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역대급 재능으로 환생-75화 (75/200)

# 75

75화 라그나로스 계획서(4)

결계를 사이에 두고 마나 블레이드가 번들거리고 있다.

방금까지 로건은 마나마스터를 얕보았다. 하지만 루크는 로건이 믿어 의심치 않던 마물 무리를 몰살하곤 사체 위에 담담히 서 있었다.

지하에 10마리, 지상에 10마리.

무려 20마리나 되는 마물이 있지 않았는가. 심지어 지상에서 내려오던 마물들은 아담한 신장의 여인에게 막혔다.

루크란 걸 알고 나니 어느 정도 납득이 되긴 해도 허망한 기분이 드는 건 부정할 수 없다.

4성급 마물이 하나 섞여 있지 않았는가.

데메그리 교에선 마나마스터가 4성급 마물을 단독으로 잡으려면 상성과 환경이 모두 맞아떨어져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다.

한데 뭔 놈의 인간이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는 제약과 좁은 곳이라 정면으로 대결해야 하는 불리함을 힘으로 찍어 눌러 버린단 말인가.

애당초 오른쪽 팔만 버서커화라니 듣고 보도 못한 수법이다.

한데 이어지는 상황이 그를 더욱 경악하게 만들었다.

“어? 팔에 그거 괜찮은 거예요?”

아담한 신장의 여인, 레이아가 지하실 안으로 들어와서 루크의 팔을 지목했다.

루크는 자신의 팔을 힐끗 보고선 어깨를 으쓱였다.

“출력을 높이느라 오른쪽 팔만 버서커화시켰지. 효과는 발군인데 계속 팔이 시큰거려서 애용할 방법은 못 되겠군.”

“아뇨, 아뇨. 그만큼 침식됐는데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는 거예요?”

“저번처럼 마기 회로를 흡수하면 돼.”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로건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마기 회로를 흡수해?

이론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대량의 마나로 마기 회로를 마나 회로로 만든 다음 서클을 생성하는 요령으로 당기면 흡수하는 게 가능하다.

한때 데메그리 교에서도 마물의 불안정성 때문에 안정적인 흑마법사를 만들어 내고자 무기형 마물을 이용한 회로 흡수를 연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마기 회로를 중화시키기 전에 마나가 바닥나 마검에 잠식당하기 일쑤였기에 실용성은 없다고 판명되어 사장된 방법이었다.

그걸 실제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리가 없다.

그러나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

잠시 후, 마기 회로가 중화되며 루크의 오른팔에 불거져 있던 검은색 핏줄들이 본래 색으로 돌아갔다.

정말로 마기 회로를 흡수해 버린 것이다!

간단하게 버서커화를 해제한 루크는 지팡이처럼 검 끝으로 바닥에 짚으며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처리하다 말았던 잔챙이를 마저 정리해야겠군.”

로건은 더 이상 방도가 없음을 직감했다.

하다못해 지상에 있던 부하들이 와서 거들어 주기라도 한다면 모를 텐데 누구도 내려올 기미가 안 보인다. 필시 마물과 함께 레이아의 마법에 휘말려 명을 달리한 것이리라.

그에게 허락된 것은 루크와 협상하는 것뿐이었다.

“자, 잠깐 기다려! 이, 일단 진정하고 대화로 풀자고. 너네도 겐크 왕국 사람이잖아? 겐크 국왕이 데메그리 교와 연관되어 있다는 게 세상에 알려져 봐라. 다른 왕국들에게 배척당할걸? 네가 가지고 있던 귀족 작위, 지금까지 누려 왔던 모든 권리가 무용지물이 될지도 모르는데, 그런 건 너희들도 원하지 않는 일이잖아?”

인간이란 삶의 질이 낮아지는 것에 쉬이 적응하지 못한다.

그 누가 저택에서 지내다 단칸방에서 살고 싶겠으며 고급 스테이크를 썰다가 딱딱한 보리 빵을 먹고 싶겠는가.

인간에게 욕망이란 게 있는 이상 루크도 조금은 거래를 고려해 볼 만하다는 게 로건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루크는 마치 바라던 것이라는 양 호쾌하게 로건의 제안을 짓뭉갰다.

“카이둔이 스스로 오물통에 손을 담가 줘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이걸로 가차 없이 밟을 수 있겠군.”

“네놈, 설마 역모… 커헉!”

로건이 말을 잇지 못하고 피를 토해 냈다.

그를 보호하고 있던 결계는 어느덧 풀려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레이아가 로건의 후방에서 관통 효과를 가진 프로즌 오브를 지면 아래로 사용했고, 프로즌 오브가 지면을 통하여 결계 안쪽의 벽을 두드린 것이다.

결계가 안쪽에서의 공격에 취약하다는 건 이전에 마검이 상자를 부수고 나올 때 이미 증명된 바이다.

