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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재능으로 환생-32화 (32/200)

# 32

32화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겐크 왕국의 동쪽 국경을 지나 아레나 공국에 들어가면 곧바로 높은 고갯길이 나온다. 경사가 가파르고, 길이 나선 형태로 굽이굽이 이어진 터라 넘어가다가 숨이 넘어간다 하여 토박이들은 껄떡 고개라고 부르곤 하였다.

말을 탄 적발 적미의 장발 사내가 고갯길의 최정상에 서 있었다.

“푸르르.”

경사가 가파른 길을 쉼 없이 달리느라 그 힘 좋은 한혈마마저도 입에 거품을 문 채 거친 투레질을 하였다.

적발의 장발 사내, 렌디는 말을 쉬게 할 겸 고삐를 당겨 멈춰 서선 고개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 멀리, 겐크 왕국의 국경도시가 뻗어 있었다. 처음에 쉐도우 나이트로서 왕국에 잠입할 때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도망치듯 빠져나오게 될 줄은 몰랐다. 좀 더 그럴듯한 공적을 세우고 귀환할 줄 알았다. 나탈리가 여왕이 되어 그녀의 사치와 향락 때문에 겐크 왕국이 병들어 갈 때쯤 환대 속에서 아레나 공국에 복귀하여 돌격 대장으로서 선두에 서는 그림을 상상했다.

그러나 상상은 상상에 그쳐 버렸다.

단 한 사람 때문에 말이다.

렌디는 눈가를 가늘게 좁히며 무심히 중얼거렸다.

“지렁이인 줄 알았더니, 용이었던 격이군.”

그는 상대방을 과대평가하지도, 과소평가하지도 않는다. 거울로 비춘 것처럼 상대를 있는 그대로 직시한다.

루크를 경시한 적은 없다. 다만 그의 역량을 잘못 재고 있었을 뿐.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루크가 카드를 잘 숨겼다고 할 수 있다.

그란데 백작과 엮인 시점에서 쉐도우 나이트를 저격하려 들 줄은 알았다만, 본인의 목숨을 미끼로 삼을 줄이야. 본인의 목숨만 걸었다면 모를까, 엘리나 왕녀의 목숨까지 가져다 쓸 줄은 몰랐다.

“설마 나탈리부터 공략해서 별궁을 수사하게 만들 줄이야. 지금쯤이면 내 방도 뒤지고 있겠군.”

암살에 실패했다는 소식을 미리 접한 렌디는 왕궁이 들썩이기 전에 미리 도주에 나섰다. 워낙 급하게 도주 길에 오르느라 거처에 놔둔 쉐도우 나이트 관련 자료를 처리하지 못했다.

지금쯤이면 나탈리의 형이 확정되었을 거고, 수사대가 추가적으로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별궁을 뒤지고 있을 것이다. 렌디의 거처는 별궁 안에 있으니, 이미 거처에 숨겨 둔 자료는 발각되었을 터. 왕족의 거처라 제일 수색당하지 않을 것이라 여긴 장소가 지금은 가장 위험한 장소로 돌변했으니, 상황을 이렇게 만든 루크의 지략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쉐도우 나이트의 존재가 수면 위에 떠오르면 왕국과 공국 사이에 전쟁의 불씨가 당겨질 것이다.

늦든, 빠르든 이렇게 될 예정이었으니, 조금 앞당겨졌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푸르르.”

말이 충분히 쉬었는지 안정적으로 숨을 쉬며 투레질을 하였다.

고삐를 당겨 말의 머리를 반대편으로 돌리려던 찰나, 발아래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네놈…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하리라고…….”

렌디의 발치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려 있었다.

시체는 모두 날카로운 것에 걸린 양 깔끔하게 양단되어 있었다. 주목할 점은 시체들이 입고 있는 갑옷에 겐크 왕국의 문양이 찍혀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 모두가 렌디를 체포하러 온 추격대이며, 공국 군대와의 충돌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어 추격을 강행한 끝에 렌디를 따라잡은 참이었다. 어차피 왕녀의 노리개에 불과하던 남자이니 따라잡기만 하면 체포는 어렵지 않을 거라는 것이 추격대의 예상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였다.

렌디 또한 실력을 감추고 있었기에.

렌디는 아직도 숨이 붙어 있는 한 기사를 무심히 내려다보며 검을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렌디의 검에 마나 오라가 둘러지며, 실오라기 같은 마나 블레이드가 뻗어 나왔다.

마나 블레이드 한 가락이 아래로 떨어지며 기사의 얼마 남지 않은 목숨 줄을 확실하게 끊었다.

푸확!

조금 거칠게 베어 낸 탓인지, 피가 요란하게 튀어 렌디의 얼굴과 옷에 묻었다. 옷에 묻은 핏방울은 금세 로브에 스며들어 자그마한 얼룩이 되었다.

