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40화 언제나 맹점을 찌른다(1)
제1 관문을 점령한 루크는 병사들에게 휴식을 명했다. 그러고는 러스트를 시켜, 피해 현황을 파악하게 했다.
잠시 후, 피해 상황을 알아보고 돌아온 러스트가 보고를 올렸다.
“사망자 20명에 부상자는 중상은 30명, 경상이 100명쯤 됩니다.”
제아무리 커다란 방패를 들고 있다 할지라도 수천 명의 병사가 수백, 수천 발의 화살을 모두 피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소수라 할지라도 사망자는 발생할 수밖에 없고, 다리에 화살을 맞은 자들이 많아서 부상자가 생각 이상으로 많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루크 감상일 뿐, 객관적으로 보면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연의 혜택을 받고 있는 요새를 공략하는 데 사망자 숫자가 겨우 두 자릿수에 불과하다. 이만하면 최대한의 속도로, 병력의 손실을 최소화하여 공략한다는 당초의 목표는 이룬 셈이다.
루크는 전투의 뒤처리를 위하여 세세하게 지시를 내렸다.
“부상자를 위한 임시 병동을 설치해야겠군. 그리고 방패막이로 썼던 포대에 화살이 제법 박혀 있을 테니, 그거 전부 회수해서 활용할 수 있도록 분배해 둬.”
일반 방패로 화살을 막으면 화살대가 부러지거나, 화살촉이 휘어서 재활용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흙으로 채운 포대를 방패로 대신 썼다. 때문에 화살이 손상된 곳 없이, 고스란히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러스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그머니 질문을 꺼내 들었다.
“혹시 적의 화살을 회수할 것까지 염두에 둔 선택이셨습니까?”
“염두에 뒀다기보다는 포대를 방패로 쓰면 당연히 화살은 저절로 따라오지 않나? 처음부터 겸사겸사 무기 보충도 하고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었다만. 무슨 문제라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보통은 잘 안 보이는 부분까지 보시는구나 싶어서 그저 감탄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보다 포로들을 모두 포박해서 요새 한복판에 앉혀 둬.”
“어딘가에 가둬 두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따로 쓸데가 있어서 그래. 말한 대로 해 둬.”
“아, 네. 일단 알겠습니다.”
* * *
뒷정리가 끝나고 날이 저물 때 즈음, 제랄드가 후발대를 이끌고 제1 관문에 도착했다.
제랄드는 기름이 눌어붙은 성문을 통과하며 손으로 코를 잡았다.
“냄새 한번 기름지군요. 맡기만 해도 살이 찔 것 같은데요?”
제랄드의 중얼거림에 옆에서 같이 걷고 있던 오즈가 인자한 미소를 띠었다.
“허허허, 제랄드 경이 젊은 귀족 영애들이나 할 법한 소리를 할 줄은 몰랐군. 돌도 씹어 먹을 얼굴을 하고선 의외로 자기 몸무게에 민감한가 보구먼.”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몸 관리는 철저하게 하고 있습니다.”
“자네는 몸의 기름기보다 성격의 기름기부터 채워야 할 것 같구먼.”
“전에는 안 그랬는데 한 번 기름기를 빼고 나니, 좀처럼 바뀌질 않더군요. 남작님을 진심으로 따르기 시작한 후부터 저도 모르게 자꾸 힘이 들어가서 말이죠.”
“뭐야. 그럼 그 전에는 진심으로 안 따른 건가? 허어, 남작님께 말씀드리면 크게 실망하시겠군.”
“뭘 또 보고씩이나 하려고 그러십니까?”
“농담일세. 자네 반응을 보고 있자니 남작님이 이따금씩 골려 먹는 것도 이해가 가는구먼.”
“남작님만으로도 벅찹니다. 부탁이니 삼가 주십시오.”
오즈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중, 제랄드가 요새의 정중앙 부근에 루크가 서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제랄드는 기쁜 마음으로 루크에게 다가가서 예부터 갖추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남작님. 승전을 또 하나 쌓으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아, 제랄드. 마침 잘 왔어. 후발대는 전부 다 데려왔나?”
“보급품을 지킬 일부 병력만 놔두고 왔습니다.”
“보급품을 옮길 방법은?”
“글쎄요. 지금으로선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서 잘……. 늪을 통해 옮기려 하면 가라앉을 테고, 산길을 이용하자니 길이 없어 수레가 지나가길 못하죠. 남작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따로 생각해 두신 바가 있으십니까?”
제랄드는 루크라면 벌써 해결책을 찾아 놓았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게 아니면 당장은 해결책이 없더라도 금방 해결책을 떠올릴 것이라 여겼다. 루크는 언제나 그래 왔고,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으니 말이다.
한데 이번만큼은 제랄드의 기대가 어긋났다.
이번에는 정말로 해결 방법이 없는 것인지 그 루크마저도 고개를 저었다.
“산길이 무리라면 보급품 운반은 힘들겠군. 당초 예정보다 훨씬 이르지만 지금부터 현지 조달로 버텨야겠어.”