마당에 있던 아이들을 고려하여 신전 주변에 둘러 있던 결계를 부수기보단 잠입하는 쪽을 택했으나,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에 레이아는 가차 없이 로건의 숨통을 끊었다.

레이아로선 처음으로 인간의 숨통을 끊은 셈이었다.

그럼에도 일절 흔들리는 것 없이 아이스 스피어로 확인 사살까지 하는 레이아였다.

푸욱!

그녀는 로건의 죽음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양 루크를 똑바로 직시했다.

“개인적으로 전 루크 씨를 존경해요. 하지만 공과 사는 확실히 해 둬야겠죠. 전에 언급한 황금 열쇠라는 게 국왕을 칠 수 있는 명분을 말하는 것이었나요?”

민감한 질문이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었다.

천재 마법사인 것을 떠나서 레이아는 마탑의 일개 학생이자 귀족가 영애에 불과하다. 루크의 입장에선 야심을 이루기 위한 과정 중 하나일지 몰라도, 그녀의 눈에는 역모로 비칠 수도 있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행동 때문에 그란데 백작가의 운명이 달라질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녀로선 당연히 확인해야 할 부분이었다.

루크는 빨려 들어갈 듯한 회색빛을 띤 그녀의 눈을 마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됐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섣불리 긍정이나 부정을 표하기보다는 그녀의 생각부터 듣고자 운을 띄웠다.

그런데 의외로 당찬 대답이 돌아왔다.

“정의 같은 시시한 걸 논하자고 꺼낸 말이 아니에요. 겐크 왕국을 상대한다고 가정하면 승률은 얼마나 되는지 듣고 싶어서 말이죠.”

“변수까지 감안해서 8할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

“거의 자신 있다고 봐도 되겠네요.”

“의외군. 좀 더 근본적인 부분을 논하려는 줄 알았는데 말이지.”

“뭐, 국왕 전하가 데메그리 교와 연관이 있다는 걸 알기 전이었다면 달랐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렇게 증거도 있는 확실한 상황에선 생각해 봤자 쓸데없는 사족이잖아요?”

아마 그녀도 나름대로 저울질해 보았을 것이다.

타락한 왕을 계속 따르는 쪽과 이전부터 야심을 품어 왔던 수완가.

둘 중 어느 쪽이 그녀와 그녀의 가족을 지킬 수 있을지 말이다. 그리고 생각한 끝에 루크 쪽을 더 높게 평가한 것이리라.

루크는 짧고 굵게 그녀의 판단을 평했다.

“현명한 판단이군.”

“칭찬으로 받아들이죠. 그래서 물증은 어떻게 됐나요?”

아까 사두 들개의 화염 브레스 때문에 서류 일부가 불탔다. 게다가 불을 끈다고 물까지 끼얹었으니 서류가 무사할 리 없었다.

타 버린 재를 걷어 내고 서류를 전부 밝은 곳으로 옮겼다. 마법을 이용하여 열기를 서류에 쬐니 물기가 금방 마르긴 했는데, 한 번 젖어서 그런지 종이가 쭈글쭈글하게 쪼그라들었다.

루크와 레이아는 각자 서류를 절반씩 분담하여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결과는 100점 만점에 50점 정도였다.

“이쪽엔 국왕의 이름이 담긴 서류는 하나도 없었어요.”

“이쪽도 똑같아. 타 버린 서류가 국왕과 관련된 서류였나 보군. 그래도 어떻게 하니온 왕국을 삼키려 했는지는 알아냈어. 그것만으로도 수확은 충분해.”

남은 서류에는 ‘라그나로스 계획’이라 하여 카이둔 국왕과 데메그리 교의 사제들이 어떻게 하니온 왕국을 삼키려 했는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1단계로 마물을 풀어서 하니온 왕국의 정예병을 남부 지방으로 쏠리게 하고, 라그나로스의 봉인을 풀 준비를 한다.

2단계로 라그나로스의 봉인이 풀릴 때 즈음 항로를 이용하여 라그나로스 봉인석을 북부 지방에 있는 하니온 왕국의 수도 근처로 옮긴다.

3단계로 라그나로스와 마물들이 하니온 왕족과 귀족, 기사를 몰살할 즈음 겐크 왕국의 병력을 투입하여 그들을 제압하고,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자연스럽게 하니온 왕국을 집어삼킨다.

즉, 지금까지의 모든 과정은 영웅이 되기 위한 카이둔 국왕의 자작극인 것이다.

레이아는 카이둔 국왕을 압박할 물증을 확보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표했다.

“물증만 있었으면 모든 게 해결됐을 텐데 아쉽네요.”

