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41화 언제나 맹점을 찌른다(2)
제2 관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절벽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은 천연 요새라 할 수 있었다. 절벽 끄트머리에 성벽을 둘러 요새를 쌓은지라 3면이 절벽이고, 오로지 한 방향으로만 요새에 진입할 수 있다. 더군다나 제2 관문에서부턴 비행 부대에 대한 대책도 철저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폰이든, 와이번이든, 가고일이든 일격 일살을 노릴 수 있는 장비도 넉넉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제1 관문을 통과한 원정군은 제2 관문을 공략하지 않아도 제3 관문으로 갈 수 있다는 점이다. 굳이 절벽 끄트머리에 있는 요새를 공략하지 않아도 제3 관문으로 가는 길은 열려 있다.
단, 제2 관문을 공략하지 않고 지나치면 제3 관문을 공략할 때 제2 관문의 병력들이 튀어나와 원정군의 후방을 공격한다.
잠깐 편하자고 제2 관문을 패스하고 지나치면 공국군에게 앞뒤로 둘러싸여 낭패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공략하자니 정면의 좁은 길로만 공격할 수 있으니 피해가 크고, 그냥 지나치자니 언제 후방을 공격당할지 모른다.
이와 같은 난공불락의 절벽 요새를 루크군은 포로를 이용한 잠입 작전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마이어 남작님! 제1 관문의 패잔병들이 찾아왔습니다!”
성벽 위의 병사가 급히 요새 안쪽을 가로질러 막사 안의 지휘관에게 패잔병의 방문을 알렸다.
제2 관문의 지휘관은 마이어 남작이란 자로 이 지역을 다스리는 귀족이었다. 평소에는 요새에 최소한의 정비를 위한 병력만 남겨 놓고, 전시 때만 상비군과 징집병을 무장시켜 요새로 들어오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상비군의 숫자는 200명, 징집병의 숫자는 800명으로 총 1,000명이 주둔하고 있으며 마이어 남작은 마나유저 상급 수준의 실력자였다. 마이어 남작 외에도 마나유저 초급의 기사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어서, 규모 자체는 제1 관문보다 큰 편이었다.
“뭐, 제1 관문이 벌써 뚫렸단 말이냐?”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물건이 없어서 정말 제1 관문 소속의 병사들인지조차 확실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최근에 제1 관문에 파견 나갔던 병사들을 데리고 와서 아는 얼굴이 있는지 확인시키거라. 만약에 정말로 제1 관문이 뚫렸다면 어떻게 뚫렸는지 들어 봐야 할 테니 말이다.”
피아냐 백작의 함대가 전멸 당했다는 소식을 듣긴 했다. 그래서 곧바로 병사들을 꾸려 요새 안으로 들어온 것이고 말이다.
한데 소식이 들린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제1 관문이 돌파당했다고 한다.
대체 무슨 마술을 부렸기에?
적과 부딪치기 전에 최소한 머릿속으로 가상전을 그려보기 위해서라도 먼저 루크군과 부딪쳐 본 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볼 필요가 있었다.
* * *
“있습니다! 제1 관문 소속의 병사들이 맞습니다!”
예전에 제1 관문에 파견을 나갔던 병사들이 기억하고 있는 얼굴을 발견하는 것으로 신원을 확인했다. 사실 말이 신원 확인이지 거의 겉핥기식 확인에 불과했다.
루크가 괜히 소지품을 전부 압수한 것이 아니다.
일부러 신원을 대충 확인할 수밖에 없도록 유도하기 위해 사전에 작업해 둔 것이었다.
이런 세세한 작업이 상대의 심리를 조금씩 흔들고, 나아가 상대를 루크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만든다.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세세한 사전 작업을 인지하지 못하기에 자신이 왜 당하는지조차 모른 채로 당하게 되는 것이다.
“문을 열어라!”
끼이이익!
제2 관문 요새 정면의 문이 양쪽으로 벌어졌다.
제랄드와 부하 기사들은 패잔병들 틈에 섞여 제2 관문 안으로 들어갔다.
제2 관문 안은 외벽과 내벽, 이중 구조로 되어 있었다. 외벽이 밀리더라도 내벽으로 물러나서 한 번 더 수성전을 펼칠 수 있는 구조였다.
