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49화 시간이 움직이다(1)
렌디가 처참하게 죽으면서 렌디군에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전의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나마 렌디의 부관들이 고군분투하며 병사들과 함께 도주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나 한번 잡은 고기를 놓칠 루크가 아니었다.
루크는 열기 속에서 손수 도망가는 렌디군을 베어 내며 추격을 명했다. 열기 속, 끈질긴 추격전은 렌디군의 전멸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 * *
마지막 관문인 제7 관문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렌디가 요새 안의 병력을 싹싹 긁어모아서 전면전에 나선 것이었는지, 제7 관문에 남아 있는 렌디군의 병력은 100명도 채 되지 않았다.
8,000명의 병사조차도 루크군을 상대로 이기지 못하고 전멸했는데 남은 100명으로 어찌 저항하랴.
제7 관문에 있던 자들은 루크가 항복을 권하기도 전에 알아서 성문을 열고 항복 의사를 전했다.
덕분에 루크는 지친 병력을 이끌고 무사히 마지막 관문인 제7 관문을 함락했다.
“사망자는 약 700명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포위당한 것치곤 잘 버텼군.”
“성과를 떠나서, 아군의 전사 소식은 언제 들어도 마음이 무거워지는군요.”
“손에 쥐고 있는 전력만으로 움직여야 했으니 이게 최선이었어.”
“아,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습니다. 남작님의 작전이 없었더라면 여기 오기도 전에 벌써 전멸했을 겁니다. 그 누구도 남작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자는 없습니다.”
공교롭게도 일반 병사들의 죽음은 가벼이 다뤄지기 일쑤였다.
전사자의 이름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대충 한데 묻고 간단하게 제를 올리는 것이 전부다. 유가족들에겐 위로금도 한 푼 돌아가지 않는다.
전문 군인으로서 살아온 상비군들은 그나마 덜 억울한 편이었다. 전쟁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 것을 생업으로 삼는 대신, 평소 고액의 연봉을 받아 온 이들이니 말이다.
억울한 것은 농사짓다가 소집된 징집병들이다. 그들은 일개 소모품으로 여겨지다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기 일쑤였다. 평민은 당연히 국가가 부르면 오고, 싸우다 죽으면 그냥 죽는 것이었다. 만약에 살아남아도 공적을 평가받는 것은 지휘관이지, 말단 병사들이 아니다.
애국심이란 허울 아래서 백성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작금의 전쟁이었다.
하지만 루크는 다르다.
“전사자의 신원을 한 명도 빠짐없이 파악해 둬. 유공자에 대한 예우는 우리의 의무이자 긍지니까.”
“여부가 있겠습니다. 영지를 위해 싸운 영웅이니 그에 준하는 예를 갖추어 안장하도록 하겠습니다.”
루크가 데리고 온 자들은 처음부터 싸울 의지가 가득했던 상비군뿐.
그나마도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전사할 경우 유가족에게 보상은 철저하게 이루어질 것이라도 약조했다.
2대, 즉 아들 세대까지 상비군 월급의 5할에 달하는 보조금을 매달 지급, 그리고 각종 세금 3할 감세.
3대, 즉 손자 세대까지 아카데미와 마탑의 학자금 면제, 그리고 상비군 입대 시 진급 때마다 가산점 부여 등등…….
생활 전반에 이르는 모든 지원과 그 혜택들이 후손에까지 이르도록 정책을 마련해 뒀다.
때문에 루크군의 병사들은 승리에 일조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울 수 있었다.
루크는 지난 전투의 이야기는 이만하고, 대화의 주제를 전쟁의 마무리로 넘겼다.
“현재 헤테룬의 상황은 어떠하지?”
오즈는 비행 부대 대원에게 헤테룬의 정찰을 지시하여 알아낸 정보를 낱낱이 보고했다.
“우리와 다른 길로 향한 겐크 왕국의 마나마스터들이 헤테룬에 도착하여 총공세를 펼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4명의 마나마스터가 있는데, 그중 2명만이 헤테룬에 닿은 모양입니다.”
“4명 중 2명이 죽었다는 거군.”
“데니스 백작까지 합치면 3명이지요.”
“그 머저리는 빼도록 해. 중요한 건 남은 마나마스터 중에 누가 로메우의 목을 치느냐이니까.”
“아직까진 공국 수도 방위군과 왕국군이 호각을 이루고 있다 합니다. 왕국군을 이끌고 있는 자들은 게르만 후작과 바스커 백작이라고 하더군요.”
오즈는 헛기침을 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흠흠, 각각 거인 학살자와 마나 사냥꾼이라 불리는 자들이지요, 두 사람의 병력은 합쳐서 12,000명. 수도 방위군 병력이 10,000명이니 쉬이 뚫지 못하는 것도 이해는 갑니다만…….”
“숫자 놀음 같은 건 의미가 없어. 헤테룬은 천재 건축가 카라스코가 직접 설계한 성이니까.”
