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46화 추잡함의 끝(1)
제6 관문은 최근 전염병 때문에 곤혹을 치르고 있었다.
싸우기도 전에 수백 명이 전염병으로 사망했고, 감염된 수천 명은 요새와 떨어진 장소에 격리되었다.
매일매일 대량의 시체가 요새 바깥으로 운반되었으며 수레에 실려 나온 시체는 구덩이 속에 던져짐과 동시에 소각되었다.
이와 같은 사정 때문에 제6 관문에 도착한 렌디는 요새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서 제6 관문의 기사들과 조우했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렌디 경!”
여느 때처럼 렌디의 표정은 무심하기만 했다. 가치 없는 떨거지를 보는 듯 차가운 표정을 일관할 뿐이었다.
다만 전염병으로 죽은 자들을 태운 냄새가 성 밖까지 전해 온 탓에 평소보다 미간의 너비가 약간 좁아져 있었다.
“전황은 어떻지?”
“얼마 전에 제5 관문이 돌파당했다고 합니다. 적장은 루크 남작, 병력의 숫자는 3,000명쯤 됩니다.”
“루크 남작이라…….”
루크의 이름을 들은 순간, 렌디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갔다.
카인 국왕을 죽인 이후로 그의 감각은 완전히 뒤틀렸다.
부? 명예? 작위?
그 어느 것에도 흥미를 느낄 수 없게 되었다. 그저 베는 것, 그것도 안간힘을 쓰며 많은 것을 쌓아 올린 자를 베는 순간만이 그를 흥분시켰다.
남이 힘들여 만들어 둔 도미노를 발로 차서 억지로 부술 때처럼, 남이 눈발을 맞아 가며 만들고 있던 눈사람을 완성 직전에 발로 차서 박살 내는 것처럼.
아등바등 애를 써서 간신히 높은 위치에 올라온 자를 죽이는 순간에만 살아 있음을 느끼는 몸이 되어 버렸다.
겐크 왕국 놈들 중에서 벨 만한 가치가 있는 자는 몇 없다. 그 몇 안 되는 자들 가운데 루크가 포함되어 있고 말이다.
때문에 렌디는 루크를 막기 위한 지원군의 지휘관이 되고 싶음을 강력히 어필하여 이곳까지 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데니스 백작도 있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군법에 따라 처형되었다고 하더군요.”
“데니스 백작? 그런 녀석도 있었나 보지?”
“이름값만 따지면 데니스 백작이 훨씬 더…….”
“쭉정이 얘기는 그만하지. 중요한 건 알맹이인 루크가 건재하다는 거니까.”
일반적으로 루크보다 데니스 백작 쪽이 훨씬 유명하다. 데니스 백작은 10년 이상 위명을 떨쳐 온 베테랑이고, 루크는 엘리나 왕녀와의 소문으로 유명해진 사람이니까.
그러나 쉐도우 나이트 단장으로서 루크와 계책의 합을 나눠 본 렌디이기에 알고 있었다. 루크에 비하면 데니스 백작은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벨 가치가 있다.
변두리 영지에서 아등바등 노력해서, 어느새 언제 중앙 정계를 휘어잡아도 이상하지 않을 위치까지 오른 인물.
그를 죽이면 다시 한번 맛볼 수 있을까?
카인 국왕을 죽였을 때 느꼈던 짜릿한 순간을… 그때의 손맛을.
만만찮은 인물인 만큼 보통 수단으론 어림도 없을 터.
미적지근한 방법으론 안 된다. 쉐도우 나이트의 주 업무였던 암살, 독살, 횡령, 여론 조작… 전부 미적지근했다. 진짜배기들은 그따위 미적지근한 방법으로는 꿈쩍도 안 한다.
진짜배기들을 흔들기 위해선 좀 더 화끈한 작전이 필요하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상대가 열이 바짝 올라 딱 알맞게 노릇노릇 익게 되는, 그런 작전을 말이다.
렌디는 구덩이 속에 버려지는 시신의 대부분이 성인인 것을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전염병 사망자는 대부분 성인인가 보지?”
“네, 아이들은 초기에 격리시켜 감염자가 적습니다. 뭐, 졸지에 부모들을 잃었으니 딱하게 되었지만요.”
“고아가 된 아이들 몇 명만 데려오도록.”
“아이들을 말입니까?”
“그래. 30명 정도면 충분하겠지.”
고아들을 어찌 사용할지 암시하듯 렌디의 눈동자에 시체를 태우는 불길이 비쳐 일렁거렸다.
* * *
제5 관문을 통과한 루크군은 제6 관문으로 이동했다.
루크가 알기로 제6 관문 자체는 다른 곳과 달리 자연의 혜택을 받지 않는 곳이다. 대신 제5 관문에서 제6 관문까지 이동 경로가 길어서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이동 경로가 길다는 것도 어찌 보면 자연환경을 이용한 것이긴 하다.
제5 관문을 떠난 지도 어언 일주일째.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며 진군을 강행하던 차에 정찰을 나갔던 비행 부대로부터 정보가 들어왔다.
