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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재능으로 환생-48화 (48/200)

# 48

48화 사과나 후회를 들으러 온 것이 아니거든

제6 관문에서 제7 관문으로 넘어가는 길목에는 황폐한 고원이 있다. 있는 것이라고는 적갈색의 모래와 자잘한 자갈뿐이며, 봄이 되면 강한 모래 먼지가 일어나 인근 마을의 먼지 농도를 높이는 골칫덩이 땅이기도 했다.

고원은 굴곡 없는 평지라 시야가 탁 트여 있어 매복이 불가능하다. 그 말인즉슨 고원을 전장으로 삼을 시, 피차 불가피하게 전면전을 벌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고원 안에선 루크군과 렌디군이 대치하고 있었다.

루크군은 3,000명.

난전을 유도하기 쉬운 화살 형태의 삼각 진형을 취하고 있다.

반면에 렌디군은 8,000명.

적을 포위하기 쉬운 U 자 형의 진형을 취하고 있다.

진형만 봐도 서로가 어떤 의도를 지니고 있는지 낱낱이 드러났다.

루크군은 난전을 유도하여 개인의 기량 싸움으로 몰고 갈 생각이고, 렌디군은 수적 우세를 이용하여 포위한 다음 서서히 죄어 들어가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스릉!

검날이 검집 안쪽을 긁으며 날카로운 마찰음을 자아냈다.

루크는 전날 손수 예리하게 벼려 둔 장검을 늘어뜨리며 시선을 멀리 두었다. 시선의 끝에는 백마에 올라타 마찬가지로 검을 뽑고 있는 렌디가 있었다.

바람결에 마구 헝클어진 적발 하며 징크스라도 있는 양 매일매일 매끌매끌하게 면도한 흔적이 남아 있는 얼굴 등등.

외견은 지난날의 렌디와 그다지 다를 것이 없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카인이 죽은 이후로 수년이 흘렀는데 말이다. 얼마나 편하게 지냈으면 고생한 흔적이 하나도 없이 옛날보다 더 좋은 혈색을 띠고 있는 것인가.

내 살점을 뜯어 제 배를 불리고, 내 피를 마시고 취하여 흥을 돋우고, 내 이름을 융단 삼아 가시밭길을 피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쥐고 있는 장검에 마나 블레이드가 거칠게 일렁임과 동시에 루크의 입이 달싹였다.

“앞서 펼친 작전들이 너무 허술해서 뇌를 장비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더군.”

목소리는 담담하나 말에 담긴 독설은 매섭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렌디는 독설을 듣는 것은 일상이라는 것처럼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초면부터 대뜸 독설부터 날리다니, 의외로 예의가 없으시군, 루크 남작. 싸울 땐 싸우더라도 통성명 정돈 괜찮지 않나?”

“내가 널 알고, 네가 날 아는데 촌스러운 통성명 따위가 필요할까?”

“너무 이빨 세우지 말라고. 이래 봬도 난 네놈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거든. 겐크 왕국의 귀족들은 하나같이 사시사철 살이 오른 녀석들밖에 없어서 시시했지.”

“그대로인 건 겉모습뿐인가. 알맹이는 시정잡배가 다 되었구나.”

“그대로? 예전 모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 날조는 안 되지. 보기 흉하지 않느냐.”

“날조라……. 글쎄, 그건 네놈 특기인 것으로 아는데?”

“피차 맞선 보러 나온 것도 아닌데 잡담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지. 내가 보고 싶은 건 네 녀석의 우는 얼굴이니까.”

“그러도록 하지. 나도 네놈 무릎이 바닥에 닿는 게 보고 싶으니 말이야.”

루크와 렌디가 동시에 검을 위로 들었다.

그와 함께 양측 진영의 병사들이 무기를 힘껏 쥐며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 누구보다 용맹하게 뛰쳐나가서 적을 섬멸하기 위해.

이윽고 두 지휘관의 검이 전방을 가리키며 진군 명령이 떨어졌다.

“전원 돌격하라!”

“우오오오오!”

“와아아아!”

양측 모두 합쳐 10,000명이 넘는 병사들이 땅을 박차며 우렁찬 함성을 터뜨렸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기합이 허공에서 다발로 뭉쳐 고원의 공기를 한껏 흔들었다.

먼저 격돌한 것은 양측의 기마대였다.

제랄드를 주축으로 기마대가 한 점 돌파를 시도했다.

“속도를 높여라! 우리가 지나는 장소가 곧 길이 될 것이다!”

맞은편에서 렌디군의 기마대가 튀어나오며 정면 대결로 응수해 주었다.

