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63화 강해지는 건 빠를수록 좋다(1)
하니온 왕국의 남쪽 끄트머리에 있는 해안 도시 마트리.
프라임 왕국 시절 때만 하더라도 무역의 중심지라 불리던 대도시였으나 지금은 사람이 한 명도 살지 않는 유령 도시가 되었다.
전쟁의 여파 때문은 아니다. 하니온 왕국군이 마트리에 도착하기도 전에 종전됐다. 즉, 마트리가 전장이 된 적은 한 번도 없다.
한데도 마트리의 풍경은 커다란 전쟁을 겪은 양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이 모든 것이 마물 때문이었다.
최근 하니온 왕국은 왕국 전역에 갑작스럽게 마물이 늘어나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놈들은 혼자 다닐 때도 있고, 무리 지어 행동하며 마을이나 도시를 헤집고 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최근 마트리에 마물들이 잠입해 있다가 갑자기 본성을 드러냈는데, 그 숫자가 무려 100마리가 넘었다.
여태껏 보아 온 마물 무리 중에서 가장 대규모였기 때문에 마트리의 수비대는 변변한 대항조차 못하고 대량 학살이 펼쳐졌다.
인간의 살점을 포식한 마물들은 폐허가 된 도시를 남겨 놓고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이젠 아무도 들리지 않는 유령 도시에 남몰래 둥지를 튼 자들이 있었으니.
감색 로브를 뒤집어쓴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사람들이 버려진 영주의 저택에 방문했다.
저택 안에 있던 자들은 새로이 방문한 자들을 맞이하며 예를 갖추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블랑 사제님.”
블랑이라 불린 40대 중반의 비쩍 마른 사내가 로브 후드를 젖히며 용건부터 꺼냈다.
“라그나로스의 봉인석 상태는 어떤가?”
“무척 양호합니다. 흑마법으로 독립된 아공간에 격리해 두어서 열기 또한 배출되지 않고 있지요.”
“겐크 국왕의 협조로 봉인을 푸는 데 필요한 재료를 모두 모아 왔네. 봉인을 해제하는 의식을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하게.”
“알겠습니다. 의식을 시작하려면 격리해 둔 봉인석을 아공간 바깥으로 빼내야 하는데, 그리되면 열기가 방출되겠지요. 인근 마을에서 알아차리지 않을까 걱정인데 이 부분은 어찌 해결하면 좋을는지요?”
“아직 풀지 않은 마물이 몇 마리나 되나?”
“마트리를 봉인석을 보관하는 지역으로 만드느라 100마리를 소모해서 몇 마리 남지 않았습니다.”
“아끼지 말고 4성급까지 죄다 마트리 주변에 풀어놓도록. 그 정도면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할 테지.”
마물만으로는 하니온 왕국을 흔들기엔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준비한 것이 라그나로스였다.
고대 4대 정령왕 중 하나라 불리며 강대한 힘을 발휘했던 라그나로스를 이용한다면 하니온 왕국을 뒤흔들 수 있을 터.
블랑은 의식을 행함에 있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주의를 기울일 것을 명령했다.
“다소 시간이 걸려도 좋다. 다시 구하기 힘든 재료들뿐이니 반드시 한 번에 성공시켜라.”
* * *
“밥 줘! 밥 줘!”
저 혼자 비행으로 산책하고 온 파이가 돌아오자마자 밥 타령을 해 댔다.
처음에는 새장에서 지내라고 널찍한 새장을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좁은 곳이 싫은지 하루가 멀다 하고 부리로 새장을 부수고 나와서 이젠 그냥 아무 데서나 자게 놔두고 있다.
가만히 놔두면 저택 안을 돌아다니며 아무한테나 말을 걸고, 심심하면 저 혼자 산책을 나갔다 오기도 한다.
씻는 것도 자기가 알아서 냇가에 다녀오고 부리로 깃털을 손질하는지라 애완동물로서 손이 가는 부분은 거의 없었다.
루크는 업무를 보다가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찬장을 열었다.
“그래그래, 줄 테니 보채지 마. 오늘은 어디까지 갔다 왔어?”
“러스트! 러스트!”
“멀리도 갔다 왔군.”
“오크 밥! 맛없어!”
“오크 밥이 맛없는 게 아니라 러스트 식성이 이상한 거야.”
“파인애플! 싫어!”
“확실히 튀긴 돼지고기에 파인애플 소스를 부어 먹는 건 심하지.”
루크는 직접 저택에서 만든 최고급 쇠고기 육포를 하나씩 꺼내어 파이의 입에 물려 주었다.
이름이 창천 앵무라서 앵무새로 착각하기 쉬운데, 명색이 천공섬 3대 괴조에 속하는 새답게 대단한 먹성을 자랑한다.
이 작은 몸집으로 제 몸집보다 훨씬 많은 양을 먹으니 말 다 했다.
