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36화 갑판 위로 떨어진 재앙(2)
그때 일을 말해 달라고?
으음, 그거 망설여지는걸. 내 다리를 봐. 떨고 있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의 일을 떠올리면 이 모양, 이 지경이야. 나한텐 트라우마라고.
얘기해 주면 돈을 주겠다?
쳇, 돈을 준다면 어쩔 수 없지.
어디 보자. 그때가 아마 내가 수군으로 생활한 지 5년째였을 거야. 병사치곤 꽤 베테랑이었지. 나름대로 자부심도 가지고 있었어. 피아냐 백작님 밑에서 5년을 버틴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니거든.
내 기억으로는 아레나가 공국이던 시절에 겐크 왕국을 침공했을 즈음일 거야. 그건 확실히 기억해.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된 이후에, 처음으로 공국이 패배한 전투였으니까.
내 입으로 말하기가 부끄럽지 않냐고?
알면서도 물은 사람이 누군데?
아무튼 그날 나는 동기랑 같이 불침번을 서면서 삶은 달걀을 안주로 삼아 럼주를 마시고 있었어. 물론 군기 위반이지. 하지만 밤바다에서 버티려면 한두 잔 정도는 마셔 두는 게 좋아. 안 그러면 정신적으로 못 버티거든. 어두운 바다 한복판에서 근무를 서 봤어? 아무것도 안 보이는 와중에 파도 소리만 철썩철썩 들려오는 게, 시커먼 감옥에 갇힌 것 같아서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니까.
그래도 그날 밤은 꽤 운이 좋은 편이었지.
근무 중에 반딧불 돌고래 떼를 발견했거든. 부끄러움이 많은 녀석들이라 배가 지나다니는 곳에는 안 오는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배가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고 지나쳐 가더라고. 뱃사람들 사이에서 반딧불 돌고래 떼가 뭐라고 불리는 줄 알아? ‘바닷속 유성’이야, 바닷속 유성. 돌고래 떼가 지나치기 전에 소원을 세 번 말하면 이루어진다지.
내 소원은 전쟁이 끝나고 무사히 집에 돌려보내 달라는 것이었어.
너무 수수한 거 아니냐고?
전혀. 전쟁이 시작하기 전에 소꿉친구에게 청혼을 했거든.
이 전쟁이 끝나고 내가 무사히 돌아오면 결혼해 달라고 했지.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기를.”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기를.”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기를.”
딱 세 번 말하고 나니까 반딧불 돌고래들이 지나가더라고.
그런데 바다에 거대한 새 그림자가 비치는 거야.
뭔가 싶어서 위를 봤지.
와, 진짜 살면서 그렇게 큰 새는 처음 봤어. 과장을 하나도 안 보태고, 덩치가 우리 집보다 컸다니까? 안 믿긴다고? 그럼 믿지 말든가. 이런 걸로 거짓말해서 뭐 하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별로 얘기하고 싶지도 않은데 돈을 준다니까 억지로 말하는 거야. 믿든지 말든지 그건 알아서 판단해.
어쨌든 본제로 돌아가서… 어디까지 얘기했지?
아, 새를 발견한 거까지 얘기했지. 그래, 고개를 드니까 새가 있더라고. 한 10마리? 11마리쯤 됐을 거야.
그중에서 선두에 있던 검은색 새 위에서 웬 사내 한 놈이 갑판 위로 뛰어내리는 거야. 처음에는 뭔가 싶어서 어리바리 깠지.
근데 사내 녀석이 갑판에 착지하더니 검을 뽑네? 그리고 검에서 실오라기가 피어나네?
길을 잘못 든 살쾡이인 줄 알았는데 포식하러 온 호랑이였던 거지.
그 뒤는 어떻게 됐냐고?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내 동기는 그 자리에서 두 동강이 나고, 나는 왼쪽 팔이 잘려 나갔지. 동기 녀석의 시체에 떠밀려서 바다에 떨어졌을 때 진짜로 죽었다 싶었지.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하늘에서 불덩이가 마구 쏟아지더라. 나중에 알고 보니까 마법사들이 폭격을 가한 거더라고.
그대로 가라앉아 죽겠거니, 하고 기절했는데 정신을 차리니까 해안에 떠밀려 와서 겨우 살아남았지.
반딧불 돌고래한테 무사히 집에만 돌려보내 달라고 빌었는데, 그게 통한 것 같긴 해. 그게 아니고서야 살아남을 수 있었겠어?
응? 팔을 잘린 게 원망스럽진 않냐고?
아서라, 아서. 격이 다른 상대한테 당한 건데, 별수 있겠냐. 그냥 새 시대에 맡긴 셈 쳐야지, 뭐.
* * *
퍼엉! 퍼엉! 퍼엉!
하늘에서 마법사들의 파이어볼이 아래로 떨어지며 피아냐 백작의 함선에 부딪혔다. 잠자고 있던 바다가 폭발음에 놀라기라도 했는지, 파도가 거칠게 튀어 올랐다.
