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54화 작위 상승(4)
루크가 당장 공왕이 될 권리를 포기하자 가장 당황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블린트였다.
루크가 공왕이 된다면 엘리나를 밀어주기가 용이해진다.
그건 루크뿐만 아니라 엘리나도 잘 알고 있는 부분일 터.
실제로 엘리나는 공적을 평가하지 직전까지 정보를 수집하지 않았는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냐고? 엘리나가 입수한 정보는 모두 블린트가 일부러 흘린 것이다. 일부러 빈틈을 보여서 엘리나가 빈틈을 찌르도록 유도해 놓고, 거기에 맞춰 공격하기 위해서 모든 준비를 갖춰 놓았다.
한데 루크가 당장 공왕이 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준비해 온 것이 모두 허사가 된다.
엘리나도 루크의 행동을 사전에 알고 있었을까?
블린트는 맞은편 행렬에 서 있는 엘리나를 면밀히 살폈다. 그러나 엘리나도 사전에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눈을 땡그랗게 뜨고 있었다.
진짜로 스스로의 역량이 모자라다 생각해서 즉흥적으로 거절하는 쪽을 택한 걸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이득을 취하면 취했지 손해를 감수할 사람이 아냐. 마음만 먹으면 공국을 우리 겐크 왕국을 위협할 수준까지 키울 수 있는 능력을 갖췄으면서 스스로 역량이 모자란다며 굽힌다고? 반대로 생각하면 지금 당장 아레나 공국을 맡는 건 손해라고 판단한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루크는 지금 당장 아레나 공국의 공왕이 되는 것을 손해라고 판단한 것이다. 권리를 아예 포기한 것이 아니라 후일로 미룬 것이 그 증거다.
현재 아레나 공국의 상황이 그렇게까지 안 좋나?
현장에 나가 본 적이 없으니 블린트는 명확하게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바꿔 말하면 현장 경험의 유무야말로 루크와 블린트의 결정적인 차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루크 정도씩이나 되는 자도 손해라고 판단했다면, 그 누가 공왕이 된다 한들 곤욕을 치를 터.
루크의 발언은 곧 ‘지금 당장 공왕 자리를 맡는 건 자살행위다’라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장내에 있는 대부분 귀족은 수군거리며 루크의 판단을 비웃었다.
“자기 주제를 알긴 아는군요. 남작령을 다스리다가 공국을 다스리자니 본인이 생각해도 부담스러웠겠지요.”
“알아서 거절해 준 덕에 긴 논쟁 없이 편하게 일이 진행되어서 다행입니다. 지금까지 별것도 아닌 자를 너무 경계하는 감이 있긴 했지요.”
여전히 귀족들은 보고 싶은 부분만 보고 있었다.
당장의 공왕 자리를 포기했다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루크의 전적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든 까 내리고 싶어서?
블린트는 왕족이라는 계급과 가지고 있는 세력의 크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개인의 능력.
이 부분에서 루크를 따라잡지 못하면 자신은 왕이 되지 못한다.
그리 판단하고선 한낱 종이 쪼가리가 된 서류들을 꽉 쥐며 한껏 구겼다.
이후에 논의를 통해 로메우의 빈자리를 채울 새로운 공왕을 선출했다.
그 자리에는 직위와 인망에서 그나마 모두가 납득할 만한 겐크 3대 공작 중 1명, 레들리 공작이 뽑혔다. 레들리 공작도 아주 욕심이 없었던 것은 아닌지 흔쾌히 받아들였다.
공왕의 자리에 누가 앉을 것인지 결정되면서, 여러모로 말이 많던 공적 평가가 끝을 맺었다.
* * *
며칠 뒤, 승전을 기념하는 행사를 모두 마친 루크는 병력을 이끌고 드디어 귀향길에 올랐다.
몇 달 만에 드래프트 영지로 돌아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전쟁이 시작될 때만 하더라도 늦여름이었는데 지금은 늦은 봄이 되었다. 몇 달만 더 있었으면 1년을 채울 뻔했으니 제법 오래 떠나 있던 셈이다.
또각또각, 또각또각.
사방에서 말발굽 소리가 캐스터네츠 연주처럼 흔쾌하게 들려온다.
