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69화 상자에 봉인되어 있던 것(1)
덜컹덜컹.
널찍한 짐칸이 달린 수레가 느릿느릿 산길을 벗어나며 평지에 들어섰다.
짐칸에는 상당량의 짐이 실려 있고, 마부석에선 루크가 고삐를 쥐고 두 마리의 말을 능숙하게 다루었다.
철썩!
“히이이잉!”
마부용 채찍으로 말을 재촉하자 말이 힘찬 울음을 토해 내며 속도를 높였다. 본래 수레에 실려 있던 짐은 그대로 짐칸에 남겨 두었다.
물론 배달해 주려고 남겨 둔 건 아니다. 그럴 시간도 없거니와 배달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다만 마물이 담긴 상자만 덩그러니 싣고 다니면 수상하기 짝이 없을 테니 다른 짐들도 들고 다니는 것이었다.
짐을 잔뜩 싣고 있다곤 해도 걸어서 이동하는 것보단 몇 배나 빨랐다.
기존의 상인 일행은 주변의 호위 무사들이 걸어서 이동했기 때문에 그들의 속도에 맞춰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루크와 레이아의 경우엔 호위 무사가 딸려 있지 않으니 수레 본연의 속도로 달릴 수 있었다.
레이아는 무릎 위에 지도를 펼치고 현재 이동 속도를 대입하여 마트리까지의 소요 시간을 산출해 냈다.
“거리 계산 끝났어요. 무탈하게 이동한다면 예정을 절반 가까이 당길 수 있을 것 같아요.”
“마물을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을 때를 말하는 거겠군.”
“그렇죠, 뭐. 가장 귀찮은 변수는 마물에게 당해서 다치는 경우, 그다음으로 귀찮은 변수는 수레가 파손돼서 짐을 운반하지 못하는 경우겠죠.”
“정확하게 짚고 있군. 굳이 따지면 전자보단 후자 쪽의 변수가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긴 하지.”
“기습을 당하지 않는 이상 수레 근처에서 싸울 일은 없겠죠. 그 부분을 미연에 방지하는 게 제 역할일 테고요.”
“그 부분은 맡기도록 하지.”
“안 그래도 그리 말씀하실 줄 알고 계속 감각을 끌어 올려 두고 있었어요.”
산을 넘어 하니온 왕국의 남부 지방에 들어서자 주변 풍경이 확 바뀌었다.
중부 지방까지는 들판에 자란 밀이 황금빛 융단을 이루고 있었다면, 남부 지방에 이르러선 털갈이 중인 누런 고양이의 몸뚱이처럼 벌판 곳곳에 듬성듬성 황폐한 농토가 섞여 있었다.
참 알기 쉬운 표식이었다.
불안에 떨면서도 남아 있는 자들의 밭은 여전히 경작 중인 거고, 마물에 화를 입은 자들의 밭은 방치되어 황폐화된 것이리라.
벌판을 가로질러 이동하다 보니 마을이 나왔다. 시골이라고 할 정도까진 아니지만 도시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중소규모의 마을이었다.
수레의 속도를 늦추며 마을 안에 들어가니 뭇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한가롭던 분위기가 빨랫줄처럼 팽팽해지며 다들 빗장을 걸어 잠갔다.
눈대중으로 훑어보니 마을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가 걸친 펜던트며 반지, 목걸이 등을 확인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일련의 행동 속에서 루크는 마을 사람들이 만지작거리고 있는 물건의 정체를 유추해 냈다.
“여긴 마물 감지기가 필수 소지품인 거군.”
“일반 영지민이 사기에는 꽤 부담스러운 물건일 텐데 말이죠. 그마저도 1, 2성급을 가려내는 게 고작이고요.”
“농부한테는 1성급 마물이라도 별세계에 존재하는 괴물같이 느껴질 테니까. 목숨값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싸게 느껴지겠지.”
마을 사람들은 감지기에 별 반응이 없는 걸 보곤 눈에 띄게 안심하며 걸어 두었던 빗장을 끌렀다. 적어도 1, 2성급 마물은 아니라는 것이 확인된 셈이다.
감지기에 반응이 없는 것이 확정되면서 마을 전체에 걸린 자체 경계령이 해제되었다.
정작 루크는 주변의 시선 같은 건 일체 안중에 두지 않고 여관 안쪽으로 수레를 몰았다.
“히이이잉!”
고삐를 당겨 두 마리의 말을 세우자 여관 안쪽에서 머리가 반쯤 벗겨지고 복대를 찬, 전형적인 시골 아저씨 인상의 여관 주인이 걸어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하룻밤 묵고 가실 겁니까?”
“1인실 2개와 수레를 댈 공간, 말 두 마리에게 여물을 먹이고 싶은데 말이지.”
요구 사항을 말하자 여관 주인이 자신의 검지에 걸친 반지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가 착용하고 있는 반지 또한 마물 감지기이리라.
