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64화 강해지는 건 빠를수록 좋다(2)
피처럼 진한 붉은색 물이 분수처럼 솟구치더니 감별기를 삽시간에 가득 메웠다. 붉은 물이 구체 안에 가득 찼는데도 아직 루크의 마나는 바닥날 기미가 안 보인다.
끼기기기긱!
유리 구체의 표면에서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루크의 장대한 마나에 오즈가 부랴부랴 루크를 말렸다.
“그만! 이제 됐습니다! 그만하셔도 됩니다! 이러다 감별기 터지겠습니다!”
루크는 마나를 갈무리하며 감별기에서 손을 뗐다.
“좀 더 큰 건 없습니까?”
“하아, 그나마 제작된 것 중에서 가장 큰 겁니다. 마나마스터들도 보통은 7할까지밖에 못 채우죠.”
“흠, 이참에 제대로 마나양을 재 보고 싶었는데 장비가 이래서야 무리겠군요.”
“역산하면 대략적인 수치는 알 수 있을 겁니다. 지금 마나가 얼마나 남으셨습니까?”
“한 절반쯤?”
“남들의 3배보다 약간 적은 정도겠군요. 물이 붉은색이니 불 속성 재능이 가장 높으십니다.”
“그럼 다른 속성은 못 쓰는 겁니까?”
“사용할 수는 있는데 효율이 많이 떨어지지요. 불 속성 마법을 주로 익히면서 다른 속성 마법 중에선 필요한 것만 익히는 게 가장 효율적입니다.”
세간 사람들이 알면 깜짝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건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는 루크와 오즈였다. 워낙에 자주 있는 일이라 이제 이 정도는 놀랄 건수조차 못 되었다.
두 사람이야 익숙하다 치더라도 레이아에겐 아니었다.
그녀는 감별기 안에서 서서히 사라져 가는 붉은 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는 나머지 슬며시 루크에게 말을 붙였다.
“저기… 방금 감별기 가득 채운 것 맞죠?”
“그랬는데 왜?”
“그… 가득 채우고도 절반이나 남았다고 하셨는데 제가 잘못 들은 거겠죠?”
“그래, 잘못 들은 거야.”
“아, 역시 잘못 들은 거… 아니, 아까 절반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일부러 놀리는 거죠?”
“제대로 들었네. 그런데 왜 물어?”
“듣고도 믿기 힘드니까 물어본 거죠. 마나양이 보통 마나마스터의 3배라… 직접 보고도 실감이 안 나네요. 그런데 이런 중요한 걸 저한테 보여 주셔도 괜찮으신가요?”
엄밀히 말하면 레이아는 외지에서 온 유학생에 불과하다. 루크의 마나 보유량이라는 개인 정보를 유출할 가능성이 있었다.
물론 레이아의 성격상 어디 가서 함부로 입을 놀리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따지면 굳이 레이아 앞에서 감별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루크는 그녀의 의문에 간단하면서도 시원한 대답을 내놓았다.
“차기 비행 부대 대장인데 뭐 어때.”
“저 벌써 차기 비행 부대 대장으로 낙점된 거였어요?”
“싫은가 봐?”
“아뇨, 저야 영광이죠. 비행 부대를 신청하면 영약을 받을 수도 있으니 신청하려고 했는데, 설마 대장 자리를 권하실 줄은 몰라서요. 근데 혹시 그 인사 과정에 저희 아버지가 개입하셨다거나 그런 건 아니죠?”
“온전히 마법사로서의 역량만 보고 평가한 거니까 자신감을 가져도 좋아.”
“감사합니다.”
“아쉬운 점 하나만 말하자면, 감사 인사를 너무 많이 해. 좋은 말도 남발하면 의미가 희석되기 마련이야. 주의해 둬.”
“네.”
