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52화 작위 상승(2)
환영 인사를 거친 루크는 내궁에서 카이둔 국왕을 알현했다.
“도의를 저버리고 왕실과 왕국에 해를 끼치려 한 무뢰한을 벤 자네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네. 왕실에선 자네와 자네의 가문에 합당한 포상을 내릴 것이니 오늘은 편히 쉬게나.”
사무적인 말투로 할 말만 하고선 자리를 파하는 카이둔 국왕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기는 전쟁이었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완수하고 온 자를 맞이하는 느낌이었다.
마주 본 것만으로도 대강 어떤 사람인지 감이 왔다.
태어날 때부터 항상 승리만 해 온 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승리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성취감을 느끼는 부분이 마비되어 있다. 이런 자들은 승리해야 본전이라는 생각을 기본으로 깔고 들어간다.
차라리 이렇게 알기 쉬운 쪽이 편하긴 하다.
카이둔 국왕을 알현하는 동안에도 루크의 신경은 대회의장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블린트 왕자에게 쏠려 있었다.
이 왕궁에서 가장 성가신 사람은 아마 블린트 왕자이지 않을까 싶었다.
* * *
국왕 알현이 끝난 뒤에는 외궁에서 승전을 기념하는 연회가 벌어졌다.
왕궁에서 주최하는 연회답게 처음 보는 사람은 입이 벌어질 정도로 호화로웠다.
각 지역에서 헌납한 각종 특산물로 만든 요리, 궁중 악단이 연주하는 적절한 음량의 음악, 귀족들이 포트럭 파티마냥 저택에 꿍쳐 두었던 10~20년 묵은 귀한 담금주를 가져오면서, 연회의 질이 한층 높아졌다.
연회의 주역은 단연 루크였으나 또 다른 의미에서 주목받는 이가 한 명 더 있었다.
러스트는 몸에 꽉 끼는 정장을 불편해하며 나비넥타이를 느슨하게 끌렀다.
“정장은 다 좋은데 허리에 맞추면 가슴이 끼고, 가슴에 맞추면 허리가 빈단 말이지. 이거 맞춤형 정장을 들고 다니든가 해야지, 원.”
일반 병사들은 왕궁 바깥에 마련된 외부 시설에서 대접받고 있고, 루크군의 간부들만 루크를 따라 외궁에서 벌어진 축하 연회에 참가한 참이었다.
오크는 신체 특성상 상체 근육이 과도하게 발달되어 있다. 평범한 오크도 그런데 오크 중에서도 덩치가 큰 편에 속하는 러스트는 오죽하겠는가.
울룩불룩 솟은 근육 때문에 웃옷의 재봉선이 뜯어지기 일보 직전까지 벌어졌다. 왕궁에 있는 정장 중에서 가장 큰 사이즈를 받아서 입었는데도 이 모양이다.
제랄드는 보는 사람이 더 불안하다는 표정으로 러스트의 웃옷 단추를 툭툭 건드렸다.
“그러다 옷 찢어질까 무섭습니다. 앞 단추라도 좀 푸시지 그럽니까?”
“어차피 이번에만 입고 말건데 좀 참지, 뭐. 영지로 돌아가면 재단사나 불러 줘. 옷이나 맞추게.”
“외부 시설에서 병사들과 고기나 뜯으시지요. 그 편이 훨씬 편하실 겁니다.”
“어허, 이 사람 섭섭한 소리 하는구먼. 나도 명색이 남작님의 기사이니 참가 자격은 충분하잖나.”
“불편하실까 봐 꺼낸 말입니다.”
“나야 전투에는 익숙해도, 인간의 문화는 아직 배우는 입장일세. 앞으로 계속 남작님 밑에서 지내려면 기회가 있을 때 이것저것 많이 경험해 둬야지.”
제랄드가 염려하는 것은 옷이나 격식 때문이 아니었다.
환영 인사를 할 때 사람들이 오크에 대한 편견을 내비친 것을 보지 않았는가.
일반 백성들도 편견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는데, 콧대만 높고 머리에 유연함이 부족한 귀족들은 오죽하겠는가. 안 좋게 보면 더 안 좋게 봤지, 곱게 볼 리 없는 양반들이다.
아니나 다를까, 연회장 곳곳에서 귀족들의 따가운 눈총이 날아들었다.
