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39화 제1 관문(3)
제1 관문을 지키는 자는 앤드류였다. 소속은 공왕 직속 기사단이되, 제1 관문 책임자로 지방에서 근무하는 처지였다.
사실 그는 제1 관문을 지키는 것을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말이 요새의 지휘관이지, 최후방에 있는 촌구석 부대로 좌천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출세 좀 해 보겠다고 어쭙잖게 볼트 후작에게 줄을 섰다가 이 모양, 이 꼴이 났다.
공왕의 측근이라 잘 보이면 언젠간 기사단장으로 추천해 주겠거니 했는데, 그리되기도 전에 청문회 사건이 터져서 볼트 후작이 중앙 정계에서 퇴출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출셋길이 막힌 와중에, 잘하면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만회할 기회가 앤드류에게 찾아왔다.
앤드류는 루크군이 피아냐 백작의 함대를 침몰시키고 이쪽으로 몰려온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앤드류 경! 지금 막 루크군이 늪을 건너 협곡 앞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놈들의 장비는 확인했나?”
“네, 검과 도끼, 둔기 등의 가벼운 무기들만 한두 개씩 챙겼고, 그 외의 갑옷이나 방패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숫자가 대략 2,000명 이상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특이한 게 오크들로 이루어진 보병들도 있더군요.”
“흥! 오크 같은 미개한 종족 따위 알까 보냐. 그보다 루크가 왔는지 안 왔는지가 중요하지. 놈은 있더냐?”
“왕궁에서 보내온 인상착의와 동일한 인물이 선두에서 군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내 좌천을 만들어 낸 장본인과 이런 식으로 조우하게 될 줄은 몰랐군. 궁수대와 끓인 기름을 준비해라.”
“네!”
마나마스터도 사람이다. 갑옷과 방패 없이 쏟아지는 화살로부터 완전히 몸을 지킬 순 없을 것이다. 혹여나 화살을 쳐 내며 다가온다 한들, 끓인 기름을 부으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검으로 기름을 베어 낼 순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게다가 이론적으로 하나의 성을 공략하려면 수비대보다 3배는 많은 병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제1 관문의 수비 병력은 700명. 적의 숫자는 대략 2,000명.
단순 계산으로도 3배에 약간 못 미친다.
갑옷과 방패가 없는 것까지 감안했을 때, 루크만 성문에 접근시키지 않으면 막아 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며칠 전에 왕궁에서 지원군을 보냈다고 했지. 놈들을 전멸시킬 것도 없어. 지원군이 올 때까지만 버텨도 공적을 인정받기에는 충분하지. 운이 좋아서 루크, 그놈이 죽으면 더더욱 금상첨화고.’
앤드류는 일이 잘 풀렸을 때의 경우를 머릿속에 그리며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잠시 후 망루에 올라가 있는 병사의 외침이 들려왔다.
“적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 * *
성벽 너머로 시선을 두자 협곡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루크군의 전신이 눈에 들어왔다.
늪을 건너와서 진흙투성이가 된 몰골 좀 구경해 볼까?
기나긴 늪을 건너며 지쳐서 흐트러진 모습을 기대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루크군은 흐트러지기는커녕 위풍당당하게 진격해 오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같이 방패를 앞세우며 다가오고 있었다. 분명 정찰병의 보고에선 갑옷이며 방패는 일절 없다고 했거늘.
하면 저 방패는 대체 어디서 났단 말인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자세히 살피니 금세 방패가 아닌 다른 무언가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 방패가 아니었다. 포대를 앞세우고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포대가 빵빵한 것이 안쪽에 무언가를 가득 채운 모양이다.
여기 와서 포대를 채울 만한 물건이라면 흙 정도밖에 없다.
빈 자루를 들고 와서 흙을 채운 다음에 방패 대용으로 쓸 줄이야.
하지만 방패보다 몇 배는 무거워서 기동력은 훨씬 떨어진다. 그러니 성벽에 다다르기 전에 파상 공세를 퍼부어 최대한 숫자를 줄여야 한다.
앤드류는 검을 높이 빼 들며 목청을 한껏 키웠다.
“궁수대는 당장 사격을 실시해라! 화살을 아끼지 마라!”
“전원 사격 실시!”
부관들이 명령을 복창하며 궁수대에 사격 지시를 전달했다.
그와 동시에 궁병들이 활을 비스듬히 올리며 시위를 놓았다.
피잉! 피잉! 피잉!
대량의 화살이 하늘로 솟구치며 기다란 포물선을 그렸다. 빗발치는 화살에 맞서 루크군이 포대의 각도를 조절하며 화살을 막아 냈다.
푹! 푸푹! 푹!
화살은 사격장의 짚단으로 만든 과녁을 맞힌 듯, 단숨에 위력이 죽어 포대에 틀어박히는 것에 그쳤다. 방패보다 훨씬 무거운 대신 두께가 두껍고, 포대 안에 담긴 자잘한 흙과 자갈의 입자들이 완충제 역할을 해 주어 화살을 위력을 완전히 죽였다.
