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62화 이 사람이 그 사람이었어?(3)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것보다 루크 백작 그렇게 안 봤는데, 과거에 심한 짓을 많이 하고 다녔구먼.”
“쉿! 목소리 낮춰요. 여기 드래프트 영지라고요. 적어도 존칭으로 부르세요.”
“뭐, 어때.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뭘. 정말로 달라졌다면 직접 찾아가서 사과했어야지. 안 그래?”
“그렇긴 하죠. 근데 한편으로는 그러지 못한 게 납득이 가긴 해요. 영지를 단기간에 이만큼 발전시키려면 보통 노력으로는 어림도 없죠. 분명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았을 거예요. 그런 사람에게 직접 와서 사과해 달라고 바라는 건 염치없는 일이죠. 그 부분은 이해하고 있어요.”
“내 앞에선 사양할 것 없어. 쌓인 것도 많을 텐데 시원하게 말해.”
“사실은요…….”
레이아는 그란데 백작이나 파냐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담아 두기만 한 심정을 모두 토해 냈다.
옆에 파냐가 있다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로지 눈앞에 있는 사내만이 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레이아는 그에게 많은 것을 말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이 사람 앞에만 서면 곳간의 문이라도 연 듯 가슴속에 있던 이야기가 저절로 튀어나오니 말이다.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말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풀리고 마음이 편해지니까.
레이아만 일방적으로 말하고 있는데도 사내는 그저 웃으며 듣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특히 루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땐 더더욱 반응이 좋아서 말하는 입장에서도 흥이 났다.
* * *
시간이 흘러 프랑크 마탑 설립 기념행사가 열리는 날이 되었다.
행사는 저녁에 개시되었고, 마탑 교수진, 학생 그리고 관계자들이 마탑 내에 있는 행사장에 모이기 시작했다.
명색이 귀족가의 영애인데 평소의 후줄근한 로브 차림으로 참석할 순 없는 노릇이다.
마차를 타고 마탑에 들어선 레이아는 마차 안에서 불편함을 호소했다.
“파냐,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화려하지 않아?”
“아가씨가 평소에 너무 후줄근한 옷만 입으셔서 화려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드레스 중에선 그나마 수수한 편인걸요.”
“팔뚝이랑 쇄골이 드러나잖아. 창피해.”
“예쁘기만 하신데요, 뭘. 확실히 옷걸이가 좋아서 그런지 수수한 드레스인데도 느낌이 확 살아나네요. 남들이 보면 엄청 고급 드레스인 줄 알 걸요?”
레이아가 입고 있는 옷은 평범한 붉은색 드레스였다. 발목이 살짝 드러나는 길이와 장식도 하나 없이 원단을 통짜로 가공하여 만든 민무늬에, 가슴팍에 달린 장미 장식이 강조되는 흔한 드레스였다.
하지만 옷의 완성은 얼굴과 몸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평민 가정에서도 조금만 무리하면 살 수 있는, 값싼 드레스이지만 레이아가 입으니 고급 드레스로 둔갑했다.
이윽고 마차가 행사장 앞에서 멈췄다.
파냐가 먼저 문을 열고 내린 후 레이아에게 손을 건넸다. 파냐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려서자 주변의 시선이 쏟아졌다.
“저기, 레이아 양이지? 평소에도 예쁜 건 알았는데 옷 바꾸니까 아예 다른 사람이 됐네. 말 걸어 볼까?”
“아서라, 그 쿠자크도 대차게 까였다잖아. 콧대 높으신 아가씨가 우릴 거들떠나 보겠어?”
“설마 혼자 온 거야? 명색이 마탑 행사인데 혼자 오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이래서 오기 싫었다.
대부분 사람은 외모나 배경으로 자신을 평가한다. 뒤에서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그나마 감사패와 포상도 마법사로서의 레이아를 평가해 주는 것이기에 받으러 나온 거지, 그게 아니었다면 대차게 거절했을 것이다.
행사장 안에 들어간 레이아는 본능적으로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금세 또 어두워진 레이아의 표정에 파냐가 그녀를 달래고자 일부러 활기찬 목소리로 음식을 담아 왔다.
