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73화 라그나로스 계획서(2)
신전 안은 분위기부터가 남달랐다. 깔끔하게 정돈된 건물 내부 하며 마물들의 습격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 지내는 고아원 건물이 따로 세워져 있었고, 화단에는 가을꽃이 만발해 있었다.
루크와 레이아는 괜히 수상한 사람으로 오해받지 않기 위해 로브 후드를 뒤로 젖히며 당당히 행동했다.
마을 사람들과 한데 섞여 신전 앞뜰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공기가 이완되는 것이 느껴졌다. 신전에 들어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다급하기 짝이 없었는데, 이제는 모두가 걱정은 싹 잊은 양 소풍 나온 기분으로 떠들어 댔다.
“휴우~ 마물이 나타났다길래 얼마나 놀란 줄 알아? 이게 얼마 만이래?”
“뿔 두 개 달린 녀석이 온 뒤로 한 번도 안 왔으니까 두 달쯤 됐을걸?”
“에잉, 오늘 중으로 수확할 게 한두 개가 아닌데 괜히 찾아와서 훼방이나 놓고 말이야.”
이완된 분위기는 결계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신뢰도가 얼마나 높은지 의미하는 지표나 다름없었다.
고아들도 평소에 마을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편인지 장난을 치며 그들을 반겼다.
“북 아저씨다!”
“떼끼! 아저씨 배는 북이 아니래도! 아야! 아야! 욘석들아, 그만하지 못해?”
“할아버지! 저번에 만들어 준 실감개 차 부서졌어요!”
“허허허, 어디 한번 보자꾸나.”
신전의 안과 밖은 격리되어 있어서 마을 사람들과 고아들 간의 교류는 거의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여태까지 늘 마물이 물러날 때까지 기다릴 겸 아이들과 놀아 줬던 모양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오지랖 넓게 생긴 노인이 다가와 대뜸 루크에게 말을 걸었다.
“댁들 부부는 어디서 왔나?”
비슷한 옷을 입고 나란히 서 있으니 부부로 착각한 모양이다.
상투적인 오해에 일일이 반응하는 것도 우습기에 적당히 말을 받아 주었다.
“북부에서 왔습니다. 이곳에 물건을 전하러 온 참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물이 온 건가. 댁들을 따라왔나 보구먼.”
“그런 거라면 무척 죄송하게 되었군요.”
“허허허. 괜찮네, 괜찮아. 아슈타르 교 사제분들이 알아서 잘 처리해 주실걸세. 4성급 마물도 뚫지 못한 결계인데 1성급 마물이라고 별수 있겠나. 마음에 두지 말게나. 게다가 신전의 손님이라면 마을의 손님이라고도 할 수 있지. 마물이 물러나면 우리 집에 와서 쉬고 가지 않겠나?”
그러고 보니 마을에 가서 신전의 손님이라고 하면 촌장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거란 말을 들었다.
말하는 품새로 보아 노인이 촌장인 듯하다.
“마물이 사라지면 바로 떠날 것이니 마음만 받아 두겠습니다. 그나저나 다른 마을과 다르게 정말 평화롭군요.”
“허허허, 이게 전부 아슈타르 교 사제분들 덕분 아니겠는가. 게다가 인근 영지의 불쌍한 고아들을 모두 거두어서 돌본다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닐 텐데도 다들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으시지. 그것도 모자라 주기적으로 마을 주민들을 모아다가 건강 검진까지 해 주시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네.”
오지랖이 넓은 사람은 성가시기도 하지만 때론 묻지도 않은 정보를 알아서 털어놓기에 정보원이 되기도 한다.
신전에서 무료로 봉사하는 차원에서 의료 활동을 펼치는 일은 드물지 않다.
하지만 놈들은 아슈타르 교의 탈을 쓴 데메그리 교의 사제들이다.
정보 통제를 위해 결계를 펼쳐 뒀으니 결계를 유지할 명분을 위해서라도 마을 사람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까진 이해가 간다.
그러나 건강 검진은 꼭 해야 할 이유가 없다. 데메그리 교 사제들의 시간과 인력을 낭비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일 터.
이유 없이 건강 검진을 실시하진 않았을 거다.
이후에 촌장은 시시콜콜한 얘기를 몇 마디 하다가 마을 사람들을 챙기기 위해 자리를 떴다.
