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66화 왕국의 숨통을 죌 황금 열쇠(2)
마물 감지기가 반응하기 무섭게 누군가가 선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문을 열자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레이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용건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마물 감지기가 작동한 마당에 마기에 민감한 체질인 레이아가 마물의 존재를 감지하지 못했을 리 없다.
레이아는 종종걸음으로 방 안에 들어와선 냉큼 방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우비처럼 푹 눌러쓰고 있던 후드를 뒤로 젖히며 말을 꺼냈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저번에 마탑 부지 안에서 마물을 봤을 때랑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 알려 드리러 왔어요.”
“마기에 민감한 체질인 게 확실해졌군. 감지기도 똑같이 말하고 있어.”
“어떻게 된 걸까요? 마물은 하니온 왕국에서만 활동하고 있는 게 아니었나요?”
현재 이 배에 마물이 타 있다는 건 드래프트 영지에 마물이 체류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니온 왕국에만 있고 겐크 왕국에는 마물이 없다는 정설을 완전히 뒤흔드는 현상인 셈이었다.
하면 또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겐크 왕국에도 마물이 있었다 치자. 그 정도야 데메그리 교가 숨어 살며 새로운 마물을 만들었다거나 먼 옛날에 소탕당하지 않은 마물이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가설로 설명할 수 있다.
근데 왜 굳이 마물이 드래프트 영지를 통하여 하니온 왕국으로 가는 상선에 올라탄 것일까?
인간을 사냥하고 싶은 거라면 굳이 표까지 끊어 가며 배에 올라탈 이유가 없다.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생물이 본능을 거스르는 경우는 두 가지뿐이다.
더 큰 힘에 의해 본능이 억눌린 상태거나, 모종의 사건으로 본능을 잃은 돌연변이거나.
“한 가지 확실한 건 관광을 할 정도로 평화적인 녀석들은 아니라는 거지. 일단 어느 녀석인지 확인해 보러 가자고.”
마물 감지기는 근처에 마물이 있다는 걸 알려 주기만 하지, 실질적으로 누가 마물인지까지 알려 주진 않는다. 나침반이 목적지를 알려 주진 않는 것처럼 둔갑해 있는 마물은 직접 찾아야 한다.
하지만 마기에 민감한 자가 있다면?
대략적인 위치만 알려 주는 마물 감지기와 다르게 레이아는 마물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판별해 낼 수 있다.
마물의 위치를 탐지하는 것은 온전히 그녀의 몫이었다.
루크와 레이아는 선실에서 빠져나와 마물을 찾아 움직였다. 레이아가 감각을 곤두세우며 마기가 느껴지는 위치를 감지했고, 곧 걸음을 옮겼다.
한데 그녀의 발걸음이 위가 아닌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두 사람을 제외한 모든 선원 및 승객은 갑판 위에 있다. 사람으로 둔갑하고 있다면 갑판 위의 인물 중 한 명일 터.
그러나 레이아는 자신의 감을 확신하듯 자신 있게 아래로 내려갔다.
“이 밑에서 마기가 느껴져요. 확실해요.”
* * *
아래층에는 각종 화물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한편에는 드래프트 영지의 주요 수출품인 곡식과 육류가, 다른 한편에는 민간에서 저마다 다른 사연을 지내고 있는 각종 화물이 실려 있었다.
하니온 왕국의 지인에게 보내는 선물도 있고, 개인적으로 물건을 배달시킨 자에게 전달할 물건도 있고, 자영업자끼리 거래를 위해 발송한 물건도 있었다.
빽빽하게 늘어선 화물 사이를 걷던 레이아가 검 한 자루가 들어갈 법한 기다란 나무 상자 앞에서 멈춰 섰다.
“여기예요. 이 안에서 마기가 새어 나오고 있어요.”
“마물이 상선에 탄 게 아니라 누군가가 마물을 운반시키고 있었나 보군.”
“승객 중 한 명이 범인일까요?”
“아니, 상자 옆에 식별 기호를 보니 배달을 의뢰한 것 같아. 화물을 부친 장본인은 배에 타지 않았겠지.”
누군가가 화물을 가져와서 하니온 왕국까지 배달해 달라고 한 모양이다. 이 화물은 하니온 왕국에 도착하여 또 다른 유통 업자의 손에 넘어갈 것이고, 최종적으로 하니온 왕국의 업자를 통해 수취인의 손에 전달될 것이다.