수백 년 전 천재 건축가라 불리던 이가 있었다. 그가 설계한 성벽은 7서클 마법의 충격을 버텨 내고, 그가 대패질하여 세운 문은 마나 블레이드의 예리함을 버텨 낸다고 한다. 현재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의 왕궁은 카라스코의 작품이며, 그 외에도 카라스코가 만든 각종 건축물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국보로서 대접받고 있다.
“헤테룬 성벽이 카라스코의 작품이라면 우리 군이 합류해도 대세에 영향을 주긴 힘들 테지요.”
현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치고 카라스코의 건축물이 가진 견고함을 모르는 이는 없다. 현 상황에서 마나마스터 1명과 2,000여 명의 병사가 더해진다고 뚫릴 성이 아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경우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헤테란 전선에 합류하는 것이 평범한 마나마스터가 아닌 루크라는 점이다.
루크군의 간부들은 기대에 찬 눈으로 루크를 바라보았다. 애당초 남쪽 해역을 통과하여 상륙한다는 작전을 세운 자는 루크였다. 7개의 관문을 통과하여 헤테룬을 공략할 방법도 사전에 미리 짜 놓았을 터.
연이은 전투 속에서 루크가 선보인 무력과 지략은 간부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신뢰감을 심어 주었다.
간부들의 말마따나 루크는 헤테룬을 공략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게 힘들어서 그렇지, 여기까지 왔으면 거의 끝났다고 봐야지. 이제부턴 소수 병력만 있으면 충분해. 제랄드, 러스트.”
“네, 말씀하십시오.”
“각자 날랜 병사 100명씩만 뽑아서, 헤테룬으로 갈 준비를 시켜.”
“200명이면 충분합니까?”
“달리 변수만 없다면 200명으로도 충분해.”
간부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루크라면 해결책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긴 했는데, 고작 200명만 필요할 줄은 몰랐다.
현재 12,000명의 병력으로도 뚫지 못하는 헤테룬이건만, 고작 200명이면 충분하다니.
역시 루크다 싶었다.
그날 밤, 제7 관문에서 루크를 포함한 200명의 병력이 조용히 자취를 감추었다. 몇 개월간 이어진 두 나라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병력이 말이다.
* * *
갸아악! 갸아아악!
치열한 공성전이 벌어지고 있는 헤테룬 전장의 상공에서 그리핀 라이더와 와이번 라이더의 치열한 마법 공방전이 펼쳐졌다.
치열한 것은 공중전만이 아니었다. 지상에서도 연일 맹공을 퍼붓고 있는데도 피해만 누적될 뿐, 이렇다 할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게르만 후작은 오늘도 성벽에 걸친 대형 사다리가 하나둘 밀려 넘어지는 것을 보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허어, 참 나, 3면에서 흔들고 있는데도 뚫릴 기미가 안 보이는구나. 왕국 본토에선 서서히 원정군을 밀어내고 있다 하거늘.”
겐크 왕국 본토에선 공국군의 보급로를 끊는 데 성공하여 전세를 역전시켰다고 한다. 왕국 소속의 귀족으로선 마땅히 기뻐해야 할 일이나 적진 한복판에 있는 장수로선 그다지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공국의 원정군이 회군하면 헤테룬에 있는 게르만 후작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포위된다. 때문에 공국의 원정군이 회군하기 전에 어떻게든 로메우의 목을 쳐야만 했다.
“데니스 백작 쪽은 대체 어떻게 되었느냐? 뭘 하고 있길래 여태껏 오지 않는 것이냐!”
게르만 후작의 호통 아래에서 평소 같았으면 움츠러들었을 기사가 웬일인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유용한 정보라도 입수한 것처럼.
“데니스 백작님이라면 벌써 돌아가셨습니다.”
“뭐, 데니스 백작이 죽어? 그런데도 왜 웃고 앉았느냐.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가는데, 내 기사라는 놈이 웃어? 평소에 고문관 기질을 보이더니, 드디어 머리 나사가 튕겨 나갔나 보구나.”
“어찌 그리 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이야기는 끝까지 들으셔야지요. 데니스 백작님이 돌아가신 대신 루크 남작님이 남동쪽에서 제7 관문을 돌파했다고 합니다. 한데 제7 관문에 이르는 과정에서 루크 남작님이 데니스 백작님을 베었다고 하더군요.”
일개 남작이 백작을 베었다?
계급사회의 기득권층에 속하는 게르만 후작으로선 쉬이 넘길 수 없는 소식이었다.
이유에 따라 루크에게 죄를 물을 수 있는 안건이었다.
게르만 후작은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정보라 여겨 화를 누그러뜨렸다.
“그게 사실이더냐?”
“얼마 전 한참 뒤에서 따라오던 보급 부대가 퇴각 중이던 데니스 백작님의 병력과 만났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이니 확실합니다.”
“하면 루크 남작의 군대라도 여기 도착해야 정상이거늘, 어찌하여 오지 않고 가만있단 말이냐?”
“저도 그걸 이상하게 여겨 알아보니, 며칠 전에 루크 남작님이 소수 병력을 이끌고 제7 관문을 떠났다고 합니다. 남몰래 움직이는 걸로 봐선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발칙한 것 같으니. 좋은 비책이 있으면 상급자에게 알릴 것이지, 저 혼자 공을 독차지하겠다고 몰래 움직여? 변두리 태생이라 그런지 하는 짓도 좀스럽구나. 당장 모든 정찰 부대를 루크 남작 수색에 투입해라! 전투 중인 그리핀 라이더들도 당장 물려서 정찰 부대로 돌리도록!”