“정말로 방법이 없습니까?”
“정말로 없어.”
그런데 루크가 바닥에 앉혀 놓은 포로들로부터 등을 돌리더니 제랄드에게만 보이도록 한쪽 눈을 깜빡였다.
방법이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일부러 잘못된 정보를 흘리고 있다는 신호였다.
이미 사로잡은 포로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흘려서 어찌하실 생각인 걸까?
아무래도 제2 관문 공략에 포로를 써먹을 생각인 듯하다.
제랄드는 눈치껏 장단을 맞춰 주었다.
“현지 조달이면 제1 관문에 있는 식량으론 어림도 없을 테지요. 아군이 먹을 것도 부족한데 포로들까지 먹이기엔 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포로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대화의 흐름상 식량을 비축하기 위해 포로들을 처형시킨다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이지 않은가. 체면 불구하고 항복하여 기껏 목숨을 부지했건만, 식량 문제로 죽게 생겼다.
하지만 포로들의 예상과 달리 루크는 피를 보지 않는 쪽으로 결단을 내렸다.
“포로들을 풀어 주도록 하지.”
포로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기껏 잡은 포로들을 풀어 준다? 물론 인도적인 차원에서 충분히 내릴 수 있는 판단이긴 하다. 하지만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되었지 않은가. 포로들이 다른 관문의 병사로서 재무장하면 괜히 적의 병사만 새로 보충해 준 꼴이 된다.
루크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포로들에게 자신의 결정을 전달했다.
“지금부터 너희들을 풀어 주겠다. 고향으로 돌아갈지, 다른 부대에 합류해서 공국군의 병사로 다시 내게 창을 겨눌지는 너희들의 양심에 맡기도록 하지. 앤드류가 어떻게 죽는지 본 녀석이라면 어느 쪽이 현명한 판단일지 알고 있을 테지만 말이야.”
양심에 맡긴다.
이 말만큼 허울 좋은 말이 있을까. 모름지기 하늘에서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감각을 가진 자를 두고 ‘양심 있는 자’라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확인하는 것은 자신의 주변뿐이다. 당장에 보는 눈이 사라지면 양심이고 나발이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기 마련이다.
포로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포로들은 겉으로는 루크의 자비에 감복한 양 엎드려 절하며 감사의 말을 올렸다.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다시없을 훌륭한 인품에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훗날 길이길이 전해질 남작님의 무용담의 산증인이 되겠습니다!”
겉모양뿐인 감사 인사 속에서 루크는 명령을 내렸다.
“포로들을 풀어 줄 준비를 해라.”
그러고선 제랄드에게 가까이 접근하여 그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조금 있다가 포로들을 풀 거야. 그전에 포로랑 똑같은 복장으로 갈아입고 몰래 포로 대열에 섞이도록 해. 겉으론 고맙다 말하고 있어도, 풀려나면 곧장 제2 관문으로 향할 테지.”
“저들의 틈에 섞여서 제2 관문에 잠입하란 말씀이시군요.”
“혼자서는 힘이 부칠 테니 기사들을 몇 명 뽑아서 데려가도록 해. 하룻밤 쉬고 바로 제2 관문으로 갈 테니 미리 관문 안쪽의 잠금장치를 풀어 둬.”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거 하나는 꼭 듣고 가야 마음이 편할 것 같은데 물어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급품은 어떻게 옮기실 생각이십니까?”
아까는 일부러 포로들 들으라고 한 말이고, 실제론 루크는 보급품을 운반할 방법을 생각해 두었을 것이다.
그 부분을 듣지 않고선 제랄드는 상쾌한 마음으로 잠입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 같아 물어보았다.
루크는 썩 대단한 것도 아니라는 양 손쉽게 해답을 내놓았다.
“파이랑 삼색 제비들 시켜서 나르면 되지 뭘 그리 고민해?”
파이와 삼색 제비의 근력이라면 1시간 이내의 비행 거리란 가정하에 대량의 화물을 옮기는 것은 일도 아니다.
안 그래도 마법사들에게 마나가 없어 놀고 있는 부대인데, 화물이라도 옮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누군가가 세운 깨진 달걀처럼, 듣고 보니 이토록 쉬운 해답이 없었다.
제랄드는 깨달음이라도 얻은 양 무릎을 탁 치며 상쾌한 표정을 지었다.
“비행 부대를 깜빡했군요.”
“알았으면 슬슬 준비해. 너무 지체해도 수상하게 보일 테니까.”
“네, 당장 인원을 차출해서 포로로 분장하도록 하겠습니다.”
* * *
풀려난 포로의 숫자는 대략 300명.
그중에는 원래 제1 관문에서 근무하던 상비군도 있고, 인근 영지에서 살다가 소집령과 함께 차출된 병사들도 있다. 때문에 모두가 서로의 신원을 모두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더불어 포로로서 항복할 때 모든 장비와 소지품을 빼앗겼기 때문에 서로 간에 신분을 증명할 물건조차 없었다.