“쯧쯧, 왕궁 안에 더러운 야만족을 데리고 오다니.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원.”
“얼마나 궁하면 야만족을 기사로 삼을까. 피부 꼴 좀 보게. 콧속을 겉으로 내놓은 것 같아서 속이 뒤집힐 것 같구먼.”
일부러 들으라는 양 수군거리고 있다. 수군대는 사람들 대부분은 블린트 왕자파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분위기 때문이다. 그냥 지나치면 그만인 환영 인사와 다르게 연회장에선 내내 이와 같은 눈총을 받아야 한다.
혹여나 러스트가 엄한 소리를 듣고 불쾌해할까 봐, 배려하는 차원에서 나름대로 빙 둘러 말한 건데 정작 본인은 괜찮다는 말만 연발하고 있다.
제랄드는 술 대신 물만 마시며 바짝 긴장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 바짝 차리고 중간에서 잘 조율해야 해. 남작님은 왕족분들이랑 얘기하고 계시니까 나라도 옆에 붙어 있어야겠어.’
“혹시 모르니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러스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제랄드는 비장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날렸다.
한데 아까까지만 해도 옆에 서 있던 러스트는 온데간데없고, 모르는 여성 한 명이 음식을 접시에 옮겨 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 왜 간간이 한 번씩 겪지 않는가. 옆에 일행이 있다고 착각한 채로 말을 걸었는데 다른 사람이 있는 경우 말이다.
지금 제랄드가 딱 그 상황이었다.
여성은 제랄드를 위아래로 훑더니 방긋 웃으며 명치에 강타를 날렸다.
“말씀은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일행이 있거든요.”
의도치 않은 1패를 적립한 제랄드는 오늘 밤에 이불을 찰 건수를 획득하고선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아, 죄송합니다. 일행이 옆에 있는 줄 알고 말한 건데 실례를 범했군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럴 수도 있죠.”
사실대로 말한 것뿐인데도 왠지 차이고 난 뒤에 궁색하게 변명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아니, 이 아저씨는 어디를 갔기에 말도 없이 사라져선 사람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람?
고개를 두리번거리니, 연회장 한복판에서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어느 귀족가 영애와 춤을 추고 있는 러스트가 눈에 들어왔다. 춤은 또 언제 배운 것인지 웬만한 귀족들보다 더 기품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차이에서 오는 매력이라고 했던가.
무서워 보이는 인상인데도 의외로 섬세한 몸짓과 기품 있는 예의를 선보이는 것이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했는지, 어느새 러스트를 향한 수군거림이 사라졌다.
백번 말하는 것보다 한 번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것이 낫다고 했다.
지금까지 제랄드의 걱정이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러스트 스스로가 보여 준 셈이다.
제랄드는 못 말리겠다는 듯 피식 웃으며 어깨에 들어간 힘을 뺐다.
“하여간 우리 영지 사람들은 걱정할수록 손해만 본다니까.”
더불어 등 뒤로부터 불길하기 그지없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허허허, 이게 누군가. 일행이 옆에 있는 줄 알고 실례를 범한 우리 기사단장 나리 아니신가.”
뒤를 돌아보니 오즈가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 미소가 익살스러워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즐거이 웃으며 팔자걸음으로 멀어지는 오즈를 두고 제랄드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 * *
한편 루크는 블린트와 한 식탁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먼저 자리를 함께하기로 청한 쪽은 블린트이다.
표면상으로 루크는 엘리나와 긴밀한 관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블린트도 그걸 모르진 않을 터. 그러니 마냥 순수한 의도로 자리를 권한 건 아닐 것이다.
블린트는 궁녀로부터 술병 하나를 받아다가 직접 루크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고생 많이 했으니 한 잔 받게. 엘프의 숲에서도 장로들에게 헌상한다는 라이프 트리 열매주일세.”
왕족이 직접 술을 따라 주는 행위가 의미하는 것은 크다. 기사 임명식 때 귀족이 기사의 어깨에 검을 얹으며 맹세를 받은 다음 직접 술 한 잔을 따라 주는 것처럼, 원래는 신뢰의 의미를 담은 행위였다.
하지만 이 경우엔 약간 의미가 다르다.
현재 블린트는 루크의 배짱을 시험하고 있었다.
