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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재능으로 환생-76화 (76/200)

# 76

76화 오물통 속에선 누구든 함부로 믿는 게 아니다(1)

하니온 왕국의 수도 벤티버.

겐크 왕국은 상원, 하원 의원으로 나누어 각각 다른 분야를 담당하는 분업 체제이나 하니온 왕국은 다르다.

하니온 왕국은 장로회를 주축으로 모든 행정 업무를 처리했다. 장로회의 인사는 왕의 권한이기 때문에 왕에게 모든 권력이 극단적으로 집중되어 있다.

벤티버의 하니온 왕궁 안에선 긴급회의가 소집된 참이었다.

왕좌가 있는 단상을 중심으로 장로들이 양옆에 일렬로 서 있고, 모든 이가 왕좌를 향해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왕좌에 앉아 있는 자는 놀랍게도 10살배기 어린아이였다.

비오테 칸 쿠잔.

선왕이 오랫동안 후사가 없다가 느지막이 낳은 외동아들이자 왕가의 유일한 직계이기도 했다.

하지만 10살짜리 어린아이가 국정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현 하니온 왕국의 모든 실권을 잡고 있는 자는 쿠잔 국왕의 옆에 서 있는 한 여인이었다.

탑 모양으로 쌓아 올린 과한 머리 장식과 반짝이는 가루를 덧붙여 부각한 아이라인, 목과 얼굴의 피부색이 단층을 그릴 정도로 진한 분칠 등등.

화장이라기보다는 분장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는 여인의 이름은 미네르바로, 쿠잔 국왕의 어머니이자 어린 국왕에게 국정을 돌볼 능력이 없다 하여 대리청정을 맡고 있는 자이기도 했다.

미네르바는 단상 아래에 서 있는 사제복 차림의 노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네드 주교, 슈탈랭 영지로부터 흥미로운 내용이 담긴 서신이 도착했더군요.”

따악!

미네르바가 손가락을 튕기자 곱상하게 생긴 젊은 환관이 서류 뭉치를 집어 들었다.

젊은 환관들은 대외적으로 환관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수술을 받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밤에 미네르바의 개인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미네르바와 외척이 장악하고 있는 왕궁에서 독재자의 사소한 취미를 지적할 만한 담을 지닌 자는 없었다.

젊은 환관은 서류에 적힌 내용 일부를 발췌 및 요약하여 널리 알렸다.

“얼마 전, 왕궁에서 출발한 제6 토벌대가 서부 지방을 경유하여 슈탈랭 영지에 진입했다. 해당 토벌대는 슈탈랭 영지 외곽의 한 마을에 들렀으며 그곳 아슈타르 교 신전 내부에서 수많은 마물의 사체와 사람들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신전 지하실에 비치되어 있던 서류를 확보했다. 아슈타르 교에 수많은 데메그리 교 사제가 잠입해 있으며 마물과 라그나로스를 이용해 국가의 혼란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의 문서를 입수하였음을 알린다.”

개요 전달이 끝나자마자 미네르바가 길게 덧붙인 속눈썹을 깜빡이며 네드 주교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왕궁에서 파견한 토벌대가 데메그리 교의 조직도를 입수했다고 하네요. 조직도의 제일 꼭대기에는 네드 주교가 있었고요.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주시겠나요?”

네드 주교는 젊은 환관에게 손가락을 까딱여 자기 앞으로 불렀다.

“저로선 금시초문인 일인지라 아직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군요. 토벌대가 입수했다던 자료를 한번 봐야 명확하게 대답을 전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기, 들고 있는 것들을 가져오너라.”

일개 종교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오만한 태도였다.

네드 주교는 왕궁 안이 마치 제집의 안마당인 것처럼 편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한데도 주변에 있는 장로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왜냐하면 미네르바는 종교에 빠져서 여태껏 아슈타르 교에 막대한 후원을 해 왔고, 네드 주교는 미네르바와 돈독한 관계를 이어 온 종교인이기 때문이다.

왕국의 실권자를 등에 업은 네드 주교는 종교인이면서도 이 나라의 대소사에 간섭하는 숨은 2인자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이번 긴급회의도 책임을 추궁한다기보다는 친한 정치인과 종교인이 한자리에 모여 논란거리를 논하는 모임 정도로 치부되고 있었다.