하루에 파이 사료로 들어가는 돈도 무시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부모님이 저녁을 먹으며 아이에게 오늘 하루 뭐 했냐고 묻듯, 루크 또한 파이에게 사료를 먹이며 산책 중에 일어난 일을 빠짐없이 귀담아들었다.
파이의 산책 일지가 곧 영지의 세세한 부분까지 알 수 있는 시찰이나 다름없었다.
사료를 먹인 루크는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시계를 쳐다보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이러다 늦겠군. 파이, 오래간만에 같이 비행 좀 하자.”
“방금! 귀가!”
“어느 입이 놀다 와 놓고 거드름을 피우는 걸까?”
“귀찮! 귀찮!”
“꼬리털 뽑아 버리기 전에 당장 준비해.”
파이는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양 루크의 손가락을 부리로 비볐다. 그러고는 창밖으로 뛰쳐나가 제자리에서 비행하더니, 본래의 거대한 모습으로 변했다.
“탑승! 탑승!”
루크는 파이의 등에 올라타기 위해 창틀을 밟고 힘껏 뛰었다. 루크의 몸이 허공에 붕 뜨는가 싶더니 정확하게 파이의 등 위에 안착했다.
출발하려는데 발아래의 정원에서 드골의 외침이 들려왔다.
“백작님! 저번에도 창문으로 나오지 말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제발 위험한 행동은 삼가 주십시오!”
“주의하지. 마탑에 다녀올 테니 그리 알아. 오늘 치 결재 서류는 내 책상 위에 올려놨으니 가져가서 마무리해 둬.”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파이가 속도를 붙이면서 강한 맞바람이 머리와 옷매무새를 잔뜩 헝클었다. 항상 비행하고 나면 머리가 헝클어져 산발이 되고 옷에 먼지가 내려앉아 엉망이 되기 때문에 가급적 비행으로 이동하는 건 삼가는 편이다.
그래도 확실히 마차로 이동하는 것보다 빨랐다. 마차로 이동하면 40분쯤 걸리는 거리를 고작 5분 만에 주파했다.
마음만 먹으면 더 빨리 날 수도 있으나 그랬다간 꼴이 말이 아니게 될 테니 속도를 조절한 것이었다.
* * *
오즈가 있는 연구동에 도착한 루크는 최상층에 있는 연구실 창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연구실 안에서 오즈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반응하며 냉큼 열어 주었다.
“어후, 깜짝 놀래라. 갑자기 창문 밖에 계셔서 늙은이 심장 멈출 뻔했습니다.”
“그거 미안하게 됐습니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주지 않겠습니까? 뛰어서 들어가야 하거든요.”
“그러죠. 오늘은 어쩌다가 파이를 타고 오시게 된 겁니까?”
“밀린 업무를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더군요. 약속 시간에 늦을까 봐 타고 왔습니다.”
“나도! 나도!”
뒤에서 파이가 자기도 들어가고 싶다며 아우성을 쳤다.
오즈가 들어와도 된다며 고개를 끄덕이니 파이는 작은 앵무새의 형태로 몸을 바꾸어 연구실 안으로 날아들었다.
한데 평소 같으면 루크의 어깨 위에 앉을 텐데 오늘은 루크의 옆을 쌩하니 지나쳤다. 그러고는 연구실 안에 있던 또 다른 사람의 어깨 위에 앉았다.
“어머나!”
고개를 돌리니 레이아가 서 있었다. 갑자기 파이가 그녀의 어깨에 앉은 탓에 놀란 나머지 잔뜩 움츠러들었다.
파이는 자기 때문에 놀란 걸 아는지 모르는지 레이아의 머리에 부리를 비볐다.
“예뻐! 예뻐!”
놀란 와중에도 루크를 보고선 냉큼 고개를 살짝 숙이는 레이아였다.
“저… 오랜만에 뵙습니다, 루크 백작님.”
지난 설립 기념행사 이후로 근 한 달 만에 마주친 참이었다.
서로 피했다기보다는 루크가 주로 저택에서 마법을 수련하게 되면서 마탑에 올 일이 거의 없어졌다. 때문에 자연스레 얼굴 마주칠 일도 없어졌다.
설립 기념행사 때 대화를 나누면서 관계가 재정립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한 달간 못 보면서 다시 살짝 어색해진 것 같다.
루크는 그녀가 부담스럽게 느끼지 않도록 편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거의 한 달 만이던가? 마탑 생활에 불편한 점은 없어?”
“백작님 덕분에 많이 편해졌어요.”
“응? 마치 이전에는 불편한 게 있었다는 것처럼 들리는걸?”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미래의 비행 부대 대장이 불편한 게 있는데 상관으로서 가만히 있으면 체면이 말이 아니지. 대대적인 조사가 필요하겠군.”
“아, 아니에요! 제 생김새가 이렇게 생겨서 오해가 생긴 건데, 그걸 또 저는 마법에 정진하고 싶으니까 거절하다 보니까… 우으으.”
당황한 탓에 머릿속에 있는 것이 한꺼번에 튀어나와서 설명이 안 되나 보다.