가만히 얼룩을 내려다보던 렌디는 검을 검집에 도로 꽂아 넣으며 고삐를 당겼다.

“손맛만 버렸군. 좀 더 베는 보람이 있는 녀석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조급해할 것 없다.

전쟁이 발발하면 벨 가치가 넘치는 녀석들이 몰려올 테니.

그중에서도 백미는 루크, 그 작자이리라.

맛있는 부위를 다른 이에게 넘겨줄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두를 것도 없지. 제대로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 또한 여흥일지어니.

렌디는 입가에 묻은 피를 날름 핥으며 공국의 수도를 향해 말을 몰았다.

* * *

한편 골디브에선 한창 나탈리를 두고 많은 말이 오갔다.

사건이 사건이다 보니 내궁에서 직접 나섰다.

초반에는 나탈리파와 엘리나파 사이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오갔다.

왕족 살인 미수에 근친 살인 미수까지 적용된 일이다 보니 가벼운 형벌로 그칠 리 없었고, 나탈리에게 줄을 섰던 수많은 하원 의원들은 자신의 밥줄을 지키고자 필사적으로 나탈리를 지원하였다.

하지만 나탈리 왕녀에게 치명적인 증거를 지니고 있는 것은 엘리나파이다 보니, 공판이 거듭될수록 판세는 엘리나 쪽으로 기울었다.

“블랙 카우 부대의 대장 칼리파, 증인은 나탈리 왕녀의 명령을 받아 암살을 시도한 것을 인정하시나요?”

“네, 왕녀님의 명령을 받아 암살하러 나섰습니다.”

루크에게 핏물이 흐르는 교육(?)을 받은 블랙 카우 부대의 대장이 나탈리의 명이 있었음을 밝혔다. 칼리파의 자택에서 블랙 카우 부대가 실존하는 단체임을 증명하는 증거까지 나오면서, 나탈리로선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궁여지책으로 나탈리파가 고안해 낸 변명이란…….

“암살을 시도했다는 건 인정하죠. 하지만 제가 암살하려고 한 건 루크 남작이에요. 귀족 암살 미수를 적용해 줬으면 하네요.”

왕족 암살 미수보단 귀족 암살 미수가 그나마 급이 낮고, 잘만 하면 왕위 계승권을 지킬 수도 있으니, 낮은 형벌을 받는 쪽으로 선회한 것이다. 살을 내주고 뼈를 치는 것이 아닌, 살을 내주고 뼈를 지킨다는 각오로 체면 불구하고 뻔뻔하게 굴었다.

하지만 온실 속 화초인 나탈리가 설산 속 에델바이스처럼 자라 온 엘리나를 말로 당해 낼 리 없었다.

“언제부터 귀족 암살이 대놓고 말할 수 있는 행위가 됐죠? 누가 들으면 왕족 전용 민속놀이인 줄 알겠네요. 같은 왕족으로서 부끄럽군요. 그리고 그 말이 사실이란 보장이 어디 있죠? 듣자 하니 암살을 시도하기 직전에 루크 남작을 회유하려고 했다는 증언이 있는데, 보통 회유하려던 사람을 곧바로 죽이던가요? 절 죽이려 해 놓고 실패하니까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이네요.”

“큭, 그러면 너도 해명해야 할 게 있지 않아? 왕궁에 있어야 할 네가 왜 거기에 있는 건데?”

“어머, 끝까지 제 존재를 몰랐던 걸로 몰고 갈 생각이신가요?”

“말 돌릴 생각 마. 칼리파가 말한 걸 되짚어 보자면, 결국 너와 루크 남작이 한 침대에 있었다는 게 되잖아. 그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몰래 왕궁에서 빠져나가 외간 남자와 같은 침대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왕국 전체가 들썩일 대스캔들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얼굴을 붉혔을 엘리나일 터이나 업무 태세로 돌아선 그녀는 일체 흔들림 없이 강수를 두었다.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그 외의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나요?”

분명 오늘 밤에 이불을 발로 걷어찰지도 모른다. 아니, 오늘뿐만 아니라 내일, 모레도…….

그러나 여기서 우물쭈물하면 왕족 암살 미수로 둔갑시키기 위한 작전이 탄로 나 버린다. 그럴 바엔 차라리 스캔들이 나는 게 낫다. 엘리나는 그리 판단하고서 강수를 둔 것이다.

화끈하기 그지없는 대답에 나탈리는 물론이고, 장내에 있는 귀족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그나마 동요하지 않은 자는 국왕 정도였다.

나탈리가 크게 동요하여 입을 뻐끔거리는 동안 엘리나는 지극히 일상적인 발언이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공격을 재개했다.

