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72화 라그나로스 계획서(1)
잠시 기다리자 신전 안쪽에서 사제가 달려 나와 윗사람의 의견을 전달했다.
“여쭤 보니 위약금은 됐으니 걱정 마시고 돌아가시랍니다. 그래도 먼 길 오셨는데 쉴 곳조차 마땅치 않은 게 마음에 걸려서 그러니 마을의 촌장님을 찾아가 보십시오. 신전에서 소개받았다고 하면 극진히 대접해 드릴 겁니다. 원칙이라곤 해도 야박하게 굴어 정말로 죄송합니다.”
위약금을 물지 않아도 될 것은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신전 안팎으로 물건이 오가려면 결계를 풀어야 하는데 고작 돈 몇 푼 때문에 결계를 풀 리 없으니 말이다.
루크는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대신하며 레이아와 함께 신전에서 멀어졌다. 그러자 레이아가 입을 열었다.
“아까 보니까 옆문이 있었어요. 옆문치곤 크기가 정문만 하던데 거기로 매일 식자재를 운반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거기라면 노려볼 법할지도 몰라요.”
“신전 안뜰 구석을 못 봤나 보군. 안뜰 구석에 밀 포대와 야채가 쌓여 있었어. 사람 머릿수가 많아도 2, 3주는 너끈히 먹을 양이었지.”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네요.”
“그런 셈이지.”
사제가 제 입으로 힌트를 제공했다.
마을에 마물이 들이닥치지 않는 이상 결계를 여는 일은 없다고.
그렇다면 마물을 데리고 오면 될 일이다. 끌고 올 마물이라면 이 근방에 널렸고, 루크 일행에겐 적당한 마물을 선별하여 한 마리만 데리고 올 재량이 있었다.
루크는 로브 안주머니가 있는 부분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나와, 일할 시간이야.”
로브 앞섶 사이로 파이가 머리를 빼꼼 내밀며 두리번거렸다.
“귀찮! 귀찮!”
“고작 하루 비행한 거 가지고 우는 소리라니, 창천 앵무란 이름이 아깝군.”
“덤벼! 덤벼!”
“그래, 그만한 기운이 있으면 일할 수 있겠지.”
“능구렁이! 능구렁이!”
“말장난은 됐고 멀리 날아가서 적당한 마물 한 마리만 잡아 와. 최대한 이동 속도가 느린 놈 잡아 오는 거 잊지 말고.”
파이는 앙탈을 부리듯 부리로 루크의 쇄골을 가볍게 툭툭 두드리고선 하늘로 날아올랐다. 저래 봬도 사람 못지않게 똑똑한 녀석이니 사람의 이목이 없는 곳에서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막간을 이용하여 루크와 레이아는 거목 아래에 나란히 등을 기대고 앉았다.
언덕 아래에 펼쳐진 하얀 담장과 푸른 지붕의 집은 잔잔한 파도를 연상하게 하고, 집마다 설치해 둔 갈매기 모양의 풍향계가 실제 갈매기를 대신하여 추상적인 파도 위에서 한가로이 날갯짓하고 있었다.
레이아는 로브 후드를 뒤로 젖히며 옆에 앉아 있는 루크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우측으로 45도 위, 그녀가 항상 루크를 쳐다보는 각도다.
항상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어디에 시선을 두고 있는지 알기 힘들고, 여행 중 본인이 직접 면도를 할 땐 좌측 입가의 끄트머리에 수염이 살짝 남아 있는 탓에 자꾸만 그리로 눈길이 간다.
가느다란 금발은 평소엔 왼쪽으로 쓸어 넘기는데, 로브 후드를 쓰고 나면 항상 앞머리가 푹 눌려서 눈썹과 맞닿는다.
어색하게 생각했던 나날이 우스울 정도로 이제는 친숙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무슨 생각 중이세요?”
“슈탈랭 신전에 다녀오니 몇 가지 의문점이 생겨서 말이야.”
“그렇긴 하죠.”
“추임새야, 아니면 정말로 의문이 있어서 말하는 거야?”
“당연히 후자 쪽이죠. 슈탈랭의 영주와 관련된 부분을 말씀하시는 거 아닌가요?”
“후우.”
“왜요?”
“다른 사람들도 조금은 본받았으면 해서 말이지.”