렌디군의 기마대 소속인 기사가 날카로운 랜스를 옆구리에 끼고선 호방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름 없는 기사여! 이름을 날리려는 공명심은 높이 살 만하다만, 이번엔 운이 안 좋았구나! 제7 관문의 철완이라 불리는 이 몸과 마주했으니 말이다!”

기사는 랜스에 마나유저 상급 수준의 마나를 주입하며 흉흉한 기세를 내뿜었다. 옆구리에 끼고 있는 랜스가 마치 발리스타에 장착된 대형 장창 같았다. 찔렸다간 몸에 바람구멍이 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랜스가 적중했을 때의 상황에 불과하다.

자칭 철완이란 기사가 랜스를 뻗기 직전.

제랄드가 반 호흡 빠르게 검을 뻗어 랜스에 가속도가 붙기 전에 교착 지점을 앞당겼다.

차앙!

제아무리 강력한 무기라도 힘이 실리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적이 호흡을 터뜨리기 전에 먼저 경합 지점을 선점하면서 마나유저 중급 수준의 오라가 마나유저 상급 수준의 오라를 밀어내는 기예가 펼쳐졌다.

제랄드는 첫 번째 공격으로 기사의 균형을 무너뜨리면서 검자루를 짧게 쥐었다.

“공명심이라… 그딴 성가신 걸 지녔던 기억은 없다만.”

간결한 동작과 함께 검이 짧은 궤적을 그리며 기사의 목을 베어 냈다.

제랄드와 기마병이 렌디군의 진영에 파고들며 기선 제압의 임무를 확실하게 완수했다.

제랄드가 피워 올린 불씨를 이어받듯, 기마대가 뚫어 놓은 길로 보병이 파고들며 난전에 돌입했다. 루크군의 보병 중에서도 단연 압권은 러스트의 오크 보병 부대였다.

“발을 앞으로 뻗어라! 적들에게 자신이 지나온 자리를 다시 밟는 굴욕을 안겨 주자꾸나!”

오크 보병이 앞으로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렌디군 보병들이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적의 보병은 자신이 지나오면서 남긴 발자국을 되밟으며 수세에 몰렸다.

루크군의 사기가 어찌나 높은지 숫자 차이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전투는 점점 열기를 더해 갔고, 피아를 식별하기조차 힘든 수라장이 펼쳐졌다.

초반 기세는 루크군이 휘어잡았다. 하지만 수적 열세를 상쇄하기 위해서 무리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인지라 시간을 오래 끌어서 좋을 것은 없었다.

전투를 단숨에 종식하기 위해선 적장의 목을 쳐야 한다.

루크는 공적에 눈이 멀어 덤벼드는 렌디군의 보병들을 베어 내며 렌디에게 접근했다. 렌디도 마찬가지로 마나 블레이드로 루크군의 보병들을 유린하며 간격을 좁혀 왔다.

둘 사이의 간격이 좁아질 때마다 서로의 마나 블레이드가 추진력을 갖추듯 한껏 오므라들었다.

50미터, 40미터, 30미터…….

서로가 서로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간 순간, 실뭉치처럼 한데 모여 있던 마나 블레이드가 한꺼번에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맹공을 펼쳤다.

하늘거리는 마나의 실오라기 한 가닥, 한 가닥이 명검의 예리함을 지니고 있다. 한 가닥이라도 접근을 허용했다간 가차 없이 베여 나갈 터.

서로 검을 쓰는 마나마스터이기에 승리의 조건은 동일하다.

적의 마나 블레이드는 한 가닥도 접근하지 못하게 막고, 자신의 마나 블레이드는 한 가닥이라도 적의 몸에 적중시키는 것.

두 사람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수십 가닥의 마나 블레이드가 하나하나 제 의지를 가진 양 유려하게 움직이며 맞부딪쳤다.

강대한 위력을 담고 있는 것치곤 타격감은 일절 존재하지 않았다. 고작해야 마나의 실오라기끼리 한번 얽혔다가 떨어지는 것이 고작이었다. 마나마스터끼리 싸우는 것치곤 고요하기 짝이 없는 경합이었다.

하지만 그건 단편적인 인상에 불과하다.

흡사 번개가 번쩍이고, 수 초 후에야 천둥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경합에 의한 충돌음은 몇 초가 지난 후에야 작렬했다.

콰콰콰콰콰콰!

소수점 단위의 짧은 시간에 수십 합을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기에 수십 번의 경합이 압축된 것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위력이 어찌나 강한지 경합으로 인한 충격파만으로도 인근에 있던 병사들이 내상을 입을 정도였다.