제랄드는 외벽 안으로 들어가며 제2 관문의 구조를 낱낱이 파악했다.
‘외벽과 내벽의 문을 모두 망가뜨려야 우리 군대가 들어올 수 있겠어.’
외벽을 지나 내벽으로 들어가자 제2 관문의 지휘관인 마이어 남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패잔병들을 맞이하는 표정이 그리 달가워 보이진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마이어 남작은 패잔병들과 마주하자마자 대뜸 호통부터 쳤다.
“대체 뭘 어떻게 싸웠길래 순식간에 제1 관문을 내준단 말이냐! 너희들이 그러고도 아레나 공국의 병사들이더냐!”
“들어 주십시오, 마이어 남작님. 앤드류 경을 비롯한 병사들이 필사적으로 항전했으나 적군의 숫자가 많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더러운 수법을 남발하여 고전 끝에 침입을 허용하고 말았습니다.”
“앤드류 그놈은 항상 왕궁기사단 출신이라며 거들먹거릴 줄만 알고 실제로 능력은 쥐뿔도 없었지. 일단 적군의 규모와 구성, 관문이 뚫리게 된 경위를 낱낱이 고하거라.”
아무래도 평소에 제1 관문 지휘관인 앤드류와 사이가 안 좋았나 보다. 경력은 미천한데 계급은 귀족인 자와 경력은 화려한데 기사인 자가 이웃으로 만났으니, 사이가 안 좋을 수밖에.
한껏 사람의 의욕을 깎아 낸 후에야 용건을 꺼내는 전형적인 꼰대 성향의 마이어 남작이었다.
패잔병들은 기분 나빠 하면서도 상급자의 명령인지라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고했다.
루크군이 마나마스터, 오크군, 비행 부대로 이루어져 있는 것부터 보급품을 옮길 수 없어 초조해하고 있다는 것까지 전부 말했다.
마이어 남작은 이야기를 듣는 내내 표정이 안 좋다가, 루크군에게 보급품의 경로가 없다는 것을 듣자마자 화색을 띠었다.
“그렇다면 놈들은 무조건 현지 조달로만 군량미를 확보하려 들겠군.”
“네, 안 그래도 그런 얘기가 오갔습니다. 정 급하면 민가라도 습격해서 약탈을 자행할지도 모르죠.”
“민가 습격은 오히려 제 목을 조르는 꼴이지. 전쟁의 명분마저 잃을 텐데, 제아무리 왕국군이 막돼먹은 녀석들밖에 없다지만 그렇게까지 하겠느냐. 십중팔구 요새를 점령해서 우리 공국군의 군량미를 확보하려 들 테지. 시간만 끌면 알아서 굶주려 지쳐 갈 테니, 수비 일변도로 대처해야겠군.”
“저희도 요새 방어에 일조하겠습니다.”
“좋다. 너희들에게 지금까지의 실책을 만회할 기회를 주겠다. 여봐라! 당장 병사들을 각 분대에 배속시키고 장비를 지급해 주거라!”
시간을 끌기만 해도 유리하다고 판단한 마이어 남작은 단단하게 수비를 굳힐 요량으로 패잔병들의 합류를 허락했다.
그 덕에 제랄드와 그의 부하 기사는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제2 관문 진영 속에 녹아들었다.
* * *
마이어가 거짓 정보를 전달 받고 있는 동안, 루크군은 비행 부대를 이용하여 보급 물자를 제1 관문으로 옮겼다.
이번에 함선에 실어 온 군량미는 3,000명이 한 달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다음 보급을 하려고 해도 루크군의 함선이 드래프트 영지에 갔다 올 즈음이면, 공국군이 남쪽 해상의 방어선을 다시 구축할 가능성이 높았다.
때문에 사실상 더 이상의 보급은 불가능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한 달 치의 군량미에, 각 관문에 비축되어 있는 군량미를 탈취하는 것으로 식량을 확보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제1 관문에서 재정비를 마친 루크는 전군을 이끌고 제2 관문으로 향했다.
“지금쯤이면 제랄드가 제2 관문에 들어갔겠지.”
루크의 잠입 작전에 대해 미리 들은 러스트가 이번 작전의 성공 가능성을 언급했다.