레이아가 먼저 상자 주변을 더듬으며 발송인을 확인했다.
“여기 가넷 상단이라고 적혀 있어요. 들어 보신 적 있으세요?”
“전혀. 아마 명의만 있는 유령 상단일 거야. 이만한 폭탄을 남의 손에 맡기고 운반시키는데 꼬리를 남겨둘 리가 없지.”
“운반에 성공하면 좋고, 남한테 들켜도 자기들은 안전한 곳에서 지켜보고만 있겠다는 심보네요.”
내용물을 확인하고자 상자 자물쇠에 검을 가져다 대었다. 한데 자물쇠에 닿기도 전에 강한 반발력이 발생하며 검이 튕겨 나왔다.
억지로 열려는 움직임에 반응하는 결계라도 둘러져 있나 보다. 그 증거로 반발력이 발생한 자리에 잠깐 검은 기운이 맴돌았다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파지직!
“슬쩍 안을 보려던 것뿐인데 새침하게도 튕기는군.”
“흑마법을 기반으로 결계를 펼쳐 둔 것 같아요. 독자적인 배열을 사용한 걸로 봐선 상당한 실력자의 솜씨예요.”
“열 수 있는 방법은?”
“결계 마법을 걸어 둔 본인이거나 해체 코드를 알고 있는 자가 아니면 무리겠죠. 억지로 열려고 했다간 마기가 폭주를 일으켜서 안에 있는 내용물과 주변 일대가 폭발에 휘말릴 거예요.”
“상자 하나 열어 보자고 헤엄쳐서 해협을 건널 순 없는 노릇이지. 봉인된 상태인 걸 안 것만으로도 충분해. 실제로 활동하고 있는 개체가 아니니 밤 중에 살점을 뜯어 먹힐 일은 없겠지.”
이만하면 됐다는 듯 먼저 선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가는 루크였다.
레이아가 황급히 로브 후드를 꾸욱 눌러쓰며 그를 뒤따랐다.
“저거 저 상태로 가만히 놔둬도 될까요?”
“상자에는 목적지가 슈탈랭 영지라고 적혀 있더군. 마트리로 가는 길목에 있는 영지니까 가는 길에 겸사겸사 범인을 알아내 보자고.”
“시작부터 별일을 다 겪네요. 우연이라지만 저희가 탄 배에 마물이 화물로 실려 있을 줄이야.”
“아마 오래전부터 계속 배를 통해서 마물을 운반시키고 있던 거겠지. 우리가 탄 배에 우연히 실려 있던 게 아니라 항상 운반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우리가 발견한 걸 테고.”
마물을 몰래 운반하고 있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컸다.
즉, 마물의 활동지는 하니온 왕국이지만 마물의 생산지는 겐크 왕국이라는 것이다.
겐크 왕국 어딘가에서 데메그리 교가 마물을 생산하여 하니온 왕국으로 보내고 있다.
그 이유가 뭘까?
무엇을 위해 기껏 만든 마물을 겐크 왕국이 아닌 하니온 왕국에서 풀어놓고 있는 걸까?
아니,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가설을 세우려면 좀 더 근본적인 부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하니온 왕국에 풀어놓는 이유를 되짚기에 앞서 왜 겐크 왕국에서 마물을 만들고 있는지부터 따져 보는 것이 순리이리라.
‘왜 겐크 왕국에서 마물을 만들고 있는 거지? 마물을 만들기 위해선 상당한 자금과 들키지 않는 장소가 필요해. 마물을 만드는 데 필요한 요소가 겐크 왕국에 있기 때문이라면…….’
생각을 펼쳐 가던 도중 한 줄기 번개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마물을 만들기 위해선 상당한 자금과 안전한 장소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작업을 겐크 왕국에서 하고 있다.
왜겠나?
겐크 왕국 안에 자금과 장소를 대 주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데메그리 교에 후원자가 붙어 있다. 더불어 그 후원자란 놈은 마치 예전에 아레나 공국의 쉐도우 나이트에서 영감을 얻기라도 한 양 몰래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만약 정말로 쉐도우 나이트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면 최종 목적은 하니온 왕국을 정복하는 것일 터.
겐크 왕국에서 막대한 자금과 안전한 장소를 제공할 능력이 있고, 타국 정복을 바라고 있는 사람. 지금까지 모인 단서는 이정표가 되어 겐크 왕국의 어느 인물을 가리켰다.