기마대가 타고 있는 말들은 전부 이번 공로의 포상으로 받은 명마이다. 기존에 타고 있던 말들은 렌디를 상대할 때 라그나로스 봉인석의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괴사하였기에 마침 새로운 말이 필요하던 참이었다.
마차에 타 있던 루크는 차창을 열고 제랄드에게 말을 붙였다.
“새 말은 어때?”
안장까지 싹 신품으로 받은 참이다.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승차감을 만끽하던 제랄드는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으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확실히 비싼 말과 안장은 다르군요. 왜 귀족들이 국산 말보다 외국 말을 선호하는지 알겠습니다. 왕궁에서 직접 마련해 준 거라 그런지 안장에 솜도 빵빵하고요.”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군.”
“그런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어째서 공왕 자리를 거절하셨습니까? 물론 권리는 여전히 보유하고 계신다지만, 남작님 능력이시라면 공국도 능히 다스리실 수 있으실 텐데요.”
“남작이 아니라 백작이야.”
“앗, 죄송합니다. 입에 붙어서 그만……. 주의하겠습니다, 백작님.”
남작이라 불리다가 백작이라 불리게 되니 기분이 남다르긴 하다. 공왕이라 불리면 더더욱 기분이 남달랐을 터이나 아직은 때가 아니라 판단했다.
공왕, 그러니까 속국의 왕 같은 싸구려 자리 따위에 목매는 것도 우습고 말이다.
“당장 공왕이 되어서 좋을 거 없어. 카이둔 국왕 전하의 함정이니까.”
“네? 국왕 전하의 함정이라뇨?”
“이번에 공적 평가에서 남작으로 작위가 상승한 기사들이 몇 명 있었지. 그들이 어느 영지를 받았는지 기억하고 있어?”
“글쎄요, 거기까지 일일이 신경 써서 들은 게 아니라서…….”
“아레나 공국의 영지였어. 아마 카이둔 국왕 전하가 각별히 키워 낸 자들이겠지. 조만간 아레나 공국의 귀족계는 국왕 전하의 심복들로 가득 차게 될 거야. 그러니 지금 공왕이 되어 봤자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
아무리 왕이라도 귀족들이 따르지 않으면 나라를 일으켜 세울 수 없다.
그 사실을 실제로 경험해 보지 않았는가.
같은 굴레 속으로 들어가는 우를 범해서야 본말전도이다.
“하면 처음부터 꼭두각시 공왕 자리를 포상이랍시고 내건 것이었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게다가 로메우가 무리하게 군대를 키우느라 재정은 바닥을 기고 민심은 최고로 흉흉해져 있지. 뭐, 어찌어찌해서 공국을 살려 냈다 치자. 그러면 국왕 전하는 어떻게 할까?”
“일단은 속국이니 예전처럼 다시 단물을 빨아먹겠지요. 못 살려 내고 공국이 무너지면 새 공왕 탓으로 돌리고 잘라 내면 그만일 테고 말이죠.”
“정답이야. 일부러 독이 든 성배를 쥘 필욘 없잖아? 그래서 실리만 챙겼을 뿐이야.”
그저 공왕이면 그래도 왕이니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던 제랄드이다.
이면에서 정치적 암투가 오가고 있으리라곤 꿈에도 몰랐다.
전혀 몰랐던 터라 놀라고 있던 차에 문득 한 가지 의문을 표했다.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습니다. 만약에 블린트 왕자님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이의 제기가 없었다면 공왕 자리를 거절할 명분이 없었을 텐데요.”
“왜 데니스 백작을 베었겠어? 이의를 제기하라고 떡하니 좋은 명분까지 만들어 줬는데, 안 하면 그게 이상한 거지.”
“설마 지금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베었다는 겁니까? 그게 언제 적 사건인데, 그때부터…….”
“국왕 전하도 몇 수 앞을 보고 포석을 깔았으니 나도 즉각 대처한 것에 불과해. 이 이야기는 이만하자고. 마무리된 이야기를 언제까지 붙잡고 있는 것도 피곤하잖아?”
“아, 네, 뭐 남작… 아니 백작님이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앞으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때를 기다려야지. 당분간 마탑에 다니면서 마법이나 배워 볼까 해.”
전쟁 초기에 해전을 치른 직후 오즈와 대화를 나눴다.