대형선, 중형선, 소형선. 피아냐 백작의 모든 함선이 거대한 장작더미로 전락하며 불길에 휩싸였고, 시커먼 바닷물이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선실에서 자고 있던 피아냐 백작은 난데없는 소란에 부랴부랴 갑판으로 뛰쳐나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 아무나 좋으니 상황부터 보고하거라!”
눈을 뜨니까 전 함대가 불타고 있는데 누가 제정신을 유지하랴.
그나마 바다 위의 백전노장인 피아냐 백작이기에 공황 상태에 빠지지 않고 어떻게든 상황부터 파악하려 한 것이다.
목청껏 부하들을 불러 보았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휘이잉!
바닷바람이 강하게 불면서 갑판을 가득 메우고 있던 연기가 걷혀 나갔다. 연기가 걷히면서 갑판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피아냐 백작은 갑판의 상황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했다. 피어오르는 화염 속에서 수백 명의 병사가 모두 시체가 되어 나뒹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겹겹이 쌓여 있는 공국군의 시체 위에 유일하게 서 있는 자가 있었으니.
겉보기엔 말쑥해 보이는 금발의 청년이 흑색 경갑을 몸에 걸치고, 검을 늘어뜨린 채로 다가오고 있었다.
피아냐 백작은 금발 청년이 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 낸 장본인임을 인지했다.
“무패를 자랑하는 내 함대에 시비를 걸다니,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녀석이구나.”
피아냐 백작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거지고, 쥐고 있던 메이스에 마나가 둘러졌다. 특이한 것은 메이스에 맺힌 마나가 메이스의 뭉치 부분에 스며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나 블레이드가 실오라기와 같은 검기를 뿜어낸다면, 마나 메이스는 마나 오라를 뭉치 안쪽에 응축시켜 타격과 동시에 폭발적인 위력을 내는 타입이었다.
겉보기에는 아무것도 두르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소형선 한 척 정도는 가벼이 두 동강 낼 위력을 품고 있는 셈이었다.
피아냐 백작의 위협 앞에서 금발 청년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검을 겨누었다.
“지금 막 1패가 쌓였다만?”
피아냐 백작도 보통은 아닌지라 청년의 외견과 검에 맺힌 마나 블레이드만으로 정체를 유추해 냈다. 다섯 귀족의 반란 사건 이후로 루크에 대한 경계령이 떨어졌기 때문에 인상착의를 비롯한 각종 정보가 지방 귀족들에게 배부된 후였다.
“왕국에 루크란 이름의 새로운 마나마스터가 나타났다더니 네놈이었군. 하나만 알려 주마, 애송아. 내가 건재한 이상 내 수군은 패배한 것이 아니다.”
“확실히 백작이 곧 함대라도 과언이 아니긴하지. 함대 쪽은 잘 쳐줘 봤자 불쏘시개 수준일까?”
“혀 놀림과 검 실력이 동급이라면 오래 살 놈이구나. 당장 네놈을 족쳐, 격의 차이를 알려 주마.”
마나마스터끼리의 전투는 간격 싸움이 7할이라 할 정도로, 서로 간의 간격이 중요하다. 누가 먼저 간격을 좁힐 것이냐, 아니면 일부러 간격을 내주어 한 방을 노릴 것이냐 등등 눈치 싸움에 따라 허무하게 결판이 나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때문에 화염에 뒤덮인 갑판 속에서도 두 사람은 눈치를 보며 꼼짝하지 않았다.
먼저 움직인 자는 피아냐 백작이었다.
그는 간격 싸움에 돌입하는 척만 하고선 곧바로 메이스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콰콰콰콰쾅!
이것이 과연 인간이 내리찍은 타격인가 싶을 수준의 강렬한 폭발음이 발생했다. 메이스의 뭉치 안쪽에 고밀도로 응축되어 있던 마나가 한 점에 폭발하며 강한 충격파를 자아냈다.
태풍에 휘말린 판잣집이 맥없이 으스러지듯, 갑판을 이루고 있던 단단한 나무판이 와르르 박살 나며 배가 기울었다.
쿠구구구!
불에 휩싸여도 부력을 유지하고 있던 대형선이 방금 피아냐 백작의 일격으로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대형선마저도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침수가 시작될 정도의 위력, 아마 사람의 몸에 적중했다간 뼛가루조차 남지 않으리라.
중요한 것은 피아냐 백작이 힘자랑이나 하자고 갑판을 내리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배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루크의 몸도 함께 기울어지며 균형이 흐트러졌다.
반면에 피아냐 백작은 배가 기우는 와중에도 평지를 달리는 것처럼 능숙하게 거리를 좁혀 왔다.
“30년 동안 배를 타 온 날 상대로 선상 전투라니 주제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나!”