‘거인국과의 전쟁에서 혼쭐이 나더니 인간의 힘으로 대륙 정벌은 무리라 판단한 건가. 그래도 사용할 연장을 잘못 골랐어, 카이둔 국왕. 자루 없는 검을 들고 있으면 본인 손도 베이기 마련이지.’
잘하면 겐크 왕국의 숨통을 쥐고 흔들 수 있는 황금 열쇠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마법을 수련하러 가는 도중에 막대한 이득이 따라붙은 격이다.
루크는 검지로 검갑을 경쾌하게 튕기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 * *
루크와 레이아가 탄 상선은 보름간의 항해 끝에 하니온 왕국에 도착했다.
발밑에 마물을 두고 잠을 자는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았으나 항해가 끝날 때까지 별다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배가 정박한 곳은 하니온 왕국의 해안 도시 중 하나인 파이넨이었다. 프라임 왕국 시절 때부터 꾸준하게 드래프트 영지의 상선이 드나들던 도시이기도 하다.
드골을 시켜서 미리 위조 신분증을 만들어 두었기에 입국 심사는 잡음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루크가 내민 신분증을 본 검사관이 대뜸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이런, 남부 출신이구먼. 고향엔 얼마 만에 돌아가는 건가?”
“꽤 오래됐지요.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말도 말게. 근래 들어 남부 지방에 마물들이 늘어나서 사라진 마을이 한둘이 아니라네. 뭐, 그래도 최근에는 토벌대가 투입되면서 어느 정도 진압됐다는 말이 있긴 한데 그래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지.”
“참고하도록 하죠.”
“자네의 고향은 무사하길 바라네. 조심해서 돌아가게나.”
무사히 입국 심사를 통과한 루크는 먼저 심사를 마친 레이아와 합류했다.
마물이 득실거리는 것치곤 파이넨의 거리는 여느 대도시 못지않은 활기를 띠고 있었다.
입국 심사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마물의 주된 활동 지역은 하니온 남부 지방이라고 한다. 북부에선 가끔씩 발견되긴 해도 아직 큰 피해라고 할 법한 사건은 없다고 들었다.
레이아는 허리를 한번 쭉 펴고선 잡티 하나 없는 맑은 눈빛으로 루크를 쳐다보았다.
“간만에 땅을 밟으니 기분이 남다르네요. 선상 여행은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즐거웠어요.”
지난 보름 동안 레이아는 정말 귀족가 영애가 맞나 싶을 정도로 잘 지냈다.
바다를 건너면서 온갖 일이 있었는데, 자이언트 날치 떼가 대량으로 갑판 위에 착지해서 날치 바비큐 파티를 벌이기도 했고, 보기 힘들다는 반딧불 돌고래 떼와 마주치기도 했으며, 산호 갈매기 떼에 빵가루를 뿌려 주기도 하며 여행길을 만끽했다.
루크는 소매를 여미며 남쪽으로 떠날 채비를 하였다.
“라그나로스 봉인석은 마트리에 있어. 남쪽 끄트머리에 있는 도시이니 대충 한 달쯤 걸리겠군.”
“말을 빌릴까요?”
“아니, 저 사람들도 걸어갈 테니 우리도 걸어가는 게 좋겠지.”
루크는 자신들이 타고 온 상선을 향해 턱짓했다.
상선에선 인부들이 화물을 내리고 있었다. 각 화물은 유통 업자를 통해 운반될 예정이다. 그 뒤를 따라 유통을 맡은 상인과 함께 이동하다 보면 마물이 담긴 상자의 수취인과 마주칠 수 있을 터.
지금 막 마물이 담긴 상자가 유통 업자의 수레 위에 실렸다. 의뢰받은 상인은 상자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도 모르고 인부들을 시켜 산더미 같은 짐 사이에 상자를 밀어 넣었다.
수레 주변에는 호위를 맡은 용병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었다. 그들 모두가 말을 탈 순 없을 테니 걸어서 이동할 것이다.
적당히 거리를 두며 그들의 뒤를 따라 이동하다 보면 데메그리 교의 끄나풀이 있는 곳을 알아낼 수 있을 터.
루크는 회중시계를 열었다가 닫으며 시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장에 들러서 필요한 물건부터 사야겠어. 그 뒤에 황금 열쇠가 있는 곳으로 안내받자고.”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레이아는 올빼미가 머리를 기울이듯 땡그란 눈을 하고선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금 열쇠? 뭘 말씀하시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