“대신 하니온 왕국에 잠입해 있는 데메그리 교의 조직도를 얻었으니 본전치기는 한 셈이야. 고위 사제 쪽을 찌르면 하나쯤은 물증이 나올 테지. 마트리에서 라그나로스 봉인석으로 서클을 생성한 후에 움직여도 늦지 않아.”

“그게 말이죠, 당장 라그나로스 봉인석을 이용하긴 힘들 것 같아요.”

“무슨 문제라도?”

“여기 계획서 일정표에 따르면 벌써 항로를 통해서 라그나로스 봉인석의 운반을 시작했을 거예요. 지금 마트리로 가 봤자 봉인석은 없다는 거죠.”

최초의 목적은 라그나로스 봉인석을 이용하여 단기간에 서클을 늘리는 것이었는데 정작 봉인석은 북부 지방으로 떠났다고 한다.

조금만 더 빨리 왔다면 마트리에 봉인석이 남아 있었을 거고, 조금만 더 늦게 왔다면 북부 지방에서 모두 해결했을 것이다.

뭐, 인생에서 타이밍이 적중할 때가 있는가 하면, 간발의 차로 놓치는 경우도 있지 않겠는가.

지금 마트리로 가 봤자 아무것도 없을 테니 행선지 변경이 필요했다.

“라그나로스 봉인석의 최종 목적지는 하니온 왕국의 수도라고 했지. 우리도 수도로 가야겠군.”

“데메그리 교 고위 사제들도 수도에 몰려 있으니 겸사겸사 족치면 되겠네요.”

“말투가 꽤 거칠어졌는걸?”

“어딘가의 잘나신 누구 덕분이죠. 슬슬 파이 부를까요?”

하늘에선 파이가 구름 사이를 들락날락하며 마음껏 활개를 치고 있었다. 상당한 시간을 안주머니 속에서 보내면서 많이 답답했나 보다.

아마 파이를 타고 이동하면 사흘 내로 하니온 왕국의 수도인 벤티버에 도착할 것이다. 항로로 운반 중인 라그나로스 봉인석은 보름 뒤에 벤티버 근처에 도착할 것이니 약 2주의 여유가 있었다.

남은 기간 데메그리 교 고위 사제들의 동향을 파악해 두면 놈들의 계획을 이용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루크는 하늘에서 날고 있는 파이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좀 더 놀게 놔둬. 다시 지하로 들어가서 무기형 마물들을 가지고 나와야 하니까.”

“마나 회로 엄청 늘어나시겠네요. 여기 있는 서류들은 어떻게 할까요? 챙길까요?”

“혹시라도 토벌대가 지나가다가 이 마을에 들를 수도 있으니까 그냥 놔둬. 일이 잘 풀리면 하니온 왕궁에서 대신 데메그리 교 고위 사제들을 압박해 주겠지.”

데메그리 교의 소굴을 소탕하면서 얻은 수확은 두 가지이다.

그중 하나가 라그나로스 계획서, 다른 하나는 무기형 마물들이다.

다른 사람에겐 불필요한 쓰레기에 불과하나 루크에겐 마나 회로를 늘려 주는 마나 영약과 다를 게 없다.

지하에 남아 있는 무기형 마물의 숫자는 무려 10개.

모두 흡수하면 아마 마나 양은 말할 것도 없고, 마나의 출력도 대폭 증가할 것이다.

그날 루크는 레이아와 함께 마을로 옮긴 무기형 마물의 회로를 모조리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 * *

며칠 후 슈탈랭 영지의 영주가 있는 성에 급전이 날아들었다.

급전에는 왕궁에서 파견한 토벌대가 어느 마을에 들렀는데 마을 주민과 마물의 사체가 즐비했고, 아슈타르 교의 사제들까지 모두 죽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영주는 급전에 동봉된 서류를 살펴보았다. 서류로 말할 것 같으면 어떤 종이는 불에 그슬렸고, 어떤 종이는 물을 뒤집어썼다가 말린 흔적이 역력했다.

그래도 내용을 확인하는 데엔 무리가 없었기에 찬찬히 읽어 보았다.

서류의 내용을 읽는 동안 영주의 표정이 서서히 바뀌는가 싶더니 다급히 도로 편지 봉투에 넣으며 사람을 불렀다.

“거기 아무도 없느냐! 당장 이 편지를 수도로 전달해라! 한시가 급하니 당장 출발하거라! 얼른!”

서류에는 하니온 왕국에 있는 아슈타르 교의 사제들이 실은 데메그리 교의 사제들이었고, 게다가 마물을 끌어들인 것도 모자라 라그나로스 봉인석을 이용하여 하니온 왕국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영주는 일국의 명운이 달린 내용이기에 급히 파발마를 띄웠으며, 왕국을 발칵 뒤집을 사실이 담긴 서류는 슈탈랭 영주의 손을 거쳐 하니온 왕국의 수도인 벤티버로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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