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70화 상자에 봉인되어 있던 것(2)
4성급 마물답게 풍기는 기세가 남달랐다. 허기가 져서 신경이 예민한지, 아니면 자신의 공격에 죽지 않은 자가 있다는 것이 탐탁지 않은지 살벌한 안광을 번뜩였다.
사자의 눈에서 안광이 더욱 짙게 흘러나오고, 목덜미에서 갈기털처럼 피어오르고 있는 마기의 양이 불어나며 공격 의사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하지만 안광과 갈기는 어디까지나 눈속임에 불과할 뿐.
루크는 사자의 과장이 진짜 공격을 숨기기 위한 행동이란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일렁이는 마기 너머에서 뱀으로 이루어진 꼬리가 한껏 수축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몸을 뻗을 것처럼 말이다.
“내가 벨 테니 엄호해.”
루크는 레이아에게 지시를 남기며 계단 난간을 밟고 높이 뛰었다.
예상대로 진짜 공격은 사자의 꼬리에 있는 9마리의 뱀이었다. 꼬리를 이루고 있는 뱀들은 허공에 떠 있는 루크를 향해 쇄도하였다.
쉐에에엑!
꼬리의 뱀들이 아가리를 벌리자 송곳처럼 날카로운 독니가 드러났다. 독니에서 독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으로 보아 물리면 어떻게 될지 쉬이 예상할 수 있었다.
9마리의 꼬리 뱀이 사방으로 산개하여 독니를 들이대고 있다.
허공에 떠 있는 상태로는 도저히 피할 구석이 없었다.
하지만 마법을 쓴다면?
“블링크.”
루크의 신형이 사라지며 꼬리의 뱀들이 허공에서 이빨을 부딪치며 맨 공기를 씹었다. 동시에 보조를 맞추듯 레이아가 주문을 영창 했다.
“프로즌 오브!”
레이아의 손에서 반투명한 하늘색 구체가 사출되며 꼬리의 뱀들을 향해 뻗어 갔다.
냉기를 품은 구체는 뱀들에게 부딪혔으나 유령이 벽을 통과하듯 뱀들을 관통하여 지나갔다. 스쳐 지나간 모든 것을 얼리는 마법답게 프로즌 오브에 관통당한 꼬리의 뱀들이 삽시간에 얼음 가루로 화했다.
그 순간, 블링크를 쓴 루크는 사자의 옆구리에서 나타났다. 한달음에 놈의 측면을 점하고선 지체 없이 발검했다. 검이 검집의 안쪽 면을 긁으며 빠져나옴과 동시에 마나 블레이드가 발현되었다.
3성급과 다르게 4성급은 지니고 있는 역량 자체가 남다르니 본래 힘을 모두 발휘하기 전에 끝을 보고자 했다.
그러나 역시 4성급인지 마냥 당하고만 있진 않았다.
적안의 사자는 날렵하게 몸을 틀더니 머리를 들이밀어 루크의 검을 깨물었다.
까드드드득!
사자의 이빨이 검날을 긁으며 손톱으로 칠판 긁는 듯한 소리가 귀를 괴롭혔다.
제 스스로 입안에 검을 들였으니 마나 블레이드에 의해 내부가 엉망진창으로 갈려 나갈 것이다. 그러나 생각과 다르게 마나 블레이드는 놈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쓰으으읍.”
사자가 숨을 한껏 들이켜자 검에 맺혀 있던 마나가 놈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에 따라 검에 맺힌 마나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사자의 목덜미를 따라 치솟은 마기의 양이 더욱 증가했다.
다른 이의 마나를 흡수하여 제 것으로 소화해 버린 것이다.
마나 흡수, 마나를 마기로 전환.
이 두 가지 능력이 적안의 사자가 지닌 특수 능력이었던 것이다.
마기를 보충한 사자는 사라졌던 꼬리의 뱀을 재생하였다. 그러고는 턱에 힘을 주어 마나가 사라져서 강도가 약해진 검을 물어 으깼다.
콰직!
“더블 캐스팅! 그래비티! 길로틴!”
검을 잃은 루크를 원호하기 위해 레이아가 더블 캐스팅을 시전했다.
일정 범위의 중력을 높여 상대방을 찍어 누르는 마법 그래비티가 사자의 육체를 억눌렀고, 사자의 몸 주변에 마나로 이루어진 단두대의 날이 떨어졌다.
오우거를 무릎 꿇릴 정도로 강한 압력을 자랑하는 중력 마법이건만 적안의 사자는 평소와 다름없는 몸놀림을 구사했다. 놈은 중력의 영향 따윈 전혀 받지 않는 것처럼 뒤로 한 발짝 물러나며 단두대의 날을 피해 냈다.