마물 감지기에 반응이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대답이 돌아왔다.
“방이야 넘쳐 나다 못해 텅텅 비어 있습니다. 수레를 뒤뜰에 대시면 말은 제가 마구간 안으로 넣어 드리도록 하지요.”
루크는 뒤뜰로 수레를 옮겨 놓고 옆문을 통해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복도 모퉁이를 돌아 계산대가 있는 로비에서 여관 주인과 다시 대면했다.
“1박만 할 건데, 가격은 어떻게 되지?”
“방 두 개에 여물까지 하면… 뭐, 여물은 서비스로 치겠습니다. 8만 루소만 주십시오.”
“마물 감지기값이 장난 아니었을 텐데, 그렇게 막 퍼주면 남는 게 있긴 하나?”
“원래 급한 놈이 지갑 벌린다고 하잖습니까. 자연재해 대비인 셈 쳐야죠. 게다가 오래간만에 들른 손님인데 인색하게 군다고 부자 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후에 마물 다 걷어 내고 나면 입소문이나 내 주십시오.”
마물 때문에 뒤숭숭하긴 해도 영지민들의 정신 상태는 꽤 안정되어 있었다. 게다가 ‘마물을 다 걷어 내고 나면’이라고 언급한 부분에서 언젠간 마물이 모두 사라질 것이란 확신을 가졌단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는 곧 하니온 왕국에서 남부 지방에 지속적으로 토벌대를 투입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걸 희망 삼아 꿋꿋이 제자리를 지키며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는 것이다.
가격에 맞춰 은화를 건네자 여관 주인이 열쇠 2개를 내주었다.
“201호실과 202호실, 나란히 붙어 있는 두 방으로 내드리겠습니다. 따로 더 필요한 거 없으십니까?”
“오늘 저녁 식사와 내일 아침 식사, 그리고 슈탈랭 영지의 근황에 대해 아는 게 있다면 알려 줬으면 좋겠는데.”
“슈탈랭 영지? 거기로 가십니까?”
“배달해야 할 물건이 있어서 말이지.”
“별로 추천 드리고 싶진 않군요. 최근에 남부 지방에서 4성급 마물이 셋이나 돌아다니고 있어서 말이죠. 아직 여기까지 온 적은 없지만 슈탈랭 영지는 엄연히 놈들의 활동 구역 안에 포함되어 있는 곳이라서요. 듣기론 벌써 현지 영지민들의 8할 이상이 피난했다더군요.”
3성급과 4성급 마물은 격이 다르다. 수치상으로는 고작 한 등급 차이지만, 4성급부터는 궤를 달리한다고 보면 된다.
3성급이 마나유저로 치면 중급 수준인데, 4성급은 마나마스터급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마저도 특수 능력에 따라, 환경에 따라 개체별 무력 수준의 변화폭이 극심하다. 때문에 4성급 마물이 마나마스터급이라는 것이 제대로 된 평가인지는 아직까지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펼쳐지고 있는 논란거리였다.
최소 마나마스터로 평가받고 있는 마물이 세 마리나 존재한다고 한다.
여관 주인이 슈탈랭 영지행에 기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4성급이 세 마리인가. 그거 무섭군.”
“그래도 왕궁에서 마나마스터 분들을 토벌에 참가시켰으니 조만간 정리될 겁니다. 손님도 한동안 여기 머무르면서 소탕될 때까지 기다렸다 떠나시는 게 어떻습니까?”
“은근슬쩍 장기 투숙을 유도하는 걸 보면 확실히 장사치인걸?”
“하하하,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루크는 계산대에 올려져 있는 2개의 열쇠를 손에 쥐며 가볍게 흔들었다.
“고마운 말이지만 사양하겠어. 반드시 배달해야 할 물건이라서 말이야.”
* * *
저녁 식사까진 시간이 꽤 남아 있었기에 각자 방에 짐을 풀고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여관 주인에게 추가금을 얹어 더운물을 배달시켜서 몸을 씻고 나니 피로가 한결 가셨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닦고 있던 가운데 레이아가 루크의 방에 찾아왔다.
“저… 오늘도 하실 건가요?”
“어제 오두막에서도 그렇게 해놓고 또 하고 싶나 보지?”
“매일 하는 게 뭐 어때서요.”
“무리하다가 일정에 지장을 주면 곤란해.”
“그 정도로 체력이 없진 않아요. 매일 해 오던 거라서 오히려 쉬는 게 더 찝찝할 것 같아서요.”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오늘도 부탁하도록 하지.”
드래프트 영지를 떠난 이후로 매일 같이 레이아에게 마법 이론을 배우고 있다. 4서클이 되면서 마법 공식 고급편을 익히기 시작했는데, 꽤 난해한 구석이 많아서 혼자서 익히기엔 부담스러운 구간이었다.
