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33화 창천 앵무(1)
드래프트 영지를 떠날 때만 하더라도 겨울이었는데, 돌아올 때에는 얼음이 녹는 시기가 되어 있었다.
봄에 들어섰음을 알리듯 겨우내 응달에 쌓여 있던 눈이 녹으며 길이 질척해졌고, 땅속의 수분을 한껏 빨아들인 봄꽃들은 시간 개념을 잊고 꽃봉오리를 터뜨리며 일찍이 얼굴을 내밀었다.
이너프 산맥을 빠져나와 영지에 도착하니 벚꽃 꽃잎이 눈송이처럼 흩날리며 누구보다 먼저 루크의 귀환을 환영했다. 오는 내내 이상하게도 말들의 힘이 넘쳐 평소보다 속도가 빠른가 싶더니, 저희도 봄비가 내리기 전에 벚꽃 구경을 하고 싶었나 보다.
마차 바퀴로 벚꽃 꽃잎을 지르밟으며 이동하고 있는데, 문득 마부석에서 마부가 고삐를 강하게 당기는 것이 보였다.
“어어? 엇!”
히이이잉!
덩달아 말 두 마리가 놀라면서 앞발을 높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전방에서 무언가가 길에 떨어진 듯 강렬한 충돌음이 들려왔다.
쿠웅!
루크는 무슨 일인가 싶어 마부석과 이어진 작은 창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죄송합니다, 남작님. 갑자기 하늘에서 뭔가가 떨어져서 급하게 마차를 세웠습니다.”
“말들부터 진정시켜. 멋대로 튀어나가려고 하잖아.”
“네.”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는 루크도 들었다.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마차에서 내려 앞으로 나가 보았다. 떨어진 것은 무언가의 알이었다.
크기는 수박만 한 데다, 껍질은 메추리알처럼 옅은 갈색 바탕에 큼지막한 검은색 점이 군데군데 찍혀 있었다.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점은, 바닥이 움푹 파일 정도로 강한 충격이 가해졌거늘, 알은 금 간 곳 하나 없이 멀쩡하다는 것이었다.
루크는 가죽띠에서 검집을 통째로 뽑아내어, 검집의 끄트머리로 알을 톡톡 건드려 보았다. 정체불명의 물건을 함부로 만져서 좋을 것은 없으니 말이다.
딱! 딱!
직접 건드려 보니 알껍데기의 강도가 검집을 타고 고스란히 손에 전해졌다. 이만한 강도라면 철보다 단단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세상에 별의별 게 다 있다지만, 강철 같은 알은 처음 보는군. 가져가서 감정해 볼까.”
알이 떨어진 것을 직접 목격한 마부는 간이 콩알만 해져선 루크를 만류했다.
“척 보기에도 수상한 물건 같은데, 그냥 버리시지요. 위험한 물건일까 봐 겁납니다.”
“위험한 물건이면 더더욱 방치할 수 없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다시 출발하자고.”
진짜로 알인지도 의심스러운 물건이긴 하다만, 영지에 떨어진 이상 방치할 순 없었다.
알을 챙겨 가기 위해 직접 손으로 알을 집어 들어 보니, 생각보다 가벼웠다. 철갑처럼 단단한 껍질을 갖추고 있는 것치곤 수박 정도의 무게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알을 챙겨 마차에 오른 루크는 얼마 남지 않은 길을 재촉하여 저택에 귀환했다.
* * *
“남작님을 향해 경례!”
저택에 도착하니 정문 안쪽에 양옆으로 병사들이 일렬로 늘어서서는 경례 자세를 취하였다. 마차가 지나칠 때마다 병사들이 가검을 사선 방향으로 들며 멋들어지게 환영해 주었다.
바깥에서 신입 기사가 잽싸게 다가와 문을 열어 주었고, 마차에서 내림과 동시에 일렬로 서 있던 제랄드, 드골, 러스트, 오즈가 왼쪽 가슴에 손을 얹으며 루크를 맞이해 주었다.
“또 한 단계 이름을 드높이고 오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남작님!”
수도에서 있었던 일이 여기까지 전해진 모양이다. 제랄드는 제 일처럼 감격하여 축하 인사를 올렸다. 어찌나 기합을 담아 인사를 하는지 귀가 웅웅, 울릴 지경이었다.
제랄드 못지않게 루크의 반응도 만만찮았다.
“고작 한 단계만 올렸다고 전해졌나 보지?”
“아! 그럴 리가요! 제 마음속에선 훨씬 많이 쌓아 올리셨습니다!”
