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61화 이 사람이 그 사람이었어?(2)
“볼터의 법칙은 마나를 배열할 때 가속할수록 주변의 공간이 흐트러져서 배열을 망가뜨림을 증명하고 있지. 그러면 5서클 이상의 마법사들은 어떻게 대량의 마나를 소모하는 마법을 매우 빠르게, 그리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걸까? 레이아, 자네가 대답해 보겠나?”
현재 마법 학부 건물의 대강의실에선 4서클 이상의 마법사만 신청할 수 있는 마나 공식 고급반 강의가 진행 중이었다.
교수는 열정적으로 공식을 설명하다가 레이아를 지목했다.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었음에도 레이아는 막힘없이 대답하였다.
“배열하고자 하는 위치에 보존 법칙을 적용하여 독립된 공간에서 마법이 발현되게 해야 합니다. 독립된 공간을 유지하는 마나는 발현되는 마법에 드는 마나의 3분의 1을 유지해야 하죠.”
“정답이다. 개인적으로 진도를 뺀 부분일 텐데, 다른 사람 진도에 맞추게 해서 미안하구나.”
“괜찮아요. 확실하게 다시 보는 것도 공부니까요.”
“5서클 진도까지 조금 빨리 진행할 테니까, 아직 4서클 생성 중인 사람들은 예습, 복습 확실하게 해서 진도를 따라오도록 하거라.”
교수의 말에 대강의실에 있는 몇 안 되는 학생이 인상을 찌푸렸다.
4서클 이상만 신청할 수 있는 강의라서 신청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넓은 대강의실에 앉아 있는 사람이라곤 고작 6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들 모두 왕국 각지에서 유학 온 사람들로, 여태껏 다니던 아카데미에선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 없는 자들이다. 줄곧 우수하다는 소리를 들어왔는데 레이아 한 명 때문에 그들은 마치 열등생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다.
그게 마냥 기분 좋을 리 없었다.
교수는 시계를 보더니 책갈피를 끼우며 교재를 덮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오후에는 다들 빼먹지 말고 마나 호흡을 하도록. 오늘은 여기까지.”
강의가 끝남과 동시에 학생들이 일제히 저희끼리 뭉쳐 바깥으로 나갔다.
“으아~ 머리가 지끈지끈한 게 죽겠구먼. 뭔 내용인지 이해돼?”
“그럴 리가 있겠냐. 하도 수준이 높아서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따라갈 수가 있어야지.”
“난 그냥 나중에 재수강하련다. 이게 뭔 시간 낭비에 개고생인지 모르겠네.”
대놓고 말하지 않는다 뿐이지 온전히 레이아를 저격하는 말이었다.
마탑 측에선 기대주인 레이아에게 맞춰 수업을 진행하려고 하고, 다른 학생들은 레이아보다 한참 수준이 떨어지니 따라잡기도 벅찼다.
열등감은 곧 레이아를 멀리하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때문에 레이아는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로부터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4서클 마법사들은 대부분이 귀족인지라 대강의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과 함께 먼저 떠났다.
레이아는 뒤늦게 대강의실에서 나와 줄곧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파냐와 합류했다.
“기다렸지? 개인 수련실로 가자.”
“식사하셔야죠. 그러다 몸 상하세요.”
“나중에 먹을게. 지금 별로 입맛이 없어.”
아카데미에선 그나마 친구라도 있었는데 여기선 그마저도 없다. 같은 강의를 듣는 사람뿐만 아니라 학부 사람들도 레이아를 멀리하고 있다.
개강 초기에는 레이아의 미모와 그녀의 배경에 혹한 자들이 몇몇 접근하긴 했었다.
하지만 귀족가 출신인 레이아가 상대방의 흑심을 못 알아차릴 리가 있겠는가. 일말의 고민 없이 단호하게 그들을 배제했다.
마탑에 들어온 건 순수하게 경지를 끌어올리기 위해서이지, 놀기 위해서가 아니니 당연한 조치였다.
레이아의 입장에선 당연한 조치인데 거절당하면서 창피를 느낀 자들이 뒷말을 하면서 괜한 소문이 퍼졌다.
뒷말의 주된 내용은 명문가 출신이라고 콧대를 세우고 다니는 여자란 것이었다.
그로 인해 레이아에게 도도하고 콧대가 높은, 전형적인 명문가 영애란 꼬리표가 붙어 버렸다.