레이아는 고급편의 후반부까지 진도를 빼 놓았기에 이제 막 초반부에 들어선 루크의 이해를 도우려고 두 팔을 걷고 나섰다.
모름지기 천재라 불리는 자들은 빼어난 머리로 단박에 이해해 버리기 때문에 풀이 과정을 남에게 전달하는 것엔 서투르기 마련인데, 레이아의 경우엔 마치 교육과 과정을 이수한 것처럼 알기 쉽게 지식을 전해주었다.
“더블 캐스팅은 양손에 각각 다른 마법을 배열하는 걸로도 충분히 가능해요. 근데 따로따로 배열하는 방식에 길들면 트리플 캐스팅, 멀티 캐스팅으로 넘어갈 때 지장이 생기죠. 그러니 더블 캐스팅을 할 때부터 여러 개의 배열을 겹쳐 놓는다는 이미지로 연습해 보세요. 쉽게 말하면 고기랑 야채를 한 냄비에 넣어 스프를 끓여 놓고 먼저 먹고 싶은 재료부터 먹는 거랑 똑같다고 생각하면 돼요.”
“배열이 겹치면 공간이 일그러지지 않아? 그럼 배열이 흐트러져서 캐스팅 실패로 이어질 텐데?”
“거기서 중급편 마지막에 배운 격리 공식을 응용하는 거죠.”
책상 앞에 나란히 앉아 두런두런 마법 공식을 익히다 보니 금세 해가 저물었다.
글자가 빼곡하게 들어찬 종이에 노을빛이 아른거릴 즈음 루크는 저녁 시간 때가 되었음을 알곤 책을 덮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나머지는 시간 나면 또 부탁하도록 하지.”
“마법 이론을 가르쳐 드리고 있으니 저도 가르침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어쩐지 열성적으로 가르친다 싶었는데 자기도 받고 싶은 게 있기 때문이었나 보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게 불의라면 적의를 돌려줄 것이고, 선의라면 호의를 돌려줄 것이다.
그 부분에 있어 루크와 레이아의 신념은 매우 흡사했다.
“검이라도 배우고 싶어진 거야?”
“그게 아니라 시간이 허락되는 선에서 저와 마법으로 대련해 주셨으면 해요. 저 같은 경우엔 높은 경지를 바라볼 수 있는 재능은 있어도 전투에 관련된 재능은 전무해요. 그럴 바엔 전투를 잘하는 사람의 방식을 통째로 암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전투 방식은 사람마다, 그리고 상대하는 대상에 따라 달라져서 경우의 수가 거의 무한에 가까워. 암기로 때울 수 있는 게 아냐.”
“그건 해 보지 않고선 모르죠.”
“힘들 텐데?”
“세상에 안 힘든 일이 있나요?”
“뭐, 정 네 뜻이 그렇다면 고려해 보도록 하지. 일단 지금은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저녁 식사는 지정된 시간에 1층에 있는 식당에서 먹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책상에 올려 둔 책을 배낭에 넣어 정리해 두고, 혹시 모를 도난에 대비해 귀중품과 무기를 챙겨 복도로 나섰다.
한데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차에 진한 피 냄새가 전해져 왔다. 동시에 여관 바깥의 거리에서 요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땡땡땡땡땡!
“꺄악!”
“도망쳐! 집 안에 있다간 다 죽어!”
“적안… 적안의 사자가 나타났다!”
마물의 등장에 온 동네가 혼란에 빠졌다. 들려오는 소리로 짐작하건대, 문을 걸어 잠그는 걸로는 턱도 없는 등급의 마물이 들어온 모양이다.
1층에 있던 여관 주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관 주인은 세고 있던 돈을 내팽개치며 부랴부랴 도망치려 하였다.
“손님들! 뭐 하고 계십니까! 얼른 뛰세요! 4성급 마물이 나타… 커헉!”
“쿠워어어어!”
여관 주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렬한 포효가 울려 퍼지며 고막을 뒤흔들었다. 포효에 마기가 담겨 있음을 직감한 루크와 레이아는 즉시 실드를 둘러 몸을 보호했다.
그러나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여관 주인은 귀에서 피가 흐름과 동시에 흰자위가 드러나며 즉사했다.
터벅터벅.
더불어 포효를 내지른 장본인이 느긋하게 인육을 즐기고자 여관 안으로 들어와 여관 주인의 시신에 접근했다.
적안의 사자라 했던가.
목덜미에선 농밀한 마기가 갈기털처럼 피어오르고 있고, 몸집은 황소보다도 컸으며 꼬리에는 9마리의 뱀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루비를 박아 넣은 듯 핏빛 안광이 일렁이는 눈동자까지.
그야말로 적안의 사자란 별칭에 어울리는 외견을 갖춘 마물이었다.
적안의 사자는 여관 주인의 살점을 뜯으려다가 계단 중앙에서 실드를 두른 채로 서 있는 루크와 레이아를 발견했다.
“크르르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