“또 그러신다. 적재적소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런 걸로 해 두지. 네 말대로 슈탈랭의 영주가 신전을 이용하고 있지 않은 부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
마물이 거의 침범하지 않고, 설사 침범하더라도 뚫리지 않는 결계를 갖추고 있다.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로선 분명 이용하지 않고선 못 배길 마을이다.
한데도 영지에 병사 등 영주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수비대라고 해 봤자 마을 청년들끼리 모여서 만든 자경대가 전부다.
“영주가 이미 죽었을 경우는요?”
“죽었다면 더더욱 이해가 안 되지. 죽을 정도로 위험했다면 진즉에 신전을 이용했을 테니까. 적어도 아직은 살아 있다고 봐야겠지.”
“이용하고 싶어도 못한다. 그렇게 봐야겠네요. 하지만 신분으로 따지면 귀족이 사제보다 높아요. 영주가 직접 명령을 내리면 사제들로선 따를 수밖에 없을 텐데… 왜 이용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하니온 왕국 내에서 아슈타르 교의 입지가 어느 정도인지 알 것 같군.”
영주가 신전을 이용하고 싶어도 못하는 건 종교인의 권력이 그만큼 강하다는 방증이다.
놀랄 일도 아니다.
종교가 강세를 보이는 현상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늘 있어온 일이니까.
레이아가 하나둘씩 정보의 퍼즐을 맞춰 가는 가운데, 문득 루크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졌다.
고개를 들어 루크의 얼굴을 살피니 어느새 눈을 감고 자고 있었다.
레이아는 무릎을 끌고 안으며 시선을 루크에게 고정하고선 흐뭇한 미소를 띠었다.
“피곤하실 만도 하지.”
레이아가 알기로 루크는 하니온 왕국에 도착한 이후부터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
마물과 싸우고, 수레를 몰고, 파이를 조종하여 비행까지 했다. 게다가 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밤마다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게 루크에게 있어선 자연스러운 행동인 것이다.
고생을 자랑하는 건 촌스럽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 테지.
그런 점까지 포함해서 인간적으로 존경할 만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망나니 시절이란 게 있긴 했던가 싶을 정도로.
앉은 자세로 자던 루크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레이아는 저도 모르게 몸을 그쪽으로 기울이며 어깨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무의식중에 자기 어깨에 기대 줬으면 하고 바란 걸 자각하곤 얼굴을 붉혔다.
‘나도 참,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닿을 듯 말 듯한 거리감 속에서, 풋내 섞인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모처럼의 휴식에 정취를 더해 주었다.
* * *
투웅!
하늘에서 한 청년이 떨어지며 마을 어귀의 다리 위에 곤두박질쳤다.
아득히 높은 위치에서 떨어졌건만 청년은 다리가 골절된 것 외에는 멀쩡했다.
왜냐하면 겉으로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알맹이는 마물이기 때문이다.
“크윽, 빌어먹을 새 새끼 같으니. 다짜고짜 낚아채서 이딴 곳에 떨어뜨리다니, 무슨 속셈인 거지? 아무튼 한 번만 더 마주쳐 봐라. 갈기갈기 찢어 주겠어.”
평소처럼 배를 채우기 위해 산속을 어슬렁거리며 화전민촌을 찾던 중이었다.
며칠 동안 헤맨 끝에 겨우 화전민촌을 발견했다 싶었는데, 웬 검은 깃털을 지닌 거대한 새 한 마리가 나타나선 발톱으로 그를 낚아챘다.
발톱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마물 형태로 변하면 몸이 뚫릴 것 같아 시도조차 못하고 한참 떨어진 마을까지 끌려왔다.
청년은 비틀거리면서 겨우겨우 몸을 일으켰다.
“크흐흐, 차라리 잘됐을지도. 여기저기서 맛있는 냄새가 진동하는구나.”
청년의 피부가 검게 물들면서 몸의 형태가 바뀌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청년의 모습이었으나 이내 곧 이족으로 보행하는 말의 모습이 되었다. 겉보기엔 말이 두 발로 선 것 같으나 입속에 상어 같은 이빨 수백 개를 감추고 있었다.
다리가 다친 것은 마물로 돌아가도 이어지는지 여전히 한쪽 다리를 절뚝였다.
“쳇, 맘 편히 뛰지도 못하는군. 하필 다리부터 떨어지도록 던질 게 뭐람.”
마물의 등장은 곧 마을 사람들에겐 비상사태로 다가왔다.
땡땡땡! 덜그럭! 땡땡땡! 덜그럭!