“그리고 개인 보좌관 겸 개인 호위 기사였던 렌디 경의 방에서 쉐도우 나이트라는 공국의 공작대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나왔죠. 공국과도 뒷거래를 하고 있었나요?”

“그건 내가 아냐! 렌디 그놈이 공작원일 줄은 나도 몰랐다고!”

“입으로는 뭐든 말할 수 있죠. 아바마마, 저는 이 사태를 가벼이 넘겨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철저한 조사와 그에 따른 적절한 처분을 내려 주시길 바라요.”

이후에도 나탈리파가 사건을 끈질기게 귀족 암살 미수로 끌고 가려 했으나, 국왕이 직접 처분을 내리면서 나탈리의 왕위 계승권 박탈과 외딴 섬으로의 유배가 확정되었다.

더불어 쉐도우 나이트의 존재가 밝혀지며 시국이 급격하게 바뀌었다.

겐크 왕국에선 천공섬을 정복하려는 계획을 전면 취소했고, 정식으로 사절단을 꾸려 아레나 공국의 공왕에게 책임을 물을 생각이었다.

이 경우 책임을 묻는 거라면 왕위 박탈밖에 없다.

공국의 왕위 임명권은 겐크 왕국의 국왕이 쥐고 있다. 아레나 왕국 시절, 로메우가 공왕이 되기 위해 겐크 왕국을 끌어들일 때 내건 조건이자 지금에 와서 기를 쓰고 겐크 왕국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 시간부로 나탈리의 왕위 계승 권리를 박탈하고, 헬리온 섬으로 유배를 명한다. 그리고 지난 남서부 귀족 독살 사건을 비롯하여 왕국에 큰 해를 끼친 로메우 공왕의 자격을 박탈할 것이니, 만일 불복한다면 군사적 제재도 서슴지 않을 것을 똑똑히 전하거라!”

국왕이 공식적으로 로메우의 공왕 자격을 박탈하면서, 이 시간부로 로메우는 평범한 귀족으로 격하되었다. 만약 귀족인데도 계속 왕을 자처한다면, 아레나 공국을 무단으로 점령하고 있다는 것을 명분 삼아 그의 목을 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할 수 있게 된다.

하나 로메우가 담담히 왕위를 박탈한다는 처분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없었다.

분명 군대를 일으켜 반발할 것이고, 그를 제압하기 위해 겐크 왕국도 군대를 파견할 것이니, 왕국과 공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할 것은 누구나 알 법한 일이었다.

그렇게 도화선에 불을 붙일 불씨나 다름없는 왕국의 사절단이 공국에 파견되었다.

* * *

일련의 소동이 끝나면서 루크의 이름이 왕국에 널리 알려졌다.

마나마스터이자, 왕녀 엘리나와의 스캔들을 가진 남자이자 개천에서 용 난 케이스의 장본인으로 말이다.

왕궁에선 루크가 마나마스터인 것을 알고선 왕궁으로 보내야 하는 납세액을 감면하고, 하원 의원으로 입후보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고, 개인이 광산을 소유하는 것을 허락하며, 드래프트 영지의 자치령화를 허가했다.

더불어 루크는 수많은 귀족으로부터 초대를 권유 받았다.

하루아침에 귀족계의 뜨거운 감자가 된 루크와 미리 친분을 다져 두기 위해, 다들 먼저 손을 내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루크는 전부 거절했다.

필요 없을뿐더러, 영양가도 없는 친목 다지기 따위가 무슨 득이 있다는 말인가.

그보단 영지로 돌아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곧 왕국과 공국 사이의 전쟁이 벌어진다.

물론 참가할 것이다. 그리고 전쟁의 격류 속에서 놈들을 찌를 것이다. 렌디… 그리고 로메우를.

놈들이 공국에서 지위가 높다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복수를 이룸과 동시에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니까.

겐크 왕국에서 이름난 귀족 정도가 아닌, 그 이상의 단계를 노릴 수 있는 발판으로 삼으리라.

귀족, 왕, 그리고 그 이상을 노리려면 이번 전쟁에서의 공적은 필수다.

루크가 드래프트 영지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에 올라가기 직전,

마중을 나온 엘리나가 루크의 윗옷 뒷자락을 집으며 말했다.

“공식 석상에서 말한 그거, 진심이니까 진지하게 고려해 주세요.”

‘그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말을 마치자마자 굳게 다문 엘리나의 입술에서 단순한 가십거리로 끝내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전해져 왔다.

그러나 루크는 그녀의 손가락에서 옷자락을 빼내며 산뜻하게 거절했다.

“앞으로의 원활한 협력 관계를 위해 방금 건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럼 건강히 지내시길.”

그 말을 마지막으로 드래프트 영지로 가는 마차에 몸을 싣는 루크였다.

그가 떠난 후, 엘리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선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련히 중얼거렸다.

“아아~ 차여 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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