몇 시간 후, 게르만 후작은 그리핀 라이더로부터 루크군으로 추정되는 200명의 소규모 부대를 발견했다는 보고를 전해 받았다.
그들은 전장이 아닌 헤테룬 동쪽에 있는 산으로 가고 있다고 한다.
필시 이유가 있어 그리로 가고 있다고 여긴 게르만 후작은 당장에 자신도 소수 정예 부대를 꾸렸다.
“당장 날랜 병사들을 뽑아 오너라. 루크 남작의 뒤를 따른다. 놈이 모든 걸 독차지하게 놔둘 성싶으냐.”
* * *
제7 관문을 떠난 루크는 며칠 밤낮을 달려 헤테룬 동쪽에 도달했다. 헤테룬 동쪽에는 높은 산이 하나 있는데, 대대로 아레나 왕가의 무덤으로 이용하던 장소였다.
아레나 왕가의 왕릉에는 한 가지 비밀이 있다.
그것은 바로 비상시 왕궁에서 탈출하기 위한 비밀 통로가 왕릉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원래는 왕궁 안에서 바깥으로 탈출하기 위한 용도이지만, 루크는 반대로 이용할 예정이다. 왕릉을 통해 비밀 통로로 잠입하여 왕궁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루크는 아레나 왕국을 세운 초대 국왕의 왕릉으로 들어갔다. 명색이 왕릉인 만큼 곳곳에 도굴을 막기 위한 함정이 설치되어 있다. 그 부분은 국왕 시절에 묘지기로부터 이미 전해 들은 바이기에 루크는 어렵지 않게 무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내가 밟고 지나간 길 그대로 이동하도록 해. 한 발자국이라도 잘못 내디뎠다간 사방에서 화살이 쏟아지니까.”
제랄드와 러스트는 조심조심 이동하면서도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남의 나라 왕릉 속 함정까지 알고 있는 걸까?
루크에 대해 알겠다 싶을 즈음이면 몰랐던 일면이 튀어나오고, 또 알겠다 싶을 즈음이면 다시 몰랐던 일면이 튀어나오고…….
이쯤 되면 위대한 존재가 유희라도 하러 온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함정을 피해 한참을 이동한 끝에 루크군은 왕릉의 중심부에 다다랐다.
루크는 돔 형태의 벽을 따라 설치된 병사 석상들을 세었다.
“오른쪽에서부터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기군.”
루크는 다섯 번째 석상을 옆으로 밀었다. 그러자 석상의 발판 아래로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수 있을 법한 구멍이 나타났다.
루크가 먼저 구멍 안으로 몸을 들이며 앞장섰다.
“한 명씩 천천히 들어와. 횃불 떨어뜨리지 않게 조심하고.”
제랄드, 러스트… 그리고 그들의 부관과 병사까지 모두 비밀 통로로 몸을 들였다. 신속하게 움직인 덕에 모두가 통로 안에 들어서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횃불로 길을 밝히며 왕궁으로 가려던 찰나.
구멍으로 저 멀리서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왔다.
“으아아악! 함정이다! 방패를 사방으로 둘러라! 이 멍청한 것들! 내 주변부터 두르란… 끄르륵!”
“젠장! 독화살이잖아! 해독제를 가지고 온 이는 없느냐!”
“그런 형편 좋은 물건이 있을 리가……. 누가 독화살이 있을 줄 알고 해독제를 챙긴단 말입니까!”
왕릉 내에 메아리치며 웅웅, 울리는 누군가의 목소리.
독화살 함정에라도 걸렸는지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
제랄드는 자기들 말고도 누군가가 들어온 것을 의아해하게 여겼다.
“이 시기에 우리 말고도 왕릉을 찾아오는 이들이 다 있군요.”
루크는 잠시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다가 알 바 아니라는 양 휙 몸을 돌렸다. 안 그래도 왕릉에 들어오기 전에 그리핀 몇 마리가 하늘에 머물러 있는 것을 목격했었다. 헤테룬 전장에서 그리핀 라이더를 소지하고 있는 부대는 게르만 후작의 부대밖에 없다.
혹시라도 루크의 비책을 가로챌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따라 들어오다가 봉변을 당한 것일 터이다.
얄팍한 잔꾀를 부리다 제 꾀에 넘어간 꼴이 우스울 따름이었다.
비명의 메아리 속에서 루크는 피식 웃으며 그것을 남의 일로 치부했다.
“전시를 틈타 도굴꾼이라도 든 거겠지.”
“왕릉에 함정이 있는 건 당연한 건데, 준비도 없이 들어오다니. 대담한 건지, 멍청한 건지.”
“후자 쪽 아니겠어? 무시하고 가던 길이나 가자고.”
모두가 루크의 의견에 동의하며 도굴꾼들(?)의 명복을 빌어 주곤 왕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