행위에 담긴 의미를 떠나 사내 대 사내로서 술잔을 마주할 배짱이 있느냐 없느냐를 가늠하고 있는 것이다.
배짱 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루크 성격에 어찌 주는 술잔을 마다하랴.
루크는 기품이 넘치는 몸짓으로 술잔을 두 손으로 쥐며 술을 받았다.
“제가 길을 열고, 마무리까지 다 했으니 술을 받을 자격이 있지요. 꽉 눌러 담아 주십시오.”
“하하하, 모처럼 뚝심 있는 사람을 마주하니 나까지 기분이 좋아지는군. 모름지기 대장부면 호기 정돈 부릴 줄 알아야지.”
“요즘은 호기와 허세를 구분할 줄 아는 자가 거의 없으니 더 문제지요.”
“내 말이 그 말일세. 척하고 내주면 척하고 돌아오는 게 오랜 지기 같아서 좋구먼.”
째앵!
두 사람 사이에서 술잔이 부딪치며 청명한 마찰음을 빚어냈다.
잔에서 잔잔한 연못처럼 출렁이던 맑은 술이 루크의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빈 위장에 짜르르 퍼졌다.
어찌나 독한지 내뱉는 숨에 술 냄새가 옅게 배어 나왔다.
첫 잔을 비운 후, 블린트는 마차 바퀴만 한 치즈 케이크를 한입 크기로 잘라 안주로 삼고 입을 열었다.
“누님을 골로 보내 버린 작전이 아주 환상적이더군.”
“나탈리 왕녀님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분이 자초한 일이라고 대답드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만.”
“그런 걸로 해 두지. 실제로 누님이 지저분한 일을 도맡는 개인 부대를 가지고 있기도 했고 말이야. 아, 오해하진 말게.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감사하고 있는 쪽이니까. 누님을 쫓아내 준 덕분에 겸사겸사 세력을 불리고 입지를 강화할 수 있게 되었지.”
“제 눈엔 그것 말고도 따로 하시고 싶은 말이 있는 걸로 보이는군요.”
“하하하, 그렇게 보이나? 오늘은 그저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 내 손수 자리를 권한 것일세. 지금 왕위에 오르는 데 가장 위협이 될 인물을 꼽으라면 자네밖에 없으니까.”
보통은 자신의 직위가 더 높으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것처럼 상대방을 깔보기 일쑤인데, 블린트에게선 그런 기색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적의 능력을 인정하기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주변을 조금만 둘러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만으로 괴롭히고, 자기 기준에 안 맞는다고 뭐든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자기보다 잘났다고 억지로 건수를 만들어서 까 내리고…….
자신과 상대의 역량을 객관적으로 볼 줄 아는 자는 항상 좋은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굉장히 상대하기 까다로운 유형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블린트 입장에서도 루크는 까다로운 상대인 셈이었다.
루크는 이번엔 자신이 직접 블린트 왕자의 술잔을 채워 주며 말을 꺼냈다.
“오해하지 말라는 말은 제가 드리고 싶군요. 누가 겐크 왕국의 왕이 되던 관심 없습니다. 전 제가 할 일만 할 뿐이지요.”
“사실이라면 놀라울 따름이고, 거짓말이라면 날 방심시키기엔 최적인 발언이군.”
“믿으실지 안 믿으실지는 왕자님의 판단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블린트는 루크가 채워 준 잔을 입에 털어 넣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도 인사해야 할 사람이 많을 테니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지. 내일 공적 평가 때 합당한 보상을 얻어 가길 바라겠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다뿐이지, 루크가 공왕이 되는 일을 전력으로 막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개 남작이 엘리나를 지원하는 것과 공왕이 엘리나를 지원하는 것은 천지 차이이니 막으려 드는 것이 당연하다.
물론 정작 루크 본인은 정말로 누가 국왕이 되든 관심 없었다. 더불어 블린트는 내일 자신과 루크가 언쟁을 펼칠 것이라 생각하고 있으나 루크의 생각은 달랐다.
적어도 내일에 한하여 루크의 상대는 블린트가 아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겐크의 국왕 카이둔이었다.
공왕 자리를 포상으로 내건 것 자체가 겐크 국왕의 함정이라는 것을 아는 자는 현재로선 루크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