그랜드 마스터로 이르는 길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으니 마법을 배워 볼 생각이 없냐고 했다.
지금쯤이면 드래프트 영지에 건설 중이던 마탑이 완성되었을 것이다.
적당한 때가 올 때까지 마법을 배우며 전설의 경지에 이를 방법을 찾아볼까 한다.
힘은 키워 놓을수록 좋은 법이니까.
루크는 한동안 한가로이 지낼 생각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기분 탓일까.
오늘따라 구름도 무척 한가로이 흘러가는 듯하다.
* * *
겐크 왕궁 내궁에 위치한 왕의 침실.
침실 안에선 카이둔이 파이프에 담뱃잎을 쑤셔 넣고선 성냥을 당겼다.
치익!
습관적으로 첫 모금은 바로 내뱉고, 두 번째부터 폐부 깊숙하게 빨아들였다가 길게 내뿜었다.
담배 연기는 한숨을 형상화한 듯 뻗어 나가다가 아스라이 퍼졌다.
담뱃잎이 모두 재가 되어 슬슬 쓴맛이 느껴질 때 즈음.
창문 바깥에 까마귀가 날아들더니 부리로 문을 두드렸다.
툭툭! 툭툭!
카이둔은 재떨이 위에 파이프를 거꾸로 걸쳐 두고선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자 까마귀가 총총 뛰며 방 안으로 들어와 날개를 펼쳤다.
까마귀의 몸은 서서히 인간의 형상으로 바뀌더니,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의 형상을 띠었다.
사내는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대신하며 말을 꺼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그대가 보기에 평안한 얼굴로 보이나?”
“심기가 불편해 보이시는군요. 제가 자리를 비운 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 거스르는 놈이 하나 있더군.”
“그거라면 들었습니다. 루크 남작… 이젠 백작이었던가요? 그자가 스스로 공왕이 될 권리를 포기했다지요?”
“포기가 아니라 보류일세. 유용한 장기짝으로 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위험한 놈인 것 같네.”
“제가 보기엔 너무 깊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듣기론 정말로 공왕 자리가 부담스러워 누군가가 말려 주길 바랐던 것처럼 보입니다만.”
“흠, 자네가 보기엔 기우 같나?”
“일개 변두리 귀족의 언행을 일일이 신경 쓰시다간 밑도 끝도 없지요. 전하께선 대륙을 다스리실 분 아니십니까. 그깟 보잘것없는 사내보단 원대한 계획을 진행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여 주십시오.”
“그리 자신만만하게 지껄이는 걸 보니 제법 쓸 만한 전리품이라도 가져왔나 보구나.”
“라그나로스의 봉인석을 입수했습니다. 사람을 시켜 하니온 왕국의 외진 곳으로 옮겨 두었으니 언제든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루크가 렌디군을 전멸할 때 사용한 라그나로스의 봉인석은 전투 후에도 전장에 계속 방치되어 있었다.
그것을 회수하여 섬나라인 하니온 왕국에 미리 옮겨 두었다고 한다.
로메우의 난을 제압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면서 겐크 왕국의 상공에 있던 천공섬이 지나가 버렸다. 당초의 계획이었던 천공섬 정벌이 무산된 대신 하니온 왕국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라그나로스의 봉인석은 하니온 왕국을 정벌하는 데 있어 지대한 역할을 맡을 예정이었다.
“봉인을 해제할 기술은 준비되었나?”
“물론입니다. 저희 데메그리 교의 기술력을 너무 얕잡아 보지 말아 주십시오.”
“막 전쟁을 끝낸 참이라 국력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니 때가 되면 지시를 내리겠다. 그때까지 잠자코 기다리도록.”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럼 오래 머물러 있어서 좋을 건 없으니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사내가 까마귀로 변하여 창밖으로 날아갔다.
데메그리 교.
마족을 섬기는 종교이자 흑마법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대륙 공통의 이교도이다.
일국의 국왕이 이교도과 연이 닿아 있다는 게 알려지면 곤란하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거인국과의 전쟁에서 인간 본연의 힘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실감했다. 평범한 군사 강국 정도로는 안 된다. 그것으로는 꿈을 이룰 수 없다.
대륙 정벌이란 꿈을 달성하기 위해선 뭐든 이용해 주겠다.
그게 설사 악마라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