다시금 메이스의 뭉치 부분에 마나 오라가 스며들었다. 피아냐 백작은 어차피 불타 버릴 배를 제 손으로 박살 내어 루크의 숨통을 끊기 위한 발판으로 삼은 것이다.
기울어지는 몸을 가누느라 이리저리 휘청거리는 루크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움직이는 피아냐 백작.
어느 쪽이 유리한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피아냐 백작은 자신의 사정거리까지 거리를 좁히고선 메이스를 높이 들었다.
그리고 막 메이스를 내리치려던 찰나, 그는 똑똑히 들었다, 루크가 내뱉은 한마디를.
“내가 보기엔 부질없는 30년인 것 같군.”
그와 동시에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휘청거리던 루크가 보란 듯이 균형을 바로 잡았다. 처음부터 배가 기울어지는 것에 영향을 받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이미 공격 동작에 들어간 피아냐 백작으로선 심리적인 타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방심시키기 위한 수작이었던 건가!’
배가 기울어지는 방향으로 루크의 몸이 떨어지는 것을 예상하고 메이스를 내리찍었다. 그런데 루크가 몸을 돌려 버렸으니, 맞을 턱이 없었다. 그래도 아직 완전히 기세가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못 맞추는 것이라면 더욱 강하게 내리쳐 버리면 될 일이다.
마나 메이스의 위력이라면 충격의 여파만으로도 충분히 타격을 줄 수 있을 터!
그러나 그마저도 간파한 양 루크의 일검이 아래에서 위로 솟구쳤다.
서걱!
아슬아슬한 간격 속에서 루크가 검을 사선으로 그었다. 마나 블레이드 한 줄기가 아슬아슬하게 피아냐 백작의 오른팔을 베어 냈다.
검붉은 피와 함께 베인 피아냐 백작의 오른팔이 높이 솟구쳤다. 덩달아 오른손으로 쥐고 있던 메이스 또한 하늘로 치솟았고 말이다.
제2의 충격으로 피해를 입힌다는 피아냐 백작의 의도는 완전히 빗나간 셈이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루크의 발이 갑판을 박차며 단숨에 간격을 좁혔다. 피아냐 백작의 팔을 베어 내면서 위로 솟구친 그의 검이 단두대의 날처럼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떨어지는 검을 팔로 받아 내려는 듯 피아냐 백작이 왼팔을 위로 들었다.
카앙!
마나 블레이드 앞에서 잘려 나갔어야 할 팔이 멀쩡하게 검을 막아 냈다. 그뿐만 아니라 타격음 또한 심상치 않았다.
검이 막힌 이유를 알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검으로 내리친 부위의 옷자락이 잘려 나가며 옷 안에 덧댄 특제 보호대가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다만 위력에서 밀린 나머지 피아냐 백작의 한쪽 무릎이 풀썩 꺾였다.
피아냐 백작은 수세에 몰린 와중에도 우직하게 버티며 무릎은 꺾였을지언정 투지는 꺾이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크윽, 바닷길을… 내줄 순 없다! 이 나라를, 그리고 전하를 해치게 놔둘 성싶으냐!”
아레나를 위해 몸을 바치겠다는 충성심이 여태껏 그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피아냐 백작의 의지는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고 말았다.
루크의 검에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양의 마나가 흘러넘쳤다.
즈즈즈즈즉!
방대한 마나양 앞에서 조금씩 잘려 나가는 팔 보호대를 두고, 피아냐 백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서 마나양이 더 불어나? 네놈… 설마 지금까지 여력을 남겨 두면서 싸웠던 것이냐!”
“왜지?”
“뭐?”
“왜 내게는 충성을 바치지 않았지?”
“무슨 소리를…….”
“이 나라를 지키려 한 국왕은 버리고, 정작 이 나라를 속국으로 전락시킨 공왕에겐 목숨을 바친다. 그런 건 충성이 아니라 기만이지. 네놈은 충성을 입에 담을 자격이 없어.”
“그게 무슨 소리냔 말이다!”
“설마 로메우가 나라를 팔아먹은 장본인인 걸 모르고 있었나? 그건 그거대로 실망이군, 피아냐 백작. 결국 넌 그것밖에 안 되는 사내였다는 거지.”
루크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 블레이드의 기세가 갑판 전체를 뒤덮을 듯 확산되며 강한 빛을 발했다.
검이 아래로 떨어져 갑판에 닿았을 무렵, 피아냐 백작이 있던 자리에는 갈기갈기 찢어진 잔해만이 남아 있었다.
피아냐 백작의 죽음과 함께 그의 대형 함선이 바닷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휘익!”
“탑승! 탑승!”
휘파람을 불어 파이를 호출한 루크는 갑판을 딛고 훌쩍 뛰어, 파이의 등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폭격을 마치고 V 자 대열을 이루고 있는 비행 부대와 합류하여, 아군의 함선이 오고 있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방향을 틀어라. 이대로 아군 함선에 복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