“지금 와서 이런 말씀드리기 뭐 하지만, 제랄드가 성문의 잠금장치를 제대로 부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적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성문 주변에는 낮이고 밤이고 경비를 붙여 두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아마도라니…….”
“걱정할 거 없어. 성문 주변의 경비가 문제라면 경비에 소홀해지도록 만들면 그만이니까.”
루크는 잠입한 제랄드에게만 성문을 여는 책임을 지게 할 생각은 없었다. 루크가 바깥에서 적의 심리를 쥐고 흔들수록, 안쪽에 있는 제랄드의 임무 성공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제2 관문의 지휘관 및 병사들을 뒤흔들 작전은 미리 준비해 두었다.
“병사들을 주간조, 야간조로 나누어서 각각 낮과 밤에 교대로 자게 해 둬.”
“절반은 주간조, 절반은 야간조로 나누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일단 오늘은 조를 나누지 말고, 다 같이 진지 공사부터 시작하게 해. 밥 먹고 잘 공간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 * *
제2 관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 루크군의 진지가 만들어졌다.
제2 관문 외벽 위에서 루크군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마이어 남작은 본인의 시점에서 멋대로 루크군의 행동을 해석했다.
“확실히 급하긴 급한가 보군. 진지 공사를 저리 대충하다니 말이야.”
멀리서 보기에도 루크군의 진지는 엉성하기 그지없었다. 방벽 같은 것은 일체 쌓지 않고, 부랴부랴 잠을 잘 수 있는 천막만 세워 놓는 것이 고작이었다.
초보도 저렇게 엉성하게 쌓진 않을 거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루크군의 진지 꼬락서니에 마이어 남작의 기사들은 야습을 권했다.
“야습을 꾀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저런 엉성한 진지라면 적은 숫자로도 능히 적들을 섬멸할 수 있을 겁니다.”
“아서라. 우리가 제 발로 나오게 하려고 일부러 엉성하게 짓고 있는 걸 수도 있잖느냐. 어차피 놈들에겐 군량미가 얼마 없으니 제 풀에 지쳐 알아서 덤벼 올 거다.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수비에만 집중하거라.”
“네!”
오로지 수비! 수비! 수비!
군량미가 얼마 없다는 사실이 마이어 남작에게 수비만 생각하게 만들었다.
한데 마이어 남작이 예견한 것 이상으로 루크군이 빨리 움직였다.
진지 공사가 완성된 당일 저녁, 루크군 진영에서 1,500명쯤 되는 병력이 제2 관문으로 다가왔다.
루크군의 선두에는 장검을 든 자가 서 있었는데, 검에 두른 마나 블레이드를 통해 그자가 루크임을 알 수 있었다.
루크군의 공세가 시작될 것을 예감한 마이어 남작은 재빨리 수비 지시를 내렸다.
“적의 공격이 시작된다! 각자 자기 위치를 고수해라!”
마이어 남작은 제아무리 마나마스터라 할지라도 뚫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1차 저지선 역할을 도맡을 궁수대.
2차 저지선 역할을 도맡을 기름 솥.
그리고 지공과 대공, 양쪽을 모두 대응할 수 있는 대형 작살 발사대까지.
화살까진 어찌어찌 방패로 막으면서 와도, 쏟아지는 기름까지 검으로 걷어 낼 순 없는 법. 그렇다고 제1 관문 때처럼 비행 부대를 이용하려 해도, 대형 작살 발사대가 기다리고 있다.
피해를 감수하고 외벽을 뚫는다 하더라도, 내벽으로 가서 처음부터 다시 방어진을 구축하면 그만이다.
기름 솥에 대량의 장작이 더해지며 기름이 팔팔 끓어올랐다.
기름 끓는 소리를 들은 마이어 남작은 손바닥을 비비며 루크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자, 이쪽은 준비를 마쳤다. 올 테면 오거라.”
돌격할 작정인지 루크가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에 호응하듯 루크의 뒤에 정렬해 있던 병사들이 창을 높이 들며 우렁찬 함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
하지만 소리만 요란하게 지를 뿐, 돌격할 기미가 안 보인다.
루크군은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것처럼 제자리를 유지했으며, 루크도 검에 부여한 마나 블레이드를 해제했다.