대량의 화살을 쏘아 보냈건만, 효과는 영 신통하지 않았다.
앤드류는 포대의 수비 범위가 좁아, 하반신을 전혀 방어하지 못한다는 점을 노렸다.
“하체! 하체를 노려라! 놈들에게 더 이상 진격을 허락하지 말란 말이다!”
궁수대는 활의 각도를 조절하여 루크군 선두 부대의 하체를 노렸다.
피잉! 피잉! 피잉!
화살이 아까보다 낮은 궤적을 그리며 날아갔다. 그러나 각도를 낮춘 탓에 비거리가 모자라, 루크군에게 닿는 화살보다 닿지 않는 화살이 많았다. 그나마 비거리를 확보한 화살의 일부만이 루크군 선두 부대의 다리에 틀어박혔다.
“큭!”
“크윽!”
저 멀리서 화살에 맞은 병사들의 신음 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다리에 화살을 맞았는데도 잠깐 주춤할 뿐 계속 접근해 오고 있었다. 다리에 화살을 맞았으니 무릎을 꿇어야 정상이다. 하다못해 화살에 맞은 다리를 질질 끌기라도 해야 한다.
한데 어찌 된 것이 멀쩡히 달려오고 있었다.
앤드류는 이내 곧 멀쩡히 뛰는 병사들이 오크임을 자각했다.
“젠장! 무식하게 몸만 튼튼한 것들 같으니! 다리에 화살을 맞고도 뛸 수 있다니 이게 말이나 되냔 말이다!”
오크의 터프함은 인간의 몇 배나 된다. 맹수를 사냥할 때, 머리를 맞추지 않는 이상 몇 발은 맞춰야 타격을 줄 수 있는 것처럼. 선천적으로 인간과는 다른 근육량과 체력을 지닌 오크를 화살 한 발로 저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오크 보병의 다리에 박힌 화살은 화살촉이 틀어박힌 정도이지, 제대로 관통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화살의 위력이 근육의 밀도를 꿰뚫지 못해 끄트머리만 박힌 수준에서 그친 것이다.
놀라는 와중에도 루크군은 성벽에 근접해 오고 있었다.
앤드류는 예상과 전혀 다른 전개에 다급한 목소리로 다음 수비책을 꺼내 들었다.
“제길! 기름은 준비됐느냐? 답답한 것들! 빨리빨리 보고하지 못하겠느냐!”
성벽에 근접해 온 적을 상대할 요량으로 준비해 둔 끓는 기름을 벌써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성벽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된 가마솥마다 여러 병사들이 장작을 더하며 기름의 온도를 높였다.
“지금 막 팔팔 끓기 시작했습니다!”
“놈들이 다가오면 지체 없이 쏟아 부어라!”
수비하는 쪽에서 취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준비하던 중, 앤드류에게 한 가지 의문이 피어났다.
루크는? 그놈은 어디 있지?
가장 중요한 루크의 모습이 안 보인다.
모름지기 지휘관쯤 되면 그 모습을 확연히 구분할 수 있을 터. 제아무리 포대 뒤에 몸을 숨기고 있다 할지라도 지휘관의 존재는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놈의 접근을 허락하면 성문이 뚫리고 만다. 마나마스터의 무력이라면 제아무리 견고한 성문이라도 쉽게 비집어 열고 말 것이다.
정신없이 분주한 성벽 위에서 앤드류의 눈이 루크를 찾아 희번덕이었다.
루크를 찾아 한창 적진을 둘러보던 차에 궁수대의 사격이 끊겼다.
“적이 오고 있다! 얼른 예비 화살 통으로 교체해라!”
“빨리빨리 움직여! 수성전의 핵심은 우리 궁수대의 움직임이란 걸 잊은 것이냐!”
궁수대가 화살 한 통을 다 비우고 예비 화살통으로 교체할 즈음.
그때를 노리기라도 한 듯 성벽 위에 거대한 새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앤드류의 부관이었다. 앤드류가 루크를 찾아 헤매고 있던 차에 부관이 앤드류의 어깨를 흔들며 위를 가리켰다.
“앤드류 경! 위! 위입니다!”
위가 뭐 어쨌단 말이냐!
바쁜 와중에 어깨를 흔드는 것에 짜증이 나서 욕지거리를 뱉어 내려던 찰나, 앤드류도 성벽 위에 새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위를 올려다보니 웬 집채만 한 새 한 마리가 성벽 쪽으로 급하강을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미, 미친! 저건 또 뭐야!
난생처음 보는 생물체에 놀란 나머지 앤드류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더더욱 가관인 것은 이 다음의 상황이었다. 새 위에서 누군가가 뛰어내리는가 싶더니, 병사들이 가득한 성벽 위에 착지하는 것이 아닌가.