‘신경 쓰지 말자. 마법에만 집중하는 거야. 어차피 처음부터 그러려고 마탑에 온 거잖아. 게다가 파냐도 있는데 외로울 게 뭐 있어.’
그녀는 특별 취급을 바라지 않는다. 주변에서 그녀를 멋대로 곡해하고, 시기하여 폄하하고 있을 뿐이다.
명문가 출신이란 배경? 재능?
웃기지 마라.
자랑하지 않을 뿐이지, 항상 뒤에서 피를 토하는 노력을 해 왔다. 남들이 놀 시간에 서적을 파고, 남들이 5분만을 외치며 침대에서 미적거릴 시간에 잠을 쪼개 가며 마나 호흡을 했다.
또래의 나이에 응당 즐겨야 할 모든 것을 포기하고 7서클의 경지란 꿈 하나만을 바라보며 달리고 있다.
절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날이 발전해 가는 자신을 볼 때마다 남들의 몇 배 이상의 성취감을 획득하고 있으니까.
마탑에서 배정한 개인 수련실로 이동하던 중 레이아에게 웬 녹색 머리카락의 느끼하게 생긴 청년이 다가왔다.
“여, 레이아, 여기서 또 만났네. 마탑 생활은 어때? 좀 익숙해졌어?”
청년의 이름은 쿠자크이며 겐크 왕국 남서부 지방의 자작가 자제이다.
프랑크 마탑은 마법 학부의 수준이 다소 떨어지긴 해도 다른 학과의 수준은 왕국 내에서 최고로 꼽힌다. 쿠자크는 경영과에 진학하기 위해 프랑크 마탑에 온 경우였다.
까놓고 말하면, 불쾌한 축에 속하는 사람이다. 같은 남서부 지방 출신이라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는데, 예전의 루크에 비해 약간 덜하다 뿐이지 쿠자크 또한 끈덕지게 구애해 오고 있었다.
‘하아, 그나마 말 걸어오는 게 이런 사람뿐이라니. 이 사람은 나 만나러 마탑 유치 간담회 때도 우리 집에 왔다고 했지. 매번 거절하는데도 왜 못 알아듣는 걸까.’
마탑 내에서 ‘그 사람’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말을 걸어오는 학생이긴 한데, 솔직한 심정으론 아예 말을 안 걸어 줬으면 한다.
이번에도 치근덕거리려고 다가온 의도가 훤히 레이아의 눈에 보였다.
역시나 한 치도 빗나가지 않고 예상이 적중했다.
“하하하, 여전히 차갑네. 반응 정도는 해 주지그래? 이렇게 같은 마탑에 다니게 된 것도 인연인데, 잘 지내서 나쁠 건 없잖아?”
“개인 수련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서요. 바쁘니까 먼저 가 볼게요.”
“열심히 하는 모습 보기 좋네. 근데 한 번쯤은 숨 돌리는 시간도 필요하지 않겠어? 어때? 다음 주 월요일에 열리는 설립 기념행사에 네가 파트너로 가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레이아는 걸음을 우뚝 멈추며 쿠자크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불쾌하다는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쿠자크 씨, 기억 안 나시는 것 같으니 다시 한 번 확실하게 말씀드릴게요. 전 마법에만 집중하고 싶어요.”
“진짜 빡빡하게 구네. 내가 뭐 교제하자고 한 것도 아니잖아. 너라면 파트너를 구하지도 못했을 같아 신경 써 준 건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지. 감사패 받아야 해서 무조건 참가해야 한다며? 불쌍하게 혼자 갈 생각이야?”
“불쾌했다면 사과드리죠. 하지만 제가 불쌍하든 말든 그건 당신이 걱정할 일이 아닌 것 같네요. 그럼 전 이만.”
레이아는 빨리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라 여겨 몸을 돌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평소보다 더 끈덕지게 따라붙으며 앞길을 가로막는 쿠자크였다.
마치 어디선가 레이아를 꼬실 수 있을지 없을지 내기라도 하고 온 사람처럼 말이다.
“에이, 좀 봐줘. 이렇게까지 하는데 한 번 정돈 같이 가 줄 수 있잖아.”
선의에는 호의로 화답하는 게 그녀의 좌우명이다.
그러나 그 역도 성립한다.