“쿨럭! 쿨럭!”

“커윽! 무, 물러나! 마나마스터끼리의 싸움에 휘말렸다간 뼈도 못 추린다!”

주변 일대에 있던 병사들은 루크군, 렌디군 가릴 것 없이 뒤로 물러났다. 전장 속에 마련된 일대일 무대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졌다.

렌디는 합을 주고받으며 곁눈질로 전황을 살폈다. 초반의 무리한 것으로 인해 벌써 루크군 병사들의 체력에 부하가 걸렸는지 점점 전세가 렌디군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조만간 루크의 절망 어린 표정을 볼 수 있다는 기대 속에서 렌디의 얼굴에 비릿한 조소가 피어났다.

“용쓰는 와중에 미안하지만, 네 병사들은 벌써 연료가 떨어졌나 본데?”

“…….”

“뭐라도 지껄여보거라. 입을 놀리는 게 네놈의 유일한 장기 아니더냐.”

“…….”

한 마디를 들으면 두 마디를 돌려주는 루크가 전투 내내 입을 한 번도 놀리지 않고 있다.

언뜻 보면 수세에 몰려 말할 틈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어디까지나 언뜻 봤을 때의 이야기이다.

렌디는 이내 루크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런 시건방진 자식을 봤나. 나와 싸우면서 날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고?’

하면 놈은 대체 무엇을 보고 있단 말인가!

루크의 시선은 간간이 위로 향하였다. 렌디가 좌우로 곁눈질을 하며 전황을 확인한 것처럼 루크 또한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해 공중을 향해 곁눈질하고 있던 것이다.

루크의 의중을 알아내고자 렌디 또한 시선을 위로 올렸다.

하늘을 눈에 담은 순간, 푸른 하늘 아래에 점점이 박혀 있는 제비 떼가 보였다. 평범한 제비라고 하기에는 덩치가 굉장히 컸다. 날아오는 제비 떼가 루크군의 비행 부대라는 것쯤은 사전에 입수한 정보를 통해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루크군의 비행 부대가 운반하고 있는 물건이었다.

10마리의 삼색 제비 아래에 집채만 한 크기의 붉은 구슬이 떠 있었다. 삼색 제비에 올라타 있는 마법사들이 전력을 다해 텔레키네시스를 펼쳐 붉은 구슬을 운반하고 있었다.

구슬 안쪽에선 불꽃이 일렁이고 있고, 구슬 주변은 뜨거운 열기가 피어오르는 양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중이었다.

어딘가에 다녀온 듯 늦게 도착한 비행 부대, 그리고 무언가 봉인한 듯 불꽃을 담고 있는 구슬, 멀리서도 느껴지는 강한 열기.

일련의 단서를 조합하여 구슬의 정체를 알아낸 순간, 처음으로 렌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라그나로스의 봉인석을 파내서 운반하다니, 제정신이냐!”

경합을 이루는 내내 말이 없던 루크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체감 온도가 한계치 이상 올라가면 머릿수 따윈 무의미하지.”

전장에 도착한 비행 부대가 지체 없이 봉인석을 지상으로 투하하였다.

수십 미터 상공에서 떨어진 봉인석은 운석처럼 지면에 틀어박혔다.

쿠우웅!

무려 고대의 정령왕을 봉인한 봉인석이다. 특별한 의식을 거쳐야만 봉인을 풀 수 있기 때문에 물리적인 요인 따위론 흠집 하나 생기지 않는다. 즉, 지금은 그저 주변 일대를 고온 사우나로 만들어 버리는 열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라그나로스의 봉인석이 내뿜는 열기로 인해 고원 일대가 숯을 구워 낸 후의 숯가마 내부처럼 뜨거워졌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열기 때문에 코안이 바늘로 찌른 것처럼 따가웠으며, 안구의 수분이 말라붙은 탓에 눈을 뜨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대다수 병사가 열기에 잠식되며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졌다.

렌디는 갑옷 안쪽이 흥건해지는 것을 느끼며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이기지 못하니 동귀어진이라도 하자는 거냐. 용두사미가 따로 없군. 이렇게 시시한 방법이나 쓰는 놈일 줄은 몰랐구나.”

“지독한 농담이군. 내 병사들에겐 피로 풀기 좋은 사우나 정도의 온도이다만?”

털썩! 털썩! 털썩!

봉인석이 떨어진 것을 기점으로 루크군 병사들이 갑옷을 벗었다. 정확히는 짐승남처럼 사슬 갑옷을 좌우로 찢었다.