“제6 관문에 상당수의 공국군이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다 합쳐서 8,000명쯤인 것 같습니다.”
“제6 관문이 8,000명이나 수용할 수 있는 규모는 아닐 테고… 지원군이 도착해서 정원 이상으로 숫자가 불어났다고 봐야겠군. 다른 특이 사항은 없고?”
“특이하게도 요새 바깥에서 시체 더미를 태워 파묻고 있더군요. 예전부터 전염병이 나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여름에 군대를 일으키면 으레 전염병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안 그래도 위생 관리가 어려운데, 날씨까지 습하여 병균이 활동을 벌이기 좋은 환경이 갖추어진다. 게다가 쥐 떼 때문에 본의 아니게 군량미에 병균이 묻기 쉽다.
병이라면 질색이다.
카인으로 살 적, 어렸을 때 심한 열병에 걸렸는데 한 달 내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었다. 물만 마셔도 토하고, 누우면 현기증, 일어나면 두통에 시달리는 고통 속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당시의 일이 트라우마가 되어 틈만 나면 손을 씻는 것은 당연하고, 틈틈이 자주 쓰는 물품을 소독해 두고 있다.
그런 루크에게 전염병이 돌고 있는 요새가 달가울 리 없었다.
“제6 관문은 최대한 빨리 함락하고 최대한 빨리 벗어나는 걸 목표로 삼아야겠군. 공국의 지원군을 끌고 온 지휘관이 누구인지는 파악해 뒀나?”
“그 부분은 육로로 파견한 정찰 부대가 파악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최소한 마나마스터 중 한 명을 파견했겠지. 육로로 떠난 정찰 부대에 최대한 빨리 알아내라고 전해 둬. 누구인지 알아야 작전을 짜기 쉬워지니까.”
아레나 공국에는 원래 5명의 마나마스터가 있었다. 그리고 로메우가 몰래 키워 온 새로운 마나마스터 5명이 더해져 10명이 되었다.
새로운 마나마스터들은 겐크 왕국으로 원정을 떠났고, 기존의 마나마스터들은 아레나 공국을 지키고 있다.
다시 말해, 아레나 공국에 있는 마나마스터들은 카인 국왕 시절 때부터 있었던 자들이란 뜻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남아 있는 마나마스터들이라면 특기, 성향, 성격 등등 모든 면을 낱낱이 알고 있다.
그러니 누군지만 알아내면 대응책을 짜기 쉽다.
밑도 끝도 없이 펼쳐진 평야는 거리를 가늠할 변변한 지형지물조차 없어서 걸을수록 원근감이 옅어졌다.
사람의 키 높이만큼 자란 갈대가 바람결을 따라 움직이며 사그락사그락 재잘거렸고, 풀벌레들이 장병을 위문하기 위해 공연이라도 나온 양 쉴 새 없이 합창을 부르며 지루한 행군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정처 없이 걷던 중 별안간 루크군의 행렬 뒤쪽에서 강렬한 폭발음이 발생했다.
콰아앙!
땅만 보고 걷던 병사들이 일제히 투구를 고쳐 쓰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루크는 곧바로 고삐를 당겨 말을 멈췄다.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옆에 있던 갈대가 요란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웬 어린아이 한 명이 튀어나왔다.
나이는 9, 10살쯤 될까.
얼굴은 꼬질꼬질하니 땟국물이 흐르다가 마른 흔적이 있고, 고생 속에서 살아온 것처럼 입 주변의 피부가 허옇게 일어나 있었다.
빈민가에서 자주 볼 법한 몰골임에도 불구하고 상의에 걸치고 있는 옷은 제법 고급인 솜옷이다. 주인이 피난을 가면서 텅텅 빈집에 들어가 가져온 옷일까.
얼굴과 의복의 괴리함이 선명한 가운데 아이가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어깨를 들썩였다. 사람은 더할 나위 없는 슬픔을 느끼면 어깨로 운다 했던가. 이 어린 것이 무슨 변고가 있어 이리도 격하게 슬퍼하는 것일까.
전쟁으로 부모를 잃어서? 배가 고파서? 집이 사라져서?
정황상 전쟁과 관련하여 슬퍼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이가 울먹이며 다가오면서 이리 말하는 것이 아닌가.
“흐윽, 죄송해요. 죄송해요.”
명백히 루크군을 향해 사과하고 있었다.
동시에 아이가 입고 있는 솜옷 안쪽에서 푸른빛이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마나가 힘을 발할 때 발생하는 발광 현상이다!
솜옷 안에 마법 물품을 심어 둔 것이 틀림없었다.
솜옷 안에서 새어 나오던 푸른빛은 점점 더 강해졌고, 거칠게 일렁이며 공격용 마법의 발현을 예고했다.
그와 동시에 폭발의 전조를 감지한 오즈가 스태프를 뻗었다.
“실드!”