“아가씨, 이것 보세요. 그란데 백작가에서도 보지 못한 음식들이 많네요. 드셔 보세요.”
“어, 응.”
레이아는 음식을 깨작깨작 먹으며 시작하길 기다리던 가운데 오즈가 파티장에 입장했다. 오즈는 관계자들과 함께 단상 위로 올라가 재치가 넘치는 말로 입을 열었다.
“모두 새로운 프랑크 마탑 설립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해 주어 고맙네. 오래전부터 학장 연설은 늙은이 잔소리라 불리곤 했지. 난 아직 늙은이라 불리기 싫으니 짧게 하겠네.”
“하하하하.”
“세상 모든 일은 잘해도 자기 몫이고, 못해도 자기 몫일세. 마탑에선 아카데미처럼 일일이 학생들을 구속하지 않네. 그러니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자기 자신에게 휴식을 주는 방법을 익히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행동해 주게나.”
정말로 짧게 하고 끝났다. 바람직한 학장의 모습이기도 하다. 다른 곳에선 왜 그리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미사여구를 잔뜩 붙여 가며 수십 분 동안 훈화하는지 모르겠다.
바로 행사를 시작하나 싶었는데 오즈가 한 가지 전달할 사항이 있음을 알렸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앞서 감사패 전달의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네. 다들 알다시피 최근에 우연히 마물 한 마리가 영지로 떠내려왔지. 교수진의 부주의로 마물이 연구동에서 탈출했는데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저지한 학생이 있다네. 루크 백작님이 직접 해당 학생을 호명하며 감사패를 전달하겠네. 루크 백작님이 입장하시면 다들 박수로 환영해 주게나.”
행사장 문이 활짝 열리면서 일련의 무리가 걸어 들어왔다.
정장 차림의 한 사내가 예식용 갑옷을 입은 기사 무리를 이끌고 행사장 중앙을 관통하였다.
정장 차림의 사내가 루크임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루크의 입장에 행사에 참가한 모든 이가 박수갈채를 보냈다.
짝짝짝짝짝짝!
레이아가 있는 자리에선 인파에 가로막혀 루크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키가 남들보다 약간 작은 것도 한몫했다.
대신 키가 큰 편에 속하는 파냐가 먼저 루크를 확인하고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가씨! 아가씨!”
“갑자기 왜 그래?”
“그 사람이에요, 그 사람.”
“누구?”
“아니, 그 사람 있잖아요. 그 사람이 루크 백작님이셨어요.”
“그러니까 누구?”
파냐가 당황하여 앞뒤를 다 잘라먹고 말하는 통에 레이아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파냐에게 다시 물을 것도 없이 이내 곧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었던 그 사람이 기사들을 이끌고 단상으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그 사람이 루크 백작이었던 것이다!
레이아는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파냐, 아니라고 해 줘. 제발 아니라고 해 줘.”
“오즈 학장님이 먼저 인사 올리시는 거 보니까 맞네요. 혹시 여태까지 이름도 안 물어보셨어요? 말씀 많이 나누시지 않았나요?”
“마탑 안에선 고작 세 번 마주친 게 전부였어. 그리고 이름하고 출신을 물으면 나도 출신을 밝혀야 하잖아. 노골적으로 배경 자랑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싫었단 말이야.”
“차라리 잘됐네요. 덕분에 정말로 성격이 달라지셨다는 걸 알게 되셨잖아요.”
“그런 문제가 아냐. 저번 주에 대놓고 옛날 일을 전부 말했잖아. 면전에서 자기 욕하는 거 듣고 무슨 생각을 하셨겠어? 아! 그래서 대화 내내 웃으셨구나. 으으, 창피해 죽겠네.”
“아가씨, 아가씨, 지금 단상 위에서 아가씨를 호명하고 있어요.”
레이아는 단상으로 올라가는 내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본인 앞에서 싫다고 그리도 신명 나게 읊어 댔는데, 이제 와서 무슨 낯짝으로 보랴.
레이아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얼마나 웃었을까.