촌장이 떠난 직후에 레이아가 루크에게 바짝 붙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신전 안쪽에서 마물의 기척이 느껴져요. 그것도 꽤 많이요.”
이보다 더 확실하게 데메그리 교의 소굴이란 것을 알려 주는 증거가 있을까.
루크는 사제들의 움직임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사람들이 함부로 신전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놈들의 주의가 흐트러뜨릴 테니 잘 따라와.”
따악!
루크의 엄지와 중지가 맞물리며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자 높은 상공에서 파이가 긴 울음소리를 내며 급하게 강하했다.
피이이익!
독수리의 울음소리를 닮은 날카로운 소리가 긴 여운을 남기며 결계 안까지 전달되었다. 갑자기 신전 상공에서 나타난 거대한 새의 존재에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위로 쏠렸다.
데메그리 교의 사제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루크와 레이아는 사람들의 시선이 하늘에 쏠린 틈을 타서 조용히 뒤뜰로 이동했다. 대부분 사제가 마을 사람들을 통제하는 데 투입된 덕에 뒤뜰에는 아무도 없었다.
뒤뜰을 가로질러 뒷문을 열고 신전 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예배당이 나타났다.
레이아가 다시금 온 집중력을 끌어 올리며 구체적인 방향을 알아냈다.
“바닥 아래에서 마기가 감도는 걸로 봐선 지하 쪽이네요. 여기서부턴 제가 앞장설게요.”
예배당 바깥으로 나가자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다. 지하로 향하는 나선 계단을 밟으며 아래로 내려가다 보니 불길한 기운이 점점 농도를 더해 갔다.
딱히 마기에 민감한 체질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을 만큼 짙은 농도였다.
더군다나 느껴지는 건 마기뿐만이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불온한 공기 속에 진한 피 냄새가 섞이기 시작했다.
발소리를 죽이며 계단을 내려가다 보니 나무문이 나타났다.
레이아는 겁도 없이 문고리를 덥석 잡고선 천천히 문을 밀었다. 그러나 나무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하실은 같은 데메그리 교의 사제조차도 출입이 제한되어 있는 금지 구역임을 의미했다.
그에 루크가 검을 빼 들며 말했다.
“물러나. 내가 열겠어.”
정확히는 연다기보다 벤다고 해야 할 테지.
검에 마나 오오라가 깃들면서 일도양단했다. 세로로 떨어진 검이 깔끔한 일선을 그리더니 나무문이 반으로 쪼개지며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지하실 내부에 갇혀 있던 공기가 한꺼번에 통로로 쏟아져 나왔다.
아까 지하실에 가까이 갈수록 피 냄새가 진해진다고 했었던가?
마치 빙산의 일각처럼 피 냄새의 일부만 새어 나온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지하실 안은 마치 핏물 속에 빠진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역겨운 냄새가 알알이 배어 있었다.
안쪽에 비치되어 있는 풍경은 더 가관이었다.
지하실 한편에는 맹수를 가둘 때나 쓰는 강철 우리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는데, 우리 안에는 마물들이 갇혀 있었다. 그리고 반대편 구석에는 심하게 훼손된 아이들의 시신이 가득 쌓여 있었다.
왜 데메그리 교가 자청해서 고아들을 거두었는지 지하실을 보니 모든 궁금증이 풀렸다.
고아들을 한두 명씩 지하실로 데려와 마기를 주입하여 마물로 변형시키는 작업을 계속해 온 것이다.
루크는 검에 마나 블레이드를 부여하며 지하실 안에 있던 중년 사내에게 겨누었다.
“여태까지 왜 데메그리 교가 오물 집합소라 불려 왔는지 알겠어. 자진해서 똥통에 손을 담그다니, 카이둔 국왕은 참 비위도 좋아.”
중년 사내, 로건이 몸을 찬찬히 돌리며 루크를 노려보았다.
“상인이랍시고 문을 두드린 얼간이가 있다고 들었는데 알고 보니 남의 뒷구멍을 후벼 파러 온 쥐새끼였군.”
“카이둔 국왕과 연관이 있다는 걸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발언이다만?”
“속을 떠보는 솜씨가 제법이구나. 하지만 과연 네놈이 지하실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피 냄새 속에서 일하다 보니 코뿐만 아니라 눈까지 둔해졌나 보지?”