2서클 마법이자 범용성이 넓은 방어 마법인 실드가 시전되었다. 실드의 강도와 범위는 시전자의 경지에 따라 달라진다.
6서클인 오즈가 전력을 다해 펼친 실드는 전방위에 걸쳐 루크군과 아이를 따로 격리했다. 실드가 펼쳐진 직후 간발의 차로 아이가 입고 있던 솜옷 안쪽에서 강렬한 폭발이 발생했다.
퍼어어엉!
손으로 귀를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폭발음이 억지로 귓바퀴를 타고 들어와 고막을 강타한다. 폭발에 의한 굉음은 없던 멀미도 만들 만큼 강력했다.
동시에 아까 후미 쪽에서 들려온 폭발음이 이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폭발의 여파가 가실 즈음, 고개를 드니 창문처럼 투명한 실드에 그은 자국과 핏방울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비위 강한 루크조차도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상대 지휘관 놈… 추잡함의 끝을 보여 주는군.”
설마 아이에게 폭발형 마법 물품을 들려 보내어 자폭 공격을 실시할 줄이야. 상대가 아이라면 경계심이 느슨해질 테니, 피해를 입힐 확률이 높아진다.
설사 사전에 발각되어 아이가 죽임을 당하더라도 상관없다. 루크군에게 정신적으로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으니까. 이용당한 것뿐인 어린아이를 죽이고 나서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제6 관문에 합류했다던 새 지휘관은 어떻게 해서든 루크군에게 정신적인 피해를 주고 싶은 모양이다. 지휘관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저질인 방법을 사용한 것을 보면 말이다.
사람을 태운 노린내 속에서 제랄드가 아이의 잔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곧 주먹을 불끈 쥐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남작님, 전 지금 같은 하늘 아래에 빌어먹을 개자식들이 있다는 게 용서가 안 됩니다.”
루크를 제외한 모두가 제랄드의 말에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죄송하단 말을 연거푸 반복해서 내뱉었다.
누구에게?
루크군에 속한 간부들과 병사들에게!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때문에 죽을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불러올 결과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순수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죄책감 속에서 죽어 갔다.
아이야, 사과하지 마라.
왜 네가 부조리를 떠안느냐.
네 행동의 결과는 네 잘못이 아니거늘 어째서 네가 울고, 네게 죽음을 강요한 자들은 웃는 것이냔 말이다.
다들 치를 떠는 가운데 오로지 루크만이 평소와 다름없는 냉정함을 내비쳤다.
“다들 하고 싶은 말이 많겠지만 지금은 넣어 둬. 한계까지 참았다가 때가 되면 한꺼번에 터뜨리도록 해. 터뜨릴 장소와 시기는 내가 만들어 주지.”
타기 직전의 냄비에 물을 끼얹은 것처럼, 루크의 차분함을 나눠 받기라도 한 것처럼 다른 이들도 냉정을 되찾았다.
아레나 공국으로 넘어온 이후로 수많은 상황이 발생했건만, 시종일관 차분하기 그지없는 루크였다.
북극성은 언제나 같은 위치에 머물러 있다. 루크군에게 있어 루크는 북극성 그 자체이다. 사람인 이상 때때로 흔들릴 때도 있고, 입장에 따라 사건을 바라보는 시점도 제각기 다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흔들릴 때마다 루크라는 명확한 기준점을 보고, 하나 되어 안정감을 유지하는 것이 루크군의 최대 장점이자 강함의 비결이었다.
단숨에 분위기를 휘어잡은 루크는 러스트를 불렀다.
“그리고 러스트.”
“네, 러스트 여기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오크 정예병 몇 명만 골라서 아이들의 흔적을 역추적하도록 해. 작정하고 준비한 것 같으니 지금 보낸 아이들만 있는 게 아니겠지. 놈들이 2차 자폭을 시도하기 전에 대기 장소를 찾아내서 다시는 이따위 작업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도록.”
“네! 철저하게 박살 내 놓겠습니다.”
오랜 수렵 생활을 거치며 흔적을 추적하는 데 능한 오크들이라면 역추적 또한 어렵지 않을 터.
러스트가 따로 움직이면서 부대를 이탈하였고, 동시에 루크는 부상자 수송을 위한 소수의 병력만 남겨 둔 채로 진군 속도를 높였다.
이따위 작전을 짠 놈의 상판을 확인하지 않고선 직성이 안 풀릴 것 같다.
고맙게도 제6 관문에 도착하기 전에 상대 지휘관의 정체가 밝혀졌다.
육로로 떠났던 정찰 부대가 놈의 정체를 알아내어 돌아온 것이다.
상대 지휘관의 이름을 듣고 나니 저질인 작전을 쓴 것을 납득할 수 있었다.
지저분한 짓을 일삼는 놈이 지휘관이 되었으니 작전도 지저분할 수밖에.
“공국의 지원군을 끌고 온 새 지휘관의 정체를 알아냈습니다! 청문회 사건 때 도주한 렌디가 제6 관문, 제7 관문의 통합 지휘관이 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