네드 주교는 서류의 내용을 한번 슥 훑고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이거 참. 왜 흥미로운 내용이라고 하셨는지 알겠군요. 확실히 재미있는 창작물입니다.”

“서류의 내용이 조작된 거라는 말씀이신가요?”

“물론입니다. 여기 기록된 조직도에 따르면 하니온 왕국에 있는 대부분의 아슈타르 교 사제가 데메그리 교 사제로 위장한 셈인 건데, 실제로 가능할 리가 없는 일이지요.”

네드 주교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아슈타르 교 사제의 발령은 신성 제국에서 직접 결정합니다. 이만큼 편중된 인사 발령이 가능할 리도 없고, 데메그리 교 사제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저희 교의 교리를 매일같이 입에 담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그렇다면 왜 이런 서류가 아슈타르 교 내부에 있던 걸까요? 저야 처음부터 네드 주교를 의심하지 않았지만 몇몇 불손한 이들을 납득시키려면 합당한 설명이 필요해서 말이죠.”

장로회 행렬의 말석에 있던 몇몇 이들이 소리를 죽여 한숨을 내쉬었다. 불손한 자들이 그들을 저격한 말임을 모를 리 없었다.

네드 주교나 외척의 눈 밖에 난 이들, 그들은 이번만큼은 미네르바도 경각심을 가질 거라 생각하여 긴급회의를 요청했으나 네드 주교를 싸고도는 미네르바의 언행에 한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정녕 나라의 위기를 논하는 긴급회의란 말인가!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입장에서 보면 그저 저희끼리 보여 주기 식의 쇼를 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네드 주교가 말석을 힐끗 보는가 싶더니 이내 곧 입을 열었다.

“데메그리 교가 퍼트린 마물이 사제들과 함께 죽었고 그 자리에 모함의 내용이 담긴 서류가 놓여 있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누가 서류를 놔뒀겠습니까? 데메그리 교 놈들이 일부러 자신들이 증오하는 아슈타르 교를 음해하고자 조작한 자료를 놔둔 것이겠지요.”

“그럼 이 자료는 데메그리 교의 수작이라고 보면 되겠네요.”

“과연 명석하십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을 정확하게 이해해 주시는군요.”

“마물을 푼 것도 모자라 조작한 자료로 이간질까지 유도하는 걸 보니 우리를 어지간히 얕보고 있나 보네요. 토벌대는 뭘 하고 있는 거죠? 마물 토벌도 지지부진한 것 같고, 데메그리 교 꼬리를 잡지 못하고, 이딴 쓸데없는 조작된 자료나 가져오고, 대체 제대로 하는 게 뭐죠?”

추궁의 대상이 네드 주교에서 장로들로 바뀌었다.

장로들도 대부분 외척이거나 외척에게 딸랑이를 흔들며 자리를 꿰찬 자들이기 때문에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내뱉었다.

“아무래도 토벌대의 수준이 예전만 못한 것 같습니다.”

“엉터리 서류를 급전이랍시고 발송하여 왕궁의 분위기를 어지럽힌 토벌대 대장과 대원에게 엄벌을 내리시지요.”

배에 기름이 차면 움직이기 싫고, 등이 따뜻하면 생각이 둔해지기 마련이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편한데 누가 귀찮음을 자초하려 들겠는가.

색안경을 끼고 보고 싶은 것만 보며 귀에 거름망을 달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자들로 가득한 것이 현 하니온 왕국의 작태였다.

게다가 네드 주교가 해결책을 빙자한 그럴싸한 말을 늘어놓으니 쇠락의 기운이 이보다 더 풀풀 풍길 수밖에 없었다.

“현시점에서 투입된 토벌대만으론 아무런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는 듯하니, 좀 더 많은 병력을 남부 지방으로 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게 좋겠네요. 지금까지 보낸 숫자의 2배에 달하는 병력을 남부로 파견하도록 하죠. 준비하세요.”

네드 주교의 한마디에 별다른 상의 없이 곧바로 병력을 파견할 것을 명하는 미네르바였다.