고로 열댓 명쯤 새로운 얼굴이 섞여 든 것을 알아차린 자는 아무도 없었다.
풀려날 때만 하더라도 감사의 감정을 표하던 이들은 제1 관문에서 멀찍이 떨어지자마자 본색을 드러냈다.
“참 나, 무르구먼, 물러. 전쟁 중에 포로를 풀어 주다니, 바보 아냐?”
“이대로 왕국군에게 당하고 물러나는 건 성미에 안 맞아. 제2 관문으로 가서 합류하자고.”
“그래그래. 모처럼 전쟁에 참가했는데 패잔병으로 돌아가는 건 좀 아니지. 그럴듯한 공적이라도 세우고 돌아가야 고향 사람들 볼 면목이 있을 것 아냐.”
“안 그래도 좋은 정보를 많이 얻었으니 그거만 제2 관문에 전해도…….”
루크의 행동을 비웃는 자가 있는 반면, 정말로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 하는 자들도 더러 섞여 있었다.
“난 포기하겠어. 너희들도 앤드류 경이 어떻게 당하는지 봤잖아. 그런데 그 괴물을 또 상대하자고? 미친 짓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야.”
“어이, 거기 겁쟁이. 방금 뭐라고 지껄였어? 공국이 위기인데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탈영을 해? 앤드류 경을 대신해서 내가 대신 군법을 실시해 주랴?”
“우리끼리 싸워서 어쩌자는 거야? 갈 길이 먼데 싸우고 있을 시간 없어. 제2 관문으로 갈 사람은 가고, 이탈할 사람은 이탈하자고. 그게 제일 깔끔하지 않겠어?”
포로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로메우의 세뇌 정책 때문에, 겐크 왕국에 대해 악감정을 품고서 여전히 싸우고자 하는 자들.
루크의 강대한 무력에 질려 이탈하고자 하는 자들.
어느 쪽이 현명하냐고 묻는다면 단연 후자 쪽이었다.
결국 포로들은 제 갈 길을 알아서 찾아가기로 하고선 두 무리로 나뉘었다.
물론 제랄드와 그의 부하 기사들은 제2 관문으로 향하는 무리에 섞여 들었다. 이대로 제2 관문으로 가면 순조롭게 잠입할 수 있을 듯하다. 다만 거슬리는 것이 있다면 제2 관문으로 가는 내내 포로들이 자꾸만 루크를 욕한다는 점이었다.
“그 마나마스터 귀족 양반, 비겁한 짓만 골라서 하더만. 명색이 마나마스터씩이나 되면서 더럽게 수작만 부리고 말이야.”
“무늬만 마나마스터지, 마나마스터 중에선 약한 편인 거 아냐?”
“저번에 지원군으로 렌디 경이 직접 오신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아. 렌디 경이 오실 때까지만 버티면 그놈 따윈 상대도 안 되지.”
피해를 줄이기 위해 힘이 아닌 계책으로 제1 관문을 무너뜨린 탓인지, 포로들은 심하게 루크를 저평가하고 있었다. 흡사 그 꼴이 훈수나 둘 줄 아는 가짜 전문가들 같아 제랄드는 웃음만 나올 따름이었다.
검을 한 번도 쥐어 본 적 없는 배불뚝이 귀족이 투기장의 검투사들을 보며 싸움의 달인인 양 평가해 대는 것처럼, 포로들도 자기가 뭐라도 되는 양 루크를 씹어 댔다.
정작 직접 싸워 보라고 하면 덤비지도 못할 거면서 말이다.
자타공인 루크 바라기인 제랄드는 마음속으로 인내란 글자를 수백, 수천 번 써 내며 겨우겨우 베어 내고픈 마음을 참아 냈다.
그러던 차에 함께 걷고 있던 포로 한 명이 제랄드에게 동의를 구했다.
“아무튼 양심에 맡기겠다면 으스대던 꼴이 어찌나 눈꼴 시리던지 원.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제랄드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루크의 욕만큼은 절대로 입에 담을 수 없다.
그렇다고 어설픈 행동으로 잠입 임무를 망칠 순 없는 노릇이다.
고로 제랄드는 절충안으로 욕을 가장한 자화자찬을 택했다.
“그래. 딱 봐도 밑에 있는 사람 고생시키는 인상이더구먼. 그런 사람 밑에서 일하는 부하들도 참 대단하다, 대단해.”
욕인지 아닌지 애매모호한 발언에 기존의 포로들은 싱거운 반응을 보이며 다시 저희들끼리 뒷담화를 재개했다. 더불어 제랄드와 함께 임무에 참가한 기사들은 입술을 꽉 깨물며 웃음을 참느라 안간힘을 썼다.
뒤늦게 부하 기사들이 듣고 있었음을 깨달은 제랄드는 난처해하며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댔다.
‘쉿! 이번 건 함구하도록 해. 적에게도, 아군에게도. 알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