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71화 상자에 봉인되어 있던 것(3)
약간의 저항이 느껴지더니 보랏빛 검신이 땅속에 틀어박혔다.
마검의 강도와 예리함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 주는 광경이었다.
그와 함께 루크에게 마검을 쥔 부작용이 발생했다. 마검은 마치 루크를 숙주로 삼으려는 양 검 자루에서 마기를 뿜어내어 루크의 손을 뒤덮었다.
피부를 통해 스며든 마기가 징검다리 역할이라도 맡은 듯 마검의 마기 회로가 루크의 몸속에 침투해 왔다.
마검의 마기 회로는 루크의 마나 회로와 결합하여 마치 한 몸이라도 된 것처럼 뿌리를 내렸다.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리는 감각에 루크의 입에서 옅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크윽.”
옆에서 레이아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루크를 바라보며 자신이 아는 지식을 총동원했다.
“혹시 마검이 회로를 강제로 융합했나요? 만약 그런 거면 숙주의 이성을 없애고 죽을 때까지 싸우게 하는 능력을 가진 걸 거예요. 가진 마나로 마기를 밀어내고 융합한 부위를 중화시키세요. 그다음에 그 부위를 끊어 내면서 검을 놓으셔야 해요. 제가 옆에서 마검을 누르고 있을게요.”
그러면서 마검이 날뛰지 못하도록 그래비티 마법으로 마검을 억누르며 보조에 나섰다.
역시 마검을 무기로 삼는 건 무리였나.
회로끼리 융합된 부위를 중화시켜 끊어 낸다고 해도 다시 검을 쥐면 같은 상황이 반복될 것이다.
검 한 자루를 얻자고 위험을 감수할 순 없지 않은가.
루크는 레이아의 유도를 따라 오른손에 대량의 마나를 불어넣었다. 아까 적안의 사자를 상대하며 상당량의 마나를 소모했음에도 루크의 마나는 아직 절반도 소모되지 않은 참이었다.
회로끼리 융합된 부분에 마나를 밀어 넣던 가운데, 문득 루크의 뇌리에 한 가지 가설이 스쳐 지나갔다.
“이거 하나만 확실히 해 두자고. 회로를 중화시키면 어떻게 되지? 그 회로는 내 것이 되는 건가?”
레이아는 루크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간 것을 보고선 하니온에 오기 직전에 제랄드가 한 말을 떠올렸다.
‘백작님의 입꼬리가 올라갈 땐 특히 조심해 주십시오. 워낙에 독특하신 분이신지라……. 뭐, 말린다고 듣는 분이 아니니 괜히 말리느라 기운을 낭비하지 말고 마음의 준비나 하고 계시면 됩니다.’
루크의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기에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혹시 마검에 깔려 있는 회로를 흡수하시려는 거예요?”
“역으로 마검에 내 마나를 투입해서 모든 회로를 중화시키고 서클을 생성할 때의 요령으로 마나 회로를 움직여서 내 몸으로 끌어당기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마검이 가진 회로 융합 특성에 마법사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서클 생성의 이치를 가미하여 자신의 마나 회로를 늘릴 요량이었다. 마검이 회로를 융합하여 숙주를 조종한다면 그 반대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구체적인 방법을 들은 레이아는 머릿속으로 가능성을 계산하고는 아까보다 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말해 봐.”
“이론적으로는 가능해요.”
“현실적으로는?”
“중화시키는 데 엄청난 양의 마나가 필요해서 보통 사람은 불가능한 일이죠.”
“보통 사람이라면 말이지.”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갖춘 레이아의 의견도 들었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루크는 전신의 마나를 한껏 끌어모아 오른손에 집중시켰다. 융합된 부위를 통해 들어오던 마기는 루크의 마나를 감당하지 못하고 밀려났으며, 역으로 루크의 마나가 마검으로 흘러 들어갔다.
마검의 마기 회로는 루크의 마나가 높아지고, 마기의 농도는 낮아지면서 중화되었다. 그리고 중화된 회로는 어김없이 마나 회로로 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나 회로의 비율이 급격히 높아졌다. 흙탕물에 계속 맑은 물이 흐르면 언젠가는 맑은 계곡이 되는 것처럼, 마기에 찌들어 있던 회로는 지속적으로 투입되는 청량한 마나의 흐름에 묵은 때가 벗겨지며 마나 회로로 바뀌었다.
마검 내부의 모든 회로가 마나 회로로 중화된 후 루크는 곧바로 마법사가 서클을 생성하는 이치를 가미했다.
마검 내부에 있는 회로 끄트머리에 마나를 집중하며 벽을 밀어냈고, 여전히 이어져 있는 징검다리를 통해 몸 안으로 회로를 옮겼다.