하니온 왕국의 남부 지방에는 어느 마을이나 마물의 침입을 알리는 종이 설치되어 있다. 다만 슈탈랭 영지에 오랫동안 마물의 침입이 없어 종을 계속 방치해 둔 탓에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섞여서 울려 퍼졌다.
마을 사람들은 예고 없이 들이닥친 마물의 존재에 놀라 다급히 물레방아 언덕으로 몸을 피했다.
“마물이 왔다고? 어디야? 어디로 온 거야?”
“놈은 다리를 다쳤어!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언덕으로 뛰어!”
“젊은이들은 노인들과 아이들을 챙겨! 힘 있는 사람들이 챙겨야지 누가 챙겨? 아니 좀, 혼자만 뛰지 말고 챙기라고!”
처음에는 다들 경황이 없어 우왕좌왕하더니 촌장을 비롯한 몇몇 이들의 외침에서 겨우 정신을 차리고 서로서로 도우며 언덕 위로 올라갔다.
마물이 다리를 다쳤기에 망정이지 멀쩡한 상태에서 들이닥쳤다면 열댓 명은 족히 죽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이 마을은 안일하기 짝이 없었다.
종소리를 듣고 신전에선 대기하고 있던 사제들이 마을 사람들의 도착에 맞춰 결계의 일부분을 해제했다.
“로건 사제! 사람들이 도착했습니다!”
“다들 양옆으로 물러나거라! 결계를 해제하겠다!”
“결계는 일부분만 개방합니다! 다들 신속하게 들어오시되 질서를 유지해 주십시오!”
결계의 열린 부분을 통하여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긴급 상황에서 질서 따윌 지킬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일단 어깨부터 들이밀고 보는 거지.
밀려드는 마을 사람들 사이에는 어느덧 루크와 레이아도 끼어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처음부터 인파 속에 섞여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신전 안으로 몸을 들였다.
* * *
아슈타르 교 슈탈랭 지부의 사제들은 모두 데메그리 교의 사제들이다.
놀랍게도 그들 전원이 아슈타르 신학교를 졸업하여 정식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이었다. 숙적인 아슈타르 교를 내부에서 무너뜨리기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물의 등장으로 마을 사람들을 신전 안에 들이게 되면서 슈탈랭 지부의 사제들은 급히 회의를 가졌다.
좁은 기도실 안에서 이제 막 불혹을 넘긴 듯한 고위 사제, 로건이 입을 열었다.
“대체 마물 관리를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이냐? 중요한 계획을 앞두고 잔망스럽게 이 무슨 난리냔 말이다.”
“아무래도 본단에서 마물을 화물로 위장하여 운반시킨 모양입니다. 그 유통 업자를 따라온 마물 같은데 수준은 기껏해야 1성급이니 염려 마십시오.”
“염려 마십시오? 대단히 성의 없는 대답을 내놓는군. 내가 자네의 변명이나 듣고자 여기 서 있는 줄 아나?”
“죄, 죄송합니다.”
“그리고 지금 시기가 어느 땐데 아직도 유통 업자를 통해서 전달하는 것이냐. 마트리 항구가 건재할 때나 먹힐 법한 방법을 아직도 써먹고 있다니, 본단 사람들은 이곳 사정을 알고 있긴 한 것이냐?”
“그… 블랑 사제님이 라그나로스 봉인을 풀 때가 되었으니 마물의 숫자를 대폭 늘려야 한다고 본단에 건의한 모양입니다.”
“쯧쯧, 블랑 그 멍청한 것이 사람 귀찮게 만드는군. 머릿수라면 내가 계속 늘려 주고 있거늘.”
마물을 화물로 위장하여 운반하는 방법은 대규모 항구도시인 마트리가 건재할 때나 써먹던 방법이었다. 마트리와 슈탈랭 영지는 인접해 있으니 신전에서 금방금방 마물을 전해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트리가 잿더미가 된 지금은 멀리 떨어져 있는 파이넨 항구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파이넨 항구에서 이곳 슈탈랭에 화물이 무사히 도착할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로건은 비효율적인 짓거리만 골라서 하는 봉인석 담당팀의 행태가 못마땅할 따름이었다.
“들여보낸 사람들은 적당히 밥이나 던져 주고 내보내거라. 난 지하에서 마물 생산 작업을 이어 갈 테니 다시는 이따위 시시한 사고로 귀찮게 만들지 말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