그녀가 머리를 감싸 쥐며 어리바리한 자신을 책망하는 가운데 파이가 틈새를 공략하듯 깐족거렸다.
“귀척! 귀척!”
“아니거든! 사람 귀에 대고 자꾸 이상한 소리 할래?”
“미안! 미안!”
파이 덕분에 열이 올라 긴장이 풀렸는지 본래의 모습이 나오는 레이아였다.
아까 했던 말을 대충 해석하자면 이쁘장하게 생긴 것 때문에 괜히 이상한 오해가 생겼는데, 설립 기념행사 때 루크와 오랜 시간 담소를 나누자 깊은 연분이 있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모든 곡해와 오해가 해소되었다고 말하려 했던 것 같다.
루크는 레이아에게 그대로 파이를 떠넘기고선 오즈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아침에 갑자기 보자고 하셨는데, 무슨 일입니까?”
“다른 게 아니고 백작님께서 벌써 3서클에 이르셔서 불렀습니다. 3서클부턴 속성에 맞춰 단련해야 해서 말이죠. 오늘은 속성을 확인할 겸 마나양을 확인하기 위해서 오시라고 한 겁니다.”
루크의 경지는 근 두 달 만에 3서클에 올라 있었다. 남들보다 마나양이 월등히 많아서 서클 만드는 속도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 이상할 건 없었다.
루크와 오즈는 익숙한 일인지라 별 반응 없었으나 레이아는 격한 반응을 내비쳤다.
“3서클요? 벌써요?”
그녀가 알기로 루크는 두 달 전에 마법에 입문한다 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사람이 3서클까지 도달하는 데 보통 3, 4년쯤 잡는다. 천재라 불리는 레이아도 1년은 걸렸다.
한데 두 달이라니.
듣고도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레이아가 놀라든 말든 루크는 대화의 흐름을 이어 갔다.
“속성 확인이라면 불, 물, 바람, 땅 네 속성 중 어느 속성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한다는 겁니까?”
“허허, 벌써 거기까지 진도를 빼셨나 보군요. 맞습니다. 3서클 때부턴 자신한테 맞는 속성을 골라서 해당 속성의 마법을 중점적으로 익히지요. 참고로 전 화 속성 전문입니다.”
“안 그래도 전 어떤 속성인지 궁금했는데 잘됐군요. 어떻게 확인합니까?”
오즈는 책상 위에 놓아둔 수박 크기의 유리 구체를 가리켰다.
“속성 확인에는 저기 있는 감별기를 사용합니다. 속성과 동시에 마나양도 확인할 수 있어서 굳이 3서클이 아니더라도 현재 자기 마나양을 알아보기 위해 자주 사용하지요. 오늘 백작님 속성을 확인하려고 제 연구실에 가져왔는데, 레이아 양도 오늘 쓰고 싶다고 해서 이리로 부른 것입니다.”
왜 레이아가 연구실에 있었는지 그 의문이 풀렸다.
루크는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 한번 보고 나서 사용하고 싶었다.
때문에 루크는 레이아에게 먼저 차례를 양보했다.
“시범을 부탁하지. 먼저 사용하도록 해.”
레이아는 거절하지 않고 흔쾌히 먼저 감별기 앞에 섰다. 그리고 양손을 감별기의 좌우 측면에 가져다 대고선 마나를 남김없이 부여했다.
콸콸콸콸!
마나를 부여하자 감별기 안에 검은색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수맥에서 물이 콸콸 솟는 광경을 연상하게 했다.
감별기 안의 검은색 물은 계속 수위가 오르더니 감별기 3분의 1 정도 되는 높이에서 멈춰 섰다.
동시에 레이아의 손이 감별기에서 떨어졌다.
“하아, 하아, 저번보다 마나양이 조금 늘었네요.”
이어서 오즈가 감별기에 나타난 수치를 어떻게 읽는지 알려 주었다.
“방금 검은색 물이 차올랐지요. 검은색 물은 모든 속성에 적합한 재능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물이 3분의 1만큼 차올랐는데, 그건 감별기에 부여한 마나양을 의미하지요. 레이아야 워낙에 마법 쪽으로 재능이 출중해서 모든 속성에 재능이 있긴 합니다만, 원래 불 속성은 붉은색, 물 속성은 푸른색, 바람 속성은 초록색, 땅 속성은 노란색 물이 나옵니다.”
“색깔과 물의 양, 그걸로 속성과 현재 마나양을 측정할 수 있다는 거군요. 알겠습니다. 저도 한번 해 보지요.”
루크는 레이아와 교대하며 감별기 앞에 섰다. 그러고 나서 아까 레이아가 한 것처럼 감별기의 좌우 측면에 손바닥을 대며 마나를 끌어 올렸다.
루크의 마나 회로에 깃들어 있던 대량의 마나가 감별기로 흘러들어 갔고, 곧 감별기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콸콸콸콸콸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