“이름 모를 애송아, 마나마스터의 경지가 승리의 보증 수표라도 되는 줄 아느냐? 정녕 그리 생각하고 있다면 쥐새끼란 호칭도 아깝구나.”
“승리 보증 수표까진 아니더라도 구린내가 풍기는 쓰레기를 치우는 용도로는 쓸 수 있지.”
대화 도중에도 루크 주위에선 마나가 배열되고 있었다.
배열이 끝난 순간, 루크의 입이 달싹이며 주문을 읊조렸다.
“블링크.”
루크의 신형이 사라지면서 로건의 머리 위에서 나타났다.
공중에 뜬 몸이 아래로 떨어짐과 동시에 짙은 보랏빛 검신이 살벌한 기세를 발하며 일선을 그렸다.
로건은 루크가 어디로 이동했든 상관없다는 양 절대적인 자신감을 내비쳤다.
“마나마스터이면서도 4서클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실력이라……. 방금 발언은 정정하지. 다 자란 시궁쥐 정도는 되는구나.”
보랏빛 검신보다 실오라기가 먼저 가닥가닥 늘어지며 로건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본래라면 로건의 몸이 조각나야 할 터이나 마나 블레이드는 로건에게 닿지 못하고 모조리 튕겨져 나왔다.
투웅! 투웅! 투웅!
이어서 검신이 직접 떨어졌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투웅!
마검을 담고 있던 상자에 둘러진 결계, 신전 주변을 두르고 있던 결계. 두 결계 모두 로건이 친 것이었다.
여태껏 위장용으로 둘렀던 결계를 이번에는 로건 자신의 방어를 위해 두른 것이다.
마검을 담고 있던 상자에 마나 블레이드를 가했을 때도 튕겨 나왔다.
똑같은 결계에 공격을 한 것이니 그때와 같은 결과가 발생하는 건 자명한 이치였다.
루크는 아랑곳하지 않고 공격을 이어 나갔고, 로건은 결계 안에서 재롱이라도 감상하는 것처럼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애송아, 그깟 공격에 뚫릴 결계로 보이느냐?”
“내 눈에는 웅크려서 꼼짝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만?”
“수비에 일가견에 있다고 말하려다 말이 헛 나왔나 보구나.”
공격을 퍼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격할 기미가 안 보인다. 방어 마법에 대해선 일가견이 있어도 공격 마법의 재능은 0에 가까운 모양이다.
방어하는 재주밖에 없다면 굳이 로건을 붙잡고 씨름할 이유가 없다. 놈이 결계 안에서 웅크려 있는 동안 필요한 자료를 취하면 그만이다.
안 그래도 로건이 사용하던 책상 위에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 있는 계획서가 쌓여 있었다.
하니온 왕국 공략 계획서라면 좋고, 카이둔 국왕이 연관되어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으면 더더욱 좋다.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인지라 로건도 금세 루크의 의중을 간파했다.
“어리석은 것들, 너희들이 누구에게 둘러싸여 있는지 잊었나?”
로건이 가볍게 팔을 휘젓자 우리 안에 갇혀 있던 마물들이 하나둘씩 눈을 떴다. 대부분이 1성급, 2성급이었으나 간간이 3성급 마물이 섞여 있었고, 가장 구석에 있는 마물은 4성급이었다.
뿐만 아니라 지하실 바깥, 지상에서도 다수의 마물이 포효를 내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쿠어어어어!”
“끼에에엑!”
건강 검진을 빌미로 마을 사람들의 체내에 마법진을 설치해 놓고 필요에 따라 마기를 활성화시켜 소모품으로 써먹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지금쯤 지상에선 마물 변형 마법진의 충격을 버텨 낸 자는 마물이 되었을 거고, 그러지 못한 자는 죽었을 거다.
원래는 혹시나 마을을 지나치는 하니온 왕국의 토벌대를 대비한 꼼수였으리라.
토벌대 대비용으로 준비한 꼼수이다 보니 레이아가 마을 사람들에게서 아무런 기척도 못 느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을 마물로 만든 사제들을 은인이라며 떠받들어온 셈이다.
지하에도 마물, 지상에도 마물.
게다가 이곳에 있는 모든 마물을 만들어 낸 자는 결계 안에서 비릿한 조소를 머금고 있었다.
“산 채로 뜯어먹히는 꼴을 찬찬히 구경해 주마. 어디 한번 용써 보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