“크르르르.”
적안의 사자는 마나로 이루어진 단두대를 흡수하려는 양 단두대의 기둥을 노리고 아가리를 벌렸다.
더 이상 놈에게 힘을 더해 줄 순 없다고 판단했는지 레이아는 잽싸게 길로틴 마법을 해제하려고 했다.
그러나 루크가 그녀의 행동을 제지했다.
“해제하지 말고 그대로 놔둬!”
“아! 그러면 마나를 더 부여해 둘게요!”
찰나에 루크의 의도를 알아차린 레이아가 마나 단두대에 마나를 더욱 불어넣었다.
적안의 사자는 설탕이 한껏 가미된 막대 과자를 먹듯 마나 단두대를 씹어 먹었다.
와득! 와득!
그 틈을 타서 루크가 반토막 난 검에 마나를 부여하여 사자의 옆구리를 향해 마나 블레이드를 뻗었다.
아까와 같은 패턴을 반복할 셈이냐는 양 사자의 코에서 긴 숨이 뿜어져 나왔다. 그 모습이 마치 콧방귀를 뀌는 것 같았다.
적안의 사자는 몸을 틀며 아까같이 이빨로 검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숨을 들이마시며 마나를 한껏 빨아 당겼다.
마나를 흡수하는 적안의 사자를 두고 루크는 우유를 먹는 길고양이를 보듯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확실히 남이 차린 음식이 맛있긴 하지. 많이 있으니 사양하지 말라고.”
루크는 검에 흡수당한 만큼 계속 마나를 부여했다.
이게 웬 떡이냐 싶어 마나를 한껏 흡수하던 적안의 사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마나를 흡수하고 있는 건 좋은데 끝이 안 보인다.
마나를 마기로 전환하는 속도가 유입되는 마나양을 감당하지 못하여 몸 안에 마나가 축적되기 시작했다. 궁여지책으로 흡수한 마나를 방출했는데도 쌓이는 양이 더 많았다.
이대로 가다간 마나를 과잉 흡수하여 마나 폭주가 일어날 터.
사자의 확장된 동공에 현재 놈이 품고 있는 생각이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었다.
-뭐 이딴 놈이 다 있어? 대체 마나가 얼마나 많은 거냐고!
뭐든 과식을 하면 탈이 생기는 법.
마나 폭주의 낌새를 감지한 적안의 사자가 다급하게 특수 능력을 해제하며 마나 흡수를 멈췄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루크가 검에 마나를 더 부여했다.
“네가 입에 뭘 물고 있었는지 잊어버렸나 보지?”
아차!
적안의 사자가 뒤늦게 검을 뱉어 내려 했으나 이미 루크의 검에는 다시금 마나 블레이드가 생성되었다.
마나 블레이드는 커튼의 끝자락처럼 한없이 나풀거리며 사자의 입안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즈즈즈즈즉!
더불어 루크가 마나 블레이드를 몸 안쪽으로 좀 더 집어넣어 휘갈기니, 적안의 사자가 몸을 부르르 떨며 휘청거렸다.
반토막 난 검을 놈의 입안에서 빼내자 적안의 사자는 이미 회생이 불가능한 지경으로 바닥에 쓰러졌다.
쿠웅!
루크는 반토막 난 검을 바닥에 버리며 저린 손을 흔들었다.
“확실히 4성급부턴 다르군.”
뒤이어 레이아가 계단에서 내려와선 여관 주인의 상태를 살폈다. 그의 가슴에 귀를 대어 심장 소리를 확인해 보았으나 이내 머리를 들며 이미 늦었다는 양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타깝지만 손쓰기엔 이미 늦은 것 같아요. 처음의 포효가 한 번 더 시전됐다면 저희도 위험할 뻔했어요.”
“나도 그걸 경계하고 입을 못 벌리도록 공격한 거였어. 흐음, 포효 범위 안에 있던 생물이 다 죽었다면 곤란하게 됐군.”
“왜요?”
“우리가 타고 온 말도 죽었을 테니까.”
“아!”
상인을 가장하려면 수레를 끌 말이 필요하다.
포효의 범위 안에 있던 생물이 다 죽었다면 마구간에 있던 말도 죽었을 테니 더 이상 상인을 가장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여관의 뒤뜰로 가서 마구간을 확인해 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말들도 마기가 담긴 포효를 이겨 내지 못하고 절명해 있었다.