마법사들의 진로는 여러 분야로 나뉜다. 마탑에 남아 연구에 매진하는 사람도 있고, 용병이 되는 자도 있고, 귀족가에 들어가 작위를 받고 활동하는 자들도 있다. 그중에서 단연 최고봉은 비행 부대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봉급이 가장 세고, 역사에 이름을 남길 기회를 얻기 쉬우며 다른 직업에선 쉬이 체험할 수 없는 값진 경험을 많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삼색 제비라는 차별된 비행 수단을 가진 루크의 비행 부대는 이번 공국과의 전쟁을 통해 최고의 부대로 평가받고 있다.
루크와의 엉킨 과거도 풀었겠다, 레이아로선 비행 부대 대장 자리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볼일을 마친 레이아는 먼저 자리를 뜨기 위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전 이만 돌아가 볼게요. 처음부터 마나양을 확인하러 온 거였거든요.”
“어이, 파이. 돌아간다니까 그만하고 내 어깨 위로 돌아와.”
레이아의 어깨 위에서 부리로 깃털을 다듬던 파이가 날개를 퍼덕이며 루크의 어깨에 앉았다.
그리고 이번엔 루크의 뒷머리에 부리를 비비며 활기차게 외쳤다.
“홀아비 냄새! 홀아비 냄새!”
루크는 소리 없는 한숨을 길게 내뿜고선 경고 없이 파이의 꼬리털을 하나 뽑았다.
“꺄오!”
허물없이 지내는 주인과 애완동물의 바람직한(?) 모습 앞에 오즈와 레이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이윽고 레이아가 떠나고, 연구실 안에는 오즈와 루크만 남게 되었다.
3서클 이후 어떤 속성을 중점적으로 익힐지 정했으니 이젠 서클을 만드는 것만 남았다. 한데 3번째 서클까지는 순탄하게 만들 수 있었는데, 4번째 서클부터 마나 회로의 운반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오즈에게 그 연유를 묻자 정석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기존 서클들이 활성화되면서 회로의 유연성이 부족해져 그런 겁니다. 지금부턴 약을 먹어도 별 소용없겠지요.”
“오즈 학장이 보기에 지금부터 7서클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다.”
“운반 속도가 느려졌다곤 해도 남들보단 빠르시니 8, 9년 정도 예상합니다. 뭐 상황에 따라 더 짧아질 수도 있고, 더 길어질 수도 있으니 장담은 못 드리지만요.”
“8, 9년이라… 그것도 긴데 말이죠. 단축할 방법은 없습니까?”
“쓰읍, 기간 단축이라는 게 전부 정석에서 벗어나는 것뿐이라서 별로 권해 드리고 싶진 않군요. 그나마 쓸 만한 방법이라면 라그나로스의 열기를 이용하는 것 정도일까요.”
“라그나로스라면, 그 라그나로스를 말하는 겁니까?”
“네, 백작님의 마나 회로는 화 속성에 적합하니 화 속성을 띠고 있는 환경에서 마나를 운용하면 훨씬 쉽게 옮길 수 있겠지요. 저도 젊었을 적에 수련할 겸 시도하여 5서클의 벽을 허물고 6서클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화 속성의 재능을 가진 마법사가 라그나로스의 열기를 이용하여 수련하는 건 오래전부터 시행됐던 방법이라고 한다.
렌디군을 무너뜨릴 때 라그나로스의 봉인석을 파내어 사용한 이후에 방치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새로 아레나 공국의 공왕이 된 레들리가 마법사들을 시켜 다시 매장했을 수도 있고, 여전히 방치해 놨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아레나 공국에 가야만 시행할 수 있는 수련 방법이었다.
“조만간 시간을 내서 아레나 공국에 다녀와야겠습니다.”
“그게 말인데, 최근에 이상한 소문이 들려오더군요. 저희가 방치해 놨던 라그나로스 봉인석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합니다.”
“아레나 공국에서 치운 것 아닙니까?”
“이상한 게 아레나 공국에서도 처리반을 구성하고 있던 차에 갑자기 사라졌다고 합니다. 근데 사라졌던 라그나로스 봉인석이 생뚱맞게도 하니온 왕국에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더군요. 하니온 왕국 남부에 있는 해안 도시 주변의 기온이 갑자기 상승했다는데, 정말로 라그나로스 봉인석이 옮겨 간 건지, 아닌 건지 확실치는 않습니다.”