정말이지 창피해 죽겠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레이아에게 루크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예전 일은 미안하게 생각해. 직접 사과해야 하는데, 얼굴 마주칠 기회가 있어야 말이지.”
“언제부터… 저인 거 알고 계셨어요?”
“저번 주에 그란데 백작가 출신인 거 들었을 때부터? 사고를 당해서 옛날 일은 기억이 안 나거든.”
은발인 여인은 흔하지 않다. 특히 레이아쯤 되는 미모를 가지고 있다면 외견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이상하다.
루크는 예전과 외모며 분위기가 모두 달라졌고, 기억을 잃어 예전 일을 기억하지 못하니 서로 못 알아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레이아는 지금까지의 언행을 떠올리며 더더욱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그… 못 알아보고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해요.”
“괜찮다니까. 그렇게 신경 쓰면 이쪽이 무안해지잖아? 아니면 일부러 무안해하라고 사과하는 건가?”
“그, 그런 의도는!”
“알아, 농담이야. 정 신경 쓰인다면 서로 사과한 걸로 치자고. 하루 종일 마탑에서 마법에 정진하는 인재가 나 때문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태는 바라지 않거든.”
“하루 종일 마탑에 있단 걸 어떻게…….”
“이쪽은 가끔씩 마탑에 오는데도 심심찮게 마주친다는 건 그쪽이 계속 마탑에 눌러앉아 있단 뜻이잖아? 그 정도야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일이지.”
노력을 자랑하는 것만큼 촌스러운 행위도 없다.
하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해도 마음 한편에선 노력을 알아주길 바라는 게 인간이란 생물이다.
사람이 바라는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서 듣고 싶은 말을 해 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진다.
참 이상하다.
경악스러운 행동만 골라서 하던 사람이, 유일하게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단상에 올라올 때만 하더라도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는데, 어느새 잡생각이 싹 사라져 있었다.
편안한 기분 속에서 이제야 레이아의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저도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네요. 고마워요.”
“지금은 네가 감사패를 받는 시간인 건 알고 있지?”
“후후후, 그랬었죠. 감사패 감사히 받을게요.”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넌 감사를 너무 많이 해. 감사만 하다가 숨넘어가겠어.”
“그랬죠. 근데 마차에 태워 주신 날을 처음 만난 날이라도 해도 될까요? 예전엔 꽤 많이 만났었는데.”
“그런가? 생각해 보니 이상하긴 하군.”
원래 몸 주인이 쌓아 둔 은원일지라도 지금에 와선 루크의 은원이나 다름없다.
엉켜 있는 실타래를 잘 풀어서 유용한 옷가지를 만들지, 아니면 가위로 잘라 내 버릴지. 어느 쪽이든 루크가 하기 나름이었다.
지금 이 순간, 오랫동안 엉켜 있던 실타래가 풀리면서 질 좋은 실이 루크의 손에 떨어졌다. 이 실은 오즈의 은퇴로 인해 벌어진 루크군의 틈새를 꿰맬 좋은 재료가 되어 줄 것이다.
* * *
레이라는 원래 감사패를 받고 바로 귀가할 생각이었으나 분위기에 이끌려 행사가 파할 때까지 루크와 담소를 나누고 말았다.
늦은 시간에 되어서야 숙소에 귀가한 레이아는 곧바로 침대로 직행했다.
분위기에 취해서 몰랐는데, 집에 돌아오니까 다시금 여태껏 루크에게 한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번 일은 두고두고 흑역사로 작용할 것 같다.
‘당신이랑 얘기하니까, 한결 마음이 편해지네요. 다른 사람들도 당신 같았으면 좋았을 텐데.’
상대가 루크인 줄 알았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다.
레이아는 창피한 마음에 침대에 냅다 뛰어들어선 베개에 얼굴을 묻고 다리로 침대를 두드리며 법석을 떨었다.
“으아아! 내가 왜 그랬지? 진짜로 왜 그랬지? 아!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없었던 걸로 하고 싶어!”
레이아가 벗어 던진 옷가지를 주섬주섬 줍던 파냐는 난생처음으로 레이아의 흐트러진 모습을 목격하고선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사상 초유의 사태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방 밖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