헝클어진 금발과 다부진 체격, 남다른 기품에서 말하지 않아도 그가 루크임을 알 수 있었다.
거대한 새의 등장으로 인해 성벽 위의 모두가 감각이 둔해진 틈을 타서 마나 블레이드가 사방으로 뻗었다.
서걱! 서걱! 서걱!
“크아아악!”
“크어헉!”
“앤드류 경! 놈이 올라왔습니다! 마나마스터가 성벽에 난입했습니다!”
나도 눈이 달렸어, 이 자식아!
앤드류는 욕지거리부터 내뱉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 냈다. 루크에게 비행 수단이 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다. 어쩐지 안 보인다 싶었는데, 처음부터 궁수대가 화살 통을 바꾸는 순간을 노렸던 건가!
정석대로 성문을 부수러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벽 위로 난입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일당백의 마나마스터 대 마나유저 상급과 마나가 한 줌도 없는 병사.
결과는 명명백백했다.
루크의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일거에 양단되어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었다. 핏물과 내장 조각이 낭자하며 성벽 위 병사들의 전의를 앗아 갔다.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적군의 전의를 빼앗는 것.
그것이 바로 마나마스터란 존재였다.
일렁이는 마나 블레이드에 압도당한 병사들이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적을 앞에 두고 물러나는 병사들을 본 앤드류가 일갈을 내질렀다.
“뭣들 하는 것이냐! 우리가 놈에게 유일하게 앞서는 건 머릿수밖에 없거늘, 유일한 이점마저 없앨 작정이냐! 놈을 둘러싸라!”
병사들이 용기를 내어 대형을 재정비했다.
그러나 정작 루크는 성벽 위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계단을 밟고 성벽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앤드류는 루크가 둘러싸이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도망친다고 확신했다.
“저기 봐라! 둘러싸이는 게 무서워서 도망가지 않느냐! 결국 놈도 사람이다! 너희들이 두려워 도망치는 자를 겁낼 필요가 있겠느냐!”
하지만 앤드류가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루크가 성벽 아래로 내려간 것은 포위를 면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어지는 파이의 후속 공격에 피해를 입지 않도록 미리 몸을 뺀 것에 불과하다.
루크가 성벽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파이가 움직였다.
파이는 저공으로, 성벽에 날개가 스칠 듯한 궤도로 날았다. 그러면서 날개 끝을 이용하여 성벽의 끄트머리에서부터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던 가마솥을 차례대로 밀쳐 냈다.
툭! 툭! 툭! 툭!
고속 비행을 이루는 무거운 날개에 부딪힌 가마솥이 멀쩡하게 있을 리 없었다. 파이의 날개 끝에 부딪힌 가마솥이 성벽 안쪽으로 기울어지며 끓는 기름을 쏟아 냈다.
루크군을 향해 부으려던 끓는 기름은 역으로 성벽에 있던 제1 관문 병사들을 덮쳤다.
치이이익! 치이익!
“끄아아아아!”
“뜨거워! 뜨거워!”
“으어어어어! 얼굴이! 몸이!”
기름이 쏟아지는 범위 안에는 앤드류도 포함되어 있었다.
앤드류 또한 갑자기 쏟아진 대량의 기름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끓는 기름을 뒤집어썼다. 팔팔 끓인 기름을 뒤집어썼는데 몸이 온전할 리가 있겠는가.
앤드류의 전신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차마 눈 뜨고는 못 볼꼴이 되었다.
“크아아악!”
앤드류는 눈도 제대로 못 뜨고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급기야 계단을 흥건히 적신 기름에 미끄러져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화상에 타박상, 골절 등등.
앤드류의 몸은 이미 회복이 불가능한 부상을 입었다.
아직 검도 한번 못 휘둘러 봤거늘!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고 비명만 지르던 중 루크의 것으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도망쳐서 미안하게 됐어. 아무리 나라도 끓는 기름을 뒤집어쓰는 건 싫거든.”
아까 앤드류가 기세에 취해 내뱉은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루크였다.
비아냥거림이 가득한 목소리에 앤드류가 악에 받쳐 욕지거리를 내뱉으려 했으나, 그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전에 루크의 검이 그의 목을 내리쳤기에.
서걱!
앤드류의 목을 쳐 낸 루크는 요새 안에 남아 있는 공국군 병사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마나 블레이드가 일렁이는 검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공국군이 얼마나 현명한지 알아볼 기회로군. 단신으로 적진에 떨어진 자와 싸울지, 항복할지, 둘 중 하나를 택할 기회를 주지.”
참담한 모습으로 죽은 지휘관과 수성전의 핵심인 성벽 방어선의 붕괴. 그리고 상처 하나 없이 건재한 마나마스터.
맞서 싸울까? 항복할까?
어느 쪽이 현명한 판단인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요새 안에 남아 있던 병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기를 땅바닥에 놓으며 두 손을 들었다.
“항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