이미 세 번을 거절했는데도 계속 불순한 의도로 들러붙는 작자에게 더 이상 말로 응대하는 건 무의미한 짓이었다.
다소 거친 방법일지라도 이참에 화끈하게 떨쳐 내고자 레이아는 손바닥 위에 마나를 배열하기 시작했다.
해를 입힐 생각은 없다. 엉덩방아를 찧게 할 정도의 마법을 쓰고자 할 뿐이다.
마법을 시전하려던 차에 제삼자가 끼어들었다.
쿠자크 너머에서 깔끔한 차림에 옷매무새 사이로 드문드문 매끈한 근육선이 드러나 있는 미청년이 다가와선 혀를 찼다.
“쯧쯧, 백주에 흉한 꼴을 다 보는군. 그러라고 부모가 마탑에 보내 준 게 아닐 텐데, 쿠자크?”
난데없는 제삼자의 비난에 쿠자크는 눈썹을 씰룩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 마탑에서 레이아를 제외하면 쿠자크 이상의 배경을 가진 귀족가 출신은 없다. 감히 누가 남서부 귀족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귀족가 자제에게 시비를 건단 말인가.
쿠자크는 단단히 호통을 칠 요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뒤에 서 있던 자를 본 순간 쿠자크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누가 감히 내게… 허, 허억!”
반면에 레이아는 갑자기 끼어든 제삼자를 보고 안색이 밝아졌다. 유일하게 사심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만났을 때도 마차에 타고 있었으니 귀족가 출신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쿠자크랑 아는 사이인 줄은 몰랐다.
쿠자크의 질린 얼굴로 보건대, 자작가로는 얼씬도 못하는 명문가 출신의 자제였던 모양이다.
사내는 쿠자크에게 고갯짓하며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갈 길 가도록 해.”
고압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쿠자크는 대꾸도 못한 채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그것이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 것인지, 감히 고개를 들 수 없어 스스로를 낮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쿠자크가 도망치듯 부랴부랴 자리를 뜸과 동시에 사내가 레이아에게 다가섰다.
“쓸데없는 참견이었나?”
“아뇨, 도움이 됐어요. 기껏 빚을 다 갚았는데 또 빚이 생겨 버렸네요.”
“일일이 계산하면 밑도 끝도 없어. 이런 일은 감사 인사면 충분해.”
“감사합니다. 어제는 잘 돌아가셨나요? 계속 신경 쓰고 있었어요.”
“바람을 등지고 있어서 문제없었어. 그쪽이 쓰러진 뒤에 바로 사람들이 와서 맡겼는데,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네.”
“그나마 독이 환각 계통인 게 천만다행이었죠.”
“그나저나 이래저래 고생이 많겠어. 저런 것들이 자꾸 꼬이면 일일이 쳐 내기도 성가시잖아?”
“그렇죠, 뭐. 안 그래도 기분 꿀꿀한데 더 우울해지게 만드네요.”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
“어젯밤 일로 설립 기념행사에서 감사패랑 포상을 받기로 했거든요. 별로 참가하고 싶지 않아서요.”
“하긴 시끌벅적한 건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긴 해.”
“그건 아닌데요. 좀 껄끄럽달까……. 예전에 노이로제 걸릴 정도로 따라붙던 사람이 파티에 참석한다고 들어서요.”
“아, 부모님이 이젠 달라졌다면서 화해시키려던 사람?”
“네.”
“확실히 껄끄럽긴 하겠네. 누군데? 내가 아는 사람이면 미리 손써 둘 테니 말해 봐.”
“에이, 됐어요. 이 영지에서 그 사람을… 아니, 왕국 전체로 따져도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할 정돈데요, 뭘.”
왕국 전체에서 건드릴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하자 사내가 표정을 달리했다.
마치 짐작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드래프트 영지에서 그만한 역량을 가진 자는 한 명밖에 없다.
“혹시 그 사람…….”
“네, 루크 백작님이에요.”
“음, 한 가지만 확인하고 싶은데, 그쪽 출신이 어떻게 돼?”
“그란데 백작가요.”
“아하, 그랬군. 그런 거였어.”
사내의 씨익 입꼬리가 올라갔다. 입꼬리가 어찌나 길게 올라가는지 한쪽 입꼬리만 올렸는데도 초승달이 그려질 정도였다.
뭐가 그리 재밌는 걸까?
레이아는 그가 웃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나머지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