사전에 갑옷을 쉽게 벗을 수 있도록 갑옷 중앙선에 흠집을 내 놓은 것이다.

열기 속에서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둘 중 어느 쪽이 더 홀가분하게 움직일까?

이제부턴 전투가 아니다.

일방적인 학살일 뿐.

루크군 병사들은 움직이지 못하는 볏짚을 베는 훈련이라도 하는 양 손쉽게 렌디군 병사들을 베어 넘겼다.

렌디군도 어떻게든 응전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놈들도 움직이는데 우리라고 못 움직이겠느냐! 힘든 건 피차 마찬가지다! 당황하지 말고 응전해라!”

“그러고 싶어도 갑옷이 달아올라서 도무지…….”

“에잇! 그럼 갑옷을 벗어라! 뭘 꾸물거리고 앉았느냐!”

말이 쉽지 사슬 갑옷을 벗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슬 갑옷은 아래에서부터 머리를 집어넣어야 하는 원피스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그렇기에 무기를 놓고, 허리를 숙여 허물을 벗듯이 벗어야 한다.

한데 그걸 루크군이 가만히 놔두겠는가.

갑옷을 입고 싸우자니 쇳덩이가 달아올라 미친 듯이 뜨겁고, 벗자니 벗는 동안 창에 찔려 비명횡사하기 일쑤였다.

결국 어느 쪽이든 렌디군은 지옥행이었다.

2배 이상 차이가 나던 병력은 삽시간에 역전되어 이젠 루크군의 숫자가 더 많아졌다. 전세는 루크군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 도저히 뒤집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참다못한 렌디의 부관들이 퇴각을 부르짖었다.

“렌디 경! 이대로 가다간 전멸합니다! 부디 퇴각 명령을!”

호소에 가까운 외침에 렌디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굴욕감에 잠겼다. 분명 전면전을 계획할 때만 하더라도 이기는 것을 당연하다 여겼건만, 지금은 후퇴밖에 답이 없었다.

이 무슨 굴욕이란 말인가!

한껏 거들먹거린 것이 무안할 정도로 처참한 패배였다.

그러나 렌디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었으니.

루크란 사내는 덫에 걸린 사냥감을 쉬이 놓아줄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도망치게 놔둘 순 없지. 그래서야 일부러 같은 수준으로 맞춰 준 보람이 없잖아?”

렌디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방금 뭐라고 했지?

일부러 같은 수준으로 맞춰서 싸워 줬다고?

마치 렌디군을 깊숙이 끌어들이고자 일부러 호각인 것처럼 실력을 조절했단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지금 발언이 허세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루크는 검에 대량의 마나를 주입했다.

그에 따라 루크의 검에 맺힌 마나 블레이드는 수십 가닥에서 세 자리 숫자로 불어났다.

물빛 머릿결처럼 우아하게 흩날리는 마나 블레이드 앞에서 렌디의 얼굴을 타고 흐르는 땀이 한층 늘었다.

“말도 안 돼……. 사람의 탈을 쓰고 태어나서 저만한 마나를 보유할 수 있을 리가 없어. 가능할 리가 없다고.”

한껏 부정해 보았지만, 부정한다고 그의 눈앞에 드리워진 마나 블레이드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렌디에게 가장 큰 충격은 루크가 이용한 라그나로스의 봉인석도, 100가닥 이상의 마나 블레이드도 아니었다.

이어지는 루크의 발언이 가장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래, 내가 네게 등을 찔렸을 때도 그 표정이었지.”

루크의 발언을 듣는 순간, 렌디의 눈에 루크와 어느 인물이 겹쳐 보였다.

수년 전 자신이 등 뒤에서 찌른 자이자 아레나 왕국의 마지막 왕이었던 사람과 말이다.

그를 등 뒤에서 찌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뿐이다. 공식적으로는 침소에 불을 지르고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건만, 타국의 변두리 영지를 다스리는 귀족이 어찌 그날의 진상을 알고 있단 말인가!

렌디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럴 리가… 카인 전하는 그때…….”

이윽고 루크가 검을 휘둘렀고, 검신을 따라 마나 블레이드가 유려하게 공중을 수놓으며 렌디의 전신을 덮었다.

즈즈즈즉! 서걱!

100가닥의 마나 블레이드 앞에서 제 몰골을 유지할 수 있는 자가 존재하긴 할까? 렌디의 몸이 조각조각 분쇄되어 삽시간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핏덩이로 화했다.

검무를 빙자한 난도질이 끝났을 무렵, 조각난 렌디의 시신 위에 루크의 서늘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그 이상은 말할 필요 없어. 사과나 후회를 들으러 온 게 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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