새로이 합류한 마나 회로는 원래 루크의 회로였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정착했다.
루크가 일련의 작업을 마치고 눈을 뜨니 주변이 어두워져 있었다.
기다리다 지친 레이아는 여관 뒷문의 처마 밑에 쭈그려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말이다.
어찌나 잘 자고 있는지 몸이 자꾸 옆으로 기우는 것도 모른 채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루크는 그녀에게 다가가 몸이 기울고 있는 방향으로 슬쩍 밀었다.
“어이, 끝났어. 일어나.”
레이아가 화들짝 깨며 넘어지려는 몸을 가누려고 팔을 허우적거렸다.
“어어어? 아코!”
열심히 팔을 저어 봤지만 잠기운이 덜 가신 탓에 쓰러지는 걸 면치 못했다.
그녀는 로브에 묻은 흙먼지를 털며 몸을 일으켰다.
“좀 곱게 깨워 주시지.”
“그렇게 자고 있으면 누구나 밀어서 깨우게 되어 있어.”
“네네, 그러시겠죠. 그나저나 회로 흡수는 어떻게 됐어요?”
“전부 흡수했어.”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실현시켜 버리니 할 말이 없네요. 특수 능력 쪽은 어때요?”
“회로를 흡수하니까 평범한 검이 되어 버리더군. 특수 능력이 포함된 무기를 얻을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말이지.”
“능력이 남아 있으면 그건 그거대로 곤란하죠. 루크 씨가 이성을 잃으면 막을 사람이 있긴 하겠어요?”
“그것도 그렇군. 어떻게 할래? 예정보다 시간이 늦었는데 이대로 파이를 타고 갈까? 아니면 깨끗한 건물이라도 찾아서 자고 갈까?”
“아무래도 여기서 자고 가는 건 좀 그렇죠. 혹시라도 하니온 왕국의 토벌대가 들르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지기도 하고요.”
“그럼 출발하는 걸로 하지. 파이, 준비해.”
“늦어! 늦어!”
기다리다 지쳤다는 말을 압축하여 내지르고선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파이었다.
루크가 먼저 파이의 등에 올라탔고, 뒤이어 레이아가 바로 뒤에 앉았다.
첫 비행인 레이아는 안장조차 없는 탓에 어딜 잡아야 할지 몰랐다.
“처음이라서 그런데 어디를 잡아야 하는지 알려 주시지 않겠어요?”
“허리 잡아. 네 악력으로 깃털 잡고 버티려 했다간 휩쓸려 떨어질 테니까.”
“아, 그럼 실례 좀 할게요.”
“떨어지지 않게 있는 힘껏 붙들어.”
레이아는 루크의 넓은 등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옆구리에 팔을 쑤욱 집어넣어 꽉 끌어안았다. 뺨을 등에 딱 붙이니 단단한 등 근육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와 함께 파이가 날갯짓하며 쉴 새 없이 깐족거렸다.
“개이득! 개이득!”
속내를 들킨 사람처럼 레이아가 다리로 파이의 옆구리를 찰싹찰싹 걷어찼다. 더불어 괜히 저 혼자 무안해져선 주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요, 만약에 데메그리 교 소굴에도 비슷한 물건이 있으면 또 흡수할 건가요?”
“차려진 밥상을 마다할 필욘 없지.”
“역시나.”
“사자 녀석과 싸우느라 마나를 많이 소모해서 그런지 흡수하는 데 오래 걸리더라고. 마나가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면 좀 더 빨리 흡수할 수 있었을 거야.”
“아뇨, 시간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이미 정점이신데도 더 위를 바라보시는구나 싶어서요.”
“정점이라… 인간만 따진다면 그렇겠지.”
세상은 넓고 강자는 많다.
인간 사이에서도 아직 실력을 감추고 있는 자가 있을지도 모르고, 인간에 국한시키지 않으면 그 숫자는 더욱 많아진다.
그러니 재능에 안주하지 않고 위를 바라보는 건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루크의 야망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모르는 레이아로선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 * *
파이를 타고 이동한 덕에 예정보다 훨씬 빨리 슈탈랭 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슈탈랭 영지의 첫인상은 생각한 것과는 많이 달랐다.
슈탈랭 영지는 마트리와 산 몇 개를 두고 떨어져 있는 남부 지방 끝자락의 영지다. 마트리가 이미 마물들 때문에 초토화되었으니 인접해 있는 슈탈랭 영지도 혼란스러워도 이상할 게 없다.
그러나 실제로 와 보니 마물이 득실거리는 지역에 있는 것치곤 너무 평화로웠다.