누군가가 남몰래 라그나로스 봉인석을 하니온 왕국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분명 남들이 모르는 내막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개인이 라그나로스 봉인석을 남몰래 옮길 정도의 능력과 인력을 갖추기란 어려울 테니 분명 모종의 세력이 존재할 것이다.
아직 그들의 목적까진 알 수 없으나 소문으로부터 구린내가 진하게 풍긴다.
어찌 됐든 라그나로스 봉인석은 경지를 끌어 올리는 기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는 수단이다. 누구의 것도 아니니 루크 또한 사용할 권리가 있을 터.
루크는 일말의 고민 없이 하니온 왕국행을 결정했다.
“하니온 왕국에 가서 직접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썩 권해 드릴 방법은 아니군요. 지금 하니온 왕국 정세가 워낙 흉흉해서 백작님의 방문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을 겁니다.”
“저쪽도 입장이 있을 테니 공식적인 방문은 당연히 싫겠지요.”
루크의 말에서 처음부터 공식적으로 방문할 생각은 없었다는 느낌이 풍겼다.
이래봬도 학장 노릇을 하며 여러 귀족과 의도를 주고받은 경험이 받은 오즈다. 루크의 말뜻에 담긴 의도를 못 알아차릴 리 없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겁니다만, 설마 비공식적으로 방문하시려는 겁니까?”
“어차피 개인적으로 수련하러 가는 겁니다. 경지 끌어 올리러 가는 건데, 바다를 사이에 두고 공식적인 방문 일자를 정하는 것만큼 우스운 일도 없지요.”
“흠, 그래도 전 반대하고 싶군요. 비공식 방문이라면 평범한 여행자로 가장하셔야 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전쟁터에서도 잘 먹고 잘 잤는데 어딘들 못 자겠습니까.”
“그런 의도로 꺼낸 말은 아니라 걱정돼서 드리는 말입니다. 저번에 마물이 떠밀려 온 후에 혹시나 싶어서 알아봤는데, 현재 하니온 왕국에 마물들이 득실거린다고 하더군요. 급한 일도 아닌데 이번에는 자중하심이 어떤지…….”
하니온 왕국에 마물이 득실거린다는 얘기는 루크도 얼마 전에 보고받은 바이다.
문제가 상당히 심각한지 겐크 왕궁으로부터 ‘하니온 왕국에서 넘어오는 자들에 대한 입국 거부’와 ‘하니온 왕국을 여행 자제 구역’으로 지정하는 공문이 내려왔다.
드래프트 영지의 지원을 받기 힘든 바다 건너의 타국인 데다 사람으로 둔갑하는 교활한 괴물들이 득실거린다.
오즈가 말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루크는 얼마 전 오즈에게 받은 펜던트 형태의 마물 감지기를 손에 쥐고 흔들었다.
“마물이라면 이걸로 구분하면 될 일이지요.”
“그건 2성급 이하의, 마기를 감출 줄 모르는 마물을 감지하는 용도입니다. 3성급쯤 되면 마기를 숨기는 방법을 알고 있지요. 3성급이 보기 드물다곤 해도 하니온 왕국에선 상당수의 개체가 발견됐다고 하니 마냥 감지기만 믿고 계시다가 화를 입으실까 두렵습니다.”
“그럼 3성급 이상도 감지할 수 있는 자를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거라면 문제없겠지요?”
“네? 뭐… 감이 뛰어난 사람 중에 가끔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곤 들었습니다만, 영지 내에 그런 인물이 있을지…….”
오즈는 몰라도 루크는 알고 있다.
저번 달에 3성급 마물이 탈출했을 때 마물의 기척을 감지하고서 마법을 사용한 자가 한 명 있지 않았는가.
본인도 자각하지 못한 예리한 감각을 갖춘 사람. 거기다 비공식 방문이라 여행자를 가장해야 하기 때문에 2, 3인의 무리가 딱 적당하다. 그 사람을 데리고 간다면 두 명이 다녀도 화력이 차고 넘칠 것이다.
루크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 일에 적격인 자가 한 명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