레이아는 죽은 말들의 눈을 감겨 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 계획은 포기할 수밖에 없겠네요. 말이 없어선 더 이상 상인 구색을 맞추기 힘들 테죠. 그래도 주소를 알아뒀으니 차선책을 시행할 순 없을 거예요.”
원래는 상인을 가장하여 데메그리 교 소굴에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상인으로 가장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지금, 놈들의 소굴 근처로 가서 틈을 엿보다가 급습하는 것으로 계획을 바꾸었다.
어느 쪽이 편하냐면 단연 전자가 편하다. 내부로 파고들어 적의 전력을 확인하고 싸우는 것과 아무런 정보 없이 급습하는 건 천지 차이였다.
정보가 부족한 상황 속에서 공세를 펼치는 건 취향이 아니긴 하나, 현재로선 별수 없었다.
그래도 새로운 계획이 마냥 안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상인을 가장하지 않아도 되기에 육로를 고집하지 않아도 되었다. 파이를 타고 이동하면 기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을 터.
루크는 앞섶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파이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파이, 아무래도 네가 나서야겠다. 비행 준비해.”
“난다! 날아!”
시체가 그득한 마을에서 자기도 찝찝하니 그냥 날밤을 새우고 파이를 이용해 이동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떠나기 위해 방 안에 놓아두었던 짐을 가지러 가던 순간.
수레 위에 얹혀 있던 상자 하나가 크게 들썩였다.
덜컹! 덜컹! 덜컹!
마물이 실린 상자였다.
상자 안쪽에서 봉인되어 있던 마물이 깨어나기라도 한 걸까?
오늘 일어난 사건 중 봉인되어 있던 마물에게 영향을 줄 요소라곤 하나밖에 없었다.
“사자의 포효가 봉인을 깨뜨렸나 보군.”
“그것보다는 포효 때문에 위험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봉인을 푼 것 같아요.”
“상자가 부서질 것 같은데 말이야. 결계는 계속 유지되고 있는 거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적어도 바깥에서는 결계를 건 자만 열 수 있도록 되어 있었어요.”
“내부에서 직접 상자를 부수고 나오는 것까지 막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른다는 거군.”
덜컹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지면서 상자도 함께 흔들렸다.
아직은 결계 때문에 외부에서 상자 안의 마물을 제압하는 건 불가능했다. 루크와 레이아는 상자의 상태를 유심히 살피며 만약의 사태가 벌어졌을 시 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마나를 끌어 올려 두었다.
잠시 후 덜컹거림이 멈추었다. 결국 마물이 결계를 뚫지 못하고 지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그리 생각한 것도 잠시뿐, 나무 상자에 날카로운 것으로 베어 낸 듯한 금이 생기며 상자가 반으로 갈라졌다.
서걱!
상자 안에서 나타난 것은 보랏빛 검신을 지닌 장검이었다.
누가 쥐고 있는 것도 아닌데 제 스스로 움직이며 공중을 부유하고 있었다.
모름지기 마물이란 특정 생물에 마기를 억지로 주입하고 흑마법을 걸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괴물을 말한다.
하지만 검은 생물이 아니다.
루크와 같은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레이아는 짐작 가는 바가 있는지 입을 열었다.
“옛날에 무생물을 마물화하는 연구가 진행된 적 있었다고 들었어요. 생물인 마물에게 무생물인 무기형 마물을 쥐여서 무력을 강화할 요량으로 연구를 진행했다던데, 아무래도 그중 하나인 것 같아요.”
“바꿔서 말하면 특수 능력을 가진 무기란 거군.”
“네, 그렇죠. 엥? 잠시만요. 설마 저걸 무기로 삼으려는 건 아니죠?”
“길고양이 때문에 검이 부러졌으니 새 무기를 구해야지.”
“무생물이라곤 해도 마물의 본능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요. 무기로 삼기엔 위험부담이 커요.”
“그거야 해 보지 않으면 모르지.”
말하는 동안 마검의 검날이 루크에게로 향했다.
마검은 본능에 따라 가장 가까이에 있던 인간을 베고자 루크에게 날아들었다.
루크는 마검의 궤적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몸을 살짝 옆으로 비틀었다. 날아들던 마검이 루크의 코앞을 스쳐 지나갔다.
검 자루가 머리 옆을 지나칠 즈음 루크가 손을 뻗어 잡아채었다.
난데없이 자루를 잡힌 마검이 검신을 마구 흔들며 발광하려던 순간, 루크는 짧은 기합을 토해 내며 마검을 땅바닥에 냅다 내리꽂았다.
“흐읍!”
카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