사람들은 외지인이 방문했는데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본인의 일과에만 집중하고 있었으며 여기저기서 이웃끼리 수다를 떠는 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전에 들렀던 마을과는 180도 다른 풍경이었다.
루크는 지나가던 행인에게 말을 걸어 수첩에 적혀 있던 주소를 물었다.
“실례지만 길 좀 묻겠습니다. 물레방아가 있는 언덕 위에 하얀 건물이 있다고 들었는데, 어딘지 아십니까?”
“하얀 건물이라면… 아~ 아슈타르 교 슈탈랭 지부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저기 저 언덕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아슈타르 교라면 대륙에서 가장 보편적인 종교이자 각 왕국의 공식적인 종교로 선정된 교단이다.
데메그리 교를 이단으로 선정한 자들인지라 둘은 앙숙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아슈타르 교로 위장한 걸지도 모른다. 누구라도 데메그리 교가 아슈타르 교의 교리를 읊으며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못할 테니까. 데메그리 교 입장에선 가장 이용하기 좋은 위장 신분인 셈이었다.
루크는 가벼운 목례로 감사를 표하며 레이아와 함께 물레방아가 있는 언덕 위로 올라갔다. 언덕 꼭대기에는 새하얀 담장에 둘러싸인 신전이 나왔다.
철창으로 된 정문 사이로 안뜰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꺄르르! 하지 마~ 하지 말라니까.”
“사제님! 제가 내 거 안 돌려줘요.”
“자자,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야지.”
겉보기에는 신전에서 사제들과 고아들이 한가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진상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저 모습마저도 위장의 일부분이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칠 따름이다.
안에 들어갈 수 있을지 시도해 보기 위해서 정문 가까이 다가섰다. 그런데 정문에 닿기도 전에 보이지 않은 벽에 부딪혔다.
띠잉!
이마에 통증이 번졌다.
보폭의 차이 때문에 살짝 뒤처진 채로 따라오고 있던 레이아는 걸음을 우뚝 멈추며 보이지 않는 벽을 손으로 쓸었다.
“결계네요. 그것도 꽤 수준급 결계예요.”
“어쩐지 주민들이 모두 태평하다 싶더니 유사시에 신전을 피난처로 사용하고 있었나 보군.”
“데메그리 교 소굴인 것치곤 굉장히 이타적이네요.”
“그것마저도 위장일지도 모르지. 적어도 마검의 도착 예정지는 여기가 맞아. 마검을 담아 둔 상자에 결계를 걸어 둔 자가 이곳의 결계를 만들었다고 가정하면 앞뒤가 들어맞지.”
“들여보내 줄까요?”
“모르지. 일단 시도나 해 보자고.”
때마침 결계 안에서 외지인의 방문을 알아차렸는지 사제 한 명이 정문 쪽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납득할 만한 이유가 그리 쉽게 떠오르지 않았지만 루크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그럴싸한 이유를 청산유수로 읊었다.
“다름이 아니라 이곳에 물건을 배달하기로 되어 있던 상인입니다. 근데 오다가 사고가 생겨서 물건을 잃어버렸지 뭡니까. 사정을 설명하고 위약금 문제를 논하고자 어렵게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거 유감이군요. 일단 안에 들어가서 높으신 분들께 여쭤 보겠습니다.”
“먼 길을 와서 그런데 안에서 쉬면서 기다려도 되겠습니까?”
“죄송합니다만 안전 문제 때문에 마물이 오는 게 아니면 출입을 제한하고 있어서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물 한잔 얻어 마시는 것도 어려울는지요?”
“정말로 원칙상 열어 주면 안 되어서 말이죠. 야박한 대답을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상인으로 머무는 것이 안 되면 둘러보며 빈틈이라도 찾으려 했는데, 완강히 출입을 거부하는 걸 보니 이것도 어려울 것 같다.
눈이 쌓인 언덕 위의 눈덩이가 아래로 구를수록 점점 덩치가 커지듯 적안의 사자와 마주친 것이 일을 꼬이게 만들어 버렸다.
사제가 안으로 들어가면서 정문에 루크와 레이아만 남게 되었다.
레이아는 행여나 안에 들릴까 싶어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곤란함을 표했다.
“포효 때문에 말이 죽은 게 아쉽네요.”
“말이 죽지 않았더라도 마검의 봉인이 풀려서 배달은 무리였겠지. 적안의 사자가 그 마을에 흘러들어 오면서 완전히 꼬였어.”
“이제 어쩌죠?”
“억지로라도 열게 해야지.”
평소에 출입을 제한한다는 것은 마물이 오면 피난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결계를 개방한다는 뜻일 터.
그러면 해답은 간단하다.
마물을 이 마을로 데려오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