성벽 위에 있던 마이어 남작과 그의 병사들로선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저것들 왜 저래? 소리만 지르고 올 생각을 안 하잖아?”
돌격하겠거니 싶어 계속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데도 루크군은 제자리에서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1시간, 2시간, 3시간…….
시간이 흘러 저녁이 되었는데도 요지부동인 것은 여전했다.
루크군이 제2 관문에 도착해서 한 짓이라곤 1시간 단위로 루크가 마나 블레이드를 펼치며 병사들과 함께 함성을 지른 것밖에 없다.
루크군이 움직인 것은 해가 진 후였다.
그마저도 돌격하느라 움직인 것이 아니라, 관문 앞에 있던 루크군 병사들이 진지에 있던 병사들과 교대한 것이 고작이었다.
밤이 깊어가도록 오로지 대기 유지. 그리고 1시간 단위로 이어지는 마나 블레이드 발현과 병사들의 함성.
“와아아아아!”
제2 관문에 있던 자들은 루크의 해괴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마이어 남작님, 저것들 단체로 실성한 거 아닐까요?”
“어쩌면 우리가 경계하느라 지치는 걸 노리는 것일 수도 있겠군.”
“덤벼들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가마솥의 불은 끄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 그 틈을 노리고 덤벼 올지도 몰라. 기름은 계속 끓는 점을 유지해 두거라. 어차피 급한 건 저쪽이니 저러다 말겠지.”
“저희는 괜찮지만 병사들은 서서히 지쳐 가고 있습니다.”
“뭘 어렵게 생각하느냐? 저쪽이 교대를 한다면 우리 쪽도 계속 교대하면 될 일 아니더냐. 우리도 병사들을 주간조, 야간조로 나누거라.”
어디까지나 급한 것은 루크군 쪽.
그리 생각하고 있기에 빈틈만 안 보이면 된다고 여겼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교착 상태에 이른 지 사흘째에 돌입했다.
놀라운 것은 루크군 쪽에서 교대하는 것은 병사들뿐이고, 루크 본인은 계속 제2 관문 앞에 대기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람인 이상 사흘 내내 밤을 새면서 말에 타 있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엔 루크도 대역을 세우는 것이 아닐까 싶었는데, 1시간 간격으로 마나 블레이드를 발현하는 것으로 봐선 그것도 아니었다.
마나마스터를 막기 위해선 궁병, 가마솥, 대형 작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빠져선 안 된다.
때문에 사흘 내내 궁병 부대와 가마솥의 불 담당, 대형 작살 발사대 담당자들은 주간조와 야간조로 나뉘어 줄곧 루크의 접근을 경계했다.
사흘째에 이르던 날.
제2 관문 안에서 한 가지 문제점이 발생했다.
가마솥의 상황을 살피러 간 기사들이 문제점을 발견하곤 황급히 마이어 남작을 불렀다.
“마이어 남작님! 큰일입니다!”
“적군은 아직 그대로 있거늘 뭐가 큰일이란 말이냐?”
“기름을 끓일 장작이 바닥났다고 합니다!”
사람은 교대가 가능해도 불을 땔 장작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루크가 뻔히 대기하고 있는데 기름을 안 끓일 순 없지 않은가. 장작을 아낀답시고 일단 불을 끈 다음, 루크가 움직인 것을 본 후에 기름을 끓인다면? 식었던 기름이 다시 끓을 때 즈음이면 놈이 성문에 다가와 마나 블레이드로 성문을 베어 낼지도 모른다.
마이어 남작은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구멍이 생긴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횃불용 장작이라도 넣어서 때워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급한 건 놈들이다. 놈들의 병력 규모라면 벌써 제1 관문에 남아 있던 식량이 바닥날 때가 되었으니 오늘이나 내일 안에 습격해 올 테지.”
그리하여 밤에 요새 안을 비출 횃불용 장작마저도 전부 기름을 데우는 데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대치를 시작한 지 사흘째 되는 날 밤.
횃불용 장작마저도 전부 사용한 탓에 제2 관문은 성벽 위를 제외한 모든 장소가 어둠에 잠겼다.
달마저 구름에 가려져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어둠 속에서, 며칠간 숨죽여 잠입하고 있던 제랄드와 그의 부하들이 행동을 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