. 렌디가 그녀에게 루크는 위험하다고 언질을 넣은 것이다.

솔직히 엘리나가 누구를 휘하에 넣든 아무래도 좋았다. 엘리나가 자신과의 격차를 좁히는 것은 무리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의 노리개 중에서 가장 아끼는 렌디가 누누이 루크를 위험인물이라고 강조하기에 확인차 부른 것이었다.

그런데 말하는 품새나 행동거지로 보아 위험한 것은 둘째 치고, 불쾌한 녀석인 것만은 분명했다.

나탈리의 손이 렌디의 허벅지 위로 올라갔으나 렌디는 일상적인 일이라는 양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입을 열었다.

“조만간 왕녀님의 앞길에 방해가 될 녀석입니다. 미리 싹을 밟아 두시지요.”

“푸하하, 그거 근래 들은 이야기 중에서 가장 웃긴걸? 내가 보기엔 갓 상경해서 세상 물정 모르는 애늙은이 귀족 같던데?”

“얌체 같기로 유명하던 볼트 후작마저도 꼼짝 못 하고 압도당했습니다. 후견인 없이도 그 정도인데, 엘리나 왕녀님이 뒤를 봐주면 더더욱 위협적인 존재가 될지도 모르지요.”

“흐응~ 렌디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조금은 도와주지. 내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

“블랙 카우 부대를 시켜, 돌아가는 길에 암살하는 게 제일 깔끔하지 않겠습니까?”

“소 잡는 칼로 닭 잡는 격인걸?”

“확실하게 처리해서 손해 볼 건 없으니 말이죠.”

블랙 카우 부대란 나탈리 휘하의 직속부대이자 비공식 부대로, 나탈리 밑에서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는 자들이었다.

대원 전원이 출중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데다, 암살 경험이 풍부하여 어지간한 뒤 세계의 암살 길드보다 훨씬 능숙하게 대상을 제거할 수 있었다.

나탈리는 렌디의 귀에 끈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 밤, 하는 걸 봐서 결정해 보도록 할까?”

“밤까지 기다릴 것도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만.”

“후후, 너란 사람은 정말이지 척 하면 척이라서 좋다니까.”

아직 이른 낮이건만, 나탈리의 방에는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지며 은은한 촛불이 피어올랐다.

* * *

숙소로 돌아온 루크는 궁녀로부터 서신 한 장을 전해 받았다.

“루크 남작님, 드래프트 영지에서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청문회가 끝나자마자 루크는 제랄드에게 편지를 보내 바리엘을 아레나 공국으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아마 그에 대한 보고일 것이다.

내용을 확인해 보니, 지시대로 바리엘을 정확히 로메우 앞으로 보냈으며, 로메우는 아직 별다른 움직임을 취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자기가 잘난 줄 아는 탐욕 덩어리가 아무 짓도 안 할 리 있겠는가.

비밀리에 이미 움직임을 취해 두었을 것이다.

흥분하면 과격한 수단을 취하는 것이 로메우의 성향이다. 카인으로 살아갈 때 로메우가 흥분하여 이건 아니다 싶은, 격한 수단을 취하는 걸 몇 번이나 봐 왔다. 이번에도 분명 과격하게 대응할 터.

오늘 나탈리의 호출도 나탈리 본인의 의사가 아니라 렌디의 의사였겠지. 아마 추이를 살펴보고자 일부러 나탈리에게 부탁하여 호출한 것이 틀림없다.

루크는 슬슬 움직일 때가 되었음을 직감하였다.

* * *

이튿날, 루크는 마차를 타고 왕궁에서 떠났다. 공식적으로는 청문회가 끝나고 뒤늦게 귀향길에 오른 것으로 되어 있었다.

루크와 그란데 백작은 각자 이곳에 올 때 탄 마차에 나눠서 올라탔고, 마차는 왕궁을 벗어나 골디브 시가지로 들어섰다. 모름지기 문지기들은 들어오는 마차에는 신경을 많이 써도 떠나는 마차에는 신경을 그리 많이 쓰지 않는 편이다. 루크가 왕궁을 빠져나갈 때도 왕궁 문지기들은 경례로써 배웅할 뿐이었다. 마차에 누가 탔는지, 무엇을 실었는지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왕궁을 빠져나와 골디브 시가지에 들어섰을 즈음, 루크는 맞은편 좌석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나오셔도 됩니다.”

루크의 마차는 앉는 부분을 관의 뚜껑처럼 여닫을 수 있어, 좌석 아래를 수납장으로 쓸 수 있다. 물건을 효율적으로 수납하거나 남몰래 무언가를 옮길 때 등 여러 용도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구조였다.

루크의 말과 함께 맞은편 좌석의 받침대 부분이 위로 젖혀지며, 수수한 평상복 차림의 여성이 몸을 일으켰다.

엘리나는 젖힌 받침대를 원위치로 돌리며, 어깨 위의 먼지를 털어 냈다.

“콜록콜록! 수납장 안쪽 청소 좀 해야겠어요.”

“좀처럼 쓸 일이 없어서 말이죠.”

“아츄! 아츄! 먼지 때문에 자꾸 재채기가 나오네. 창문 살짝만 열게요. 괜찮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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