“간만에 제랄드 경의 표현을 들으니 징그럽게 느껴지는군. 수도에 올라가 있는 동안 면역력이 떨어진 모양이야.”
“남작님을 모시는 것이 제 유일한 보람이니까요.”
루크가 다른 사람과도 차례차례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드골이 특이한 행동을 취하였다. 아까부터 루크는 뒷전인 양 마차 옆을 기웃거리기 바빴다.
무언가 찾고 있는 듯한 드골이 이상하여 루크가 그 이유를 물었다.
“드골, 선물이라면 뒤 칸에 실어 뒀어.”
“그게 아니라 왕녀님은 같이 오신 게 아닌가 싶어서 말입니다.”
“왕녀? 왕녀라면 엘리나 왕녀님?”
“네. 소문 들었습니다. 왕녀님과 특별한 관계가 되셨다지요? 허허허, 나이가 드셔도 관심이 없으시길래 걱정이 많았는데, 역시 지를 땐 화끈하게 질러 버리시는군요.”
“그거라면 거절했어.”
“네? 왜 그러셨습니까? 재색 겸비! 게다가 왕가와 친인척 관계가 될 수 있는 기회이지 않습니까!”
“뒤집어 생각하면 그 여자가 여왕이 안 되고, 왕자가 왕이 되면 역으로 차별 받게 될 가능성이 높지. 그 여자랑 이어지면 난 무조건 그 여자를 여왕으로 만드는 데 인생을 허비해야 하는데, 내 집사라는 사람이 인생을 허비하는 쪽을 추천할 줄은 몰랐군.”
성공한 사례만 보고 눈이 뒤집히는 경우는 일상에서도 비일비재하다. 도박으로 부자가 된 사람을 보고, 그 사례만 좇으며 가산을 탕진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던가.
실패했을 때의 경우, 그리고 성공을 위한 노력에 드는 기회비용까지 감안하면 아무리 봐도 손해 보는 장사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이려던 루크는 말끝을 흐리며 하려던 말을 삼켰다.
내 목표는 여왕의 부군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엔 듣는 귀,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루크의 일침에 드골은 곧바로 예를 갖추며 허리를 숙였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주제넘은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
“고개 들어. 계산적으로 말하긴 했지만, 단순히 내 취향이 아니라서 거절한 것도 있긴 하니까.”
“뭐… 남작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20대 중반이 되었는데도 혼사에 욕심이 없는 루크가 걱정되는 드골과 달리 러스트는 호탕하게 웃으며 드골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하하, 취향이 아니라지 않나, 집사 양반. 근육이 모자란 사람이었나 보지.”
“낄 때 안 낄 때 좀 구분하면 안 되겠습니까? 근육이랑은 관계없는 이야기입니다.”
“건강한 후손은 건강한 육체에서 태어나는 법!”
“부탁이니까, 오크의 미적 기준을 들이대지 말아 주십시오.”
드골과 러스트가 아웅다웅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루크는 도로 마차에 올라탔다. 안 그래도 알 때문에 오즈를 한번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즈가 인사차 저택에 들렀으니, 이참에 알의 정체를 물어보고자 하였다.
“오즈 학장, 오다가 이상한 알을 하나 주웠는데, 이게 뭔지 감정해 주지 않겠습니까?”
루크는 강철과도 같은 강도를 지닌 알을 마차에서 들고 나와선 오즈에게 내밀었다.
오즈는 알을 보자마자 대번에 알아보았다.
“아,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요즘 영지에 계속 천공섬의 알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 아십니까?”
“천공섬이라면, 하늘을 떠다닌다는 그 섬?”
“네, 불규칙하게 대륙 곳곳을 떠다니기에 움직이는 하늘섬이라고도 불리지요. 최근에 드래프트 영지 위에 체류하고 있는 모양인데, 가끔씩 알이 떨어지곤 합니다. 지금까지 떨어진 알의 숫자만 하더라도 10개에 이르지요.”
“이런 게 사람 머리에 떨어지면 큰일 나겠군. 영지민의 피해 현황은?”
“허허허, 영지민부터 걱정하시는 게 역시 남작님답군요. 다행히도 다친 사람은 없습니다. 대신 천장에 바람구멍이 생긴 집은 몇 곳 있긴 하지요.”
오즈의 말을 들은 루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으나 하늘은 언제나처럼 높고 푸르기 그지없었다. 오즈의 말에 따르면, 천공섬은 특수한 힘이 작용하여 지상에선 보이지 않고, 오로지 하늘 높이 날아올라서 접근해야만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크기는 겐크 왕국 전 영토에 육박하며, 용의 자손들이라 불리는 용인들이 지배하는 땅이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궁에서 천공섬 정복 어쩌고저쩌고하더니 천공섬이 겐크 왕국에 다가오고 있어서 그런 말을 했던 거였군. 그래서 이 알의 정체는 뭐지?”
“글쎄요. 내용물까진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천공섬에 서식하는 조류의 일종일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아마 탁란을 당하여 떨어진 알이 아닐까 싶군요.”
탁란이란, A라는 새가 B라는 새의 둥지에 있는 알을 하나 떨어뜨리고, 자신의 알을 B의 둥지에 넣어 두는 행위를 말한다. B라는 새는 알이 바뀐 줄도 모르고, A의 알을 자기가 낳은 양 키우게 된다.
천공섬에 대해 잘 아는 편은 아니나 천공섬에 서식하는 새들이 매우 강인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천공섬에 서식하는 새들이 그리 강하다지?”
“그거야 말이 필요 없는 수준이지요. 천공섬에서 흔한 새라는 삼색 제비조차 그리핀보다 강하다고들 하니까요.”
“잘만 하면 비행 부대를 기를 수도 있다는 거군.”
“흐음, 이론상으로는 가능할 겁니다. 태어날 아기 새가 처음 본 생물체를 어미로 여기는 습성이 있다면 잘 따르겠지요. 하지만 어미를 잡아먹는 종류라면 얼굴을 물어뜯길지도 모르니 썩 권하고 싶진 않군요.”
“뜯기기 전에 제압하면 돼. 늘 비행 부대 하나쯤은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잘됐군.”
각인 효과를 이용한 비행 부대의 창설은 여러 나라에서 시행하고 있었다. 당장 겐크 왕국만 하더라도 그리핀 라이더를 보유하고 있고, 아레나 공국은 왕국일 적부터 와이번 라이더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를 제압하려면 따로 비행 부대를 갖추고 있는 게 여러모로 유리할 것이다.
루크는 자신이 주운 알을 품에 안으며 비행 부대를 창설하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하였다.
“이 아이는 내가 돌보도록 하지. 그리고 제랄드.”
“네, 말씀하십시오.”
“영지에 떨어졌다던 알들도 전부 회수해 둬. 비행 부대 지원자 모집해서 알 배부하고, 새끼 때부터 키우도록 지시하도록.”
“정석대로 하자면, 비행 부대는 마법사로 구성해야 하는데, 정원이 가득 찰지 모르겠습니다.”
영지 내 마법사가 워낙 부족한 데다, 대부분이 마탑의 교수진이라 교육과 연구에는 전문가이나 전투에는 그다지 소질이 없었다. 때문에 영지 내의 마법사로 인원을 충당하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하나 루크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 검지를 좌우로 까딱였다.
“아직 멀었군, 제랄드. 이번 일로 내 이름이 알려졌다는 걸 잊은 모양이지?”
“아차! 이젠 외부에서도 신청이 들어오겠군요. 즉시 타 영지에 특채 공문을 돌리겠습니다.”
마법사와 관련된 일이기에 오즈도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저도 인맥을 동원해 지원할 자가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지요.”
“부탁드리겠습니다.”
“허허허, 부탁이랄 것까지야 있겠습니까. 남작님의 지원을 받는 대신 마법사 전력을 강화해 드리겠다는 약속을 맺었지요. 갈수록 허리는 굽어도 약속은 굽히지 않는답니다.”
오랜만에 다들 한자리에 모여 회포를 풀고자 술자리를 갖기로 하였다. 저택 본채로 들어가는 동안에도 루크와 각 부서의 책임자들 사이에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사내들의 호방한 웃음소리가 촉진제로 작용한 것일까.
루크의 품에 있던 알이 별안간 흔들리기 시작했다.
루크는 그 느낌을 놓치지 않고 표정을 달리했다.
“잠깐, 다들 조용히 해 봐. 방금 알이 움직인 것 같아.”
“벌써 말입니까?”
“지금도 움직였어. 오즈 학장만 빼고 물러서. 오즈 학장, 각인 효과가 있는지, 어미를 먹는 유형인지 구분할 수 있습니까?”
“새끼 때의 모습까지 일일이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만, 일단 구분해 보도록 하죠. 혹시 모르니 남작님께 방어 마법을 걸어 드리겠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시점부터 이미 부화 직전이었던 건지도 모른다.
부화에 방해가 될까 싶어 루크가 알을 땅에 놓은 순간, 껍질 안쪽에서 부리로 두드리는 소리가 나며 껍질의 표면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갔다.
툭툭! 툭툭! 빠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