말석에 있던 몇몇 장로는 목숨을 걸고 추가 파견의 위험성을 토로했다.

“대비마마, 외람되오나 이 이상 북부의 병력을 남부로 옮기면 북부 국방에 허점이 생기고 치안이 불안정해집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십시오.”

“이미 파견된 토벌대를 믿어 주시지요. 더 이상의 추가 파병은 재정적으로도 부담이 심합니다.”

프라임 왕국과의 오랜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나고 병력을 충분히 보충하지 못한 마당에 마물까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게다가 미네르바의 도가 넘는 사치 때문에 국고가 채워질 틈이 없으니 다른 분야에서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었다.

결국 추가 파병은 세율의 상승으로 이어질 테고, 백성을 쥐어짜는 행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미네르바는 진심이 담긴 간언보다 네드 주교의 한마디를 더 중히 여겼다.

“저리 말하는데 네드 주교의 생각은 어떤가요?”

“허허허, 백성의 안전과 데메그리 교 소탕을 위한 파견인데 돈을 논하다니요. 저기 말석에 계신 분들은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데메그리 교 소탕에 소극적이군요.”

네드 주교는 미네르바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대비마마, 여태까지 상당수의 토벌대를 파견했는데도 꼬리가 잡히지 않는 건 토벌대의 정보를 꿰고 있는 자들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음? 그러고 보니 장로회도 토벌대의 정보를 모두 꿰고 있지 않습니까?”

명백히 말석에 있는 장로들을 데메그리 교의 끄나풀로 몰아가는 분위기였다.

간언을 올리다가 죽는 것이면 모를까 이교도와 관계가 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죽는 것만큼 불명예스러운 죽음도 없다.

네드 주교의 현란한 언변에 말석의 장로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꼬리를 내렸다.

“절대로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의도로 말씀하셨습니까?”

“정말로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아서…….”

“그걸 어떻게든 해결하는 것이 장로회가 존재하는 의의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가만히 서서 ‘안 됩니다, 안 됩니다’만 반복하는 것은 앵무새라도 할 수 있는 일이지요.”

“크윽.”

종교인 나부랭이가 함부로 폭언을 퍼붓고 있는데도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네드 주교의 등 뒤에서 미네르바가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말석의 장로들을 쳐다보고 있었기에.

결국 긴급회의는 말석에 있는 장로들의 기를 죽이는 한낱 무대로 전락했고, 동시에 남부 지방의 추가 파병이 확정되었다.

미네르바는 긴급회의를 마무리하며 데메그리 교의 색출을 위한 특별 포상금을 내걸었다.

“앞으로 좀 더 적극적으로 이교도 소탕에 나서도록 하죠. 이교도와 관련된 자들, 그리고 라그나로스 계획 같은 헛소리를 믿고 사람들을 현혹시키려는 자들까지 모두 포함해서 그들을 적발한 자에겐 막대한 포상금과 각종 혜택을 부여하겠어요. 각 영지에 공문을 돌리도록 하세요.”

* * *

긴급회의가 끝난 후 네드 주교는 마차에 올라 왕궁을 빠져나왔다.

긴급회의에 출두하란 공문을 받았을 때만 하더라도 내심 걱정했으나 막상 참가해 보니 기우에 불과했다.

종교에 미쳐 되도 않은 행사에까지 막대한 자금을 기부하는 덜떨어진 년 하나를 구워삶는 거야 일도 아니다.

여느 때처럼 입 좀 놀려 주니 의혹을 금방 벗었다. 게다가 원래 계획하고 있던 수도 방위군의 약화까지 이루어 냈다.

혐의를 잘 넘긴 거야 당연한 일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기분이 찝찝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슈탈랭 영지에 있는 신전이라면 토벌대도 쉬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인데, 대체 누가 그곳을 무너뜨렸단 말인가.

네드 주교는 자신이 모르는 누군가가 암중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이 못마땅했다.

“거사를 앞두고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리는군. 조심해서 나쁠 건 없을 테지.”

미네르바가 포상금을 내건 것과 별개로 네드 주교 역시 귀족들과 기사들에게 손을 써 두고자 마음먹었다.

하니온 왕국에서 네드 주교와 연을 트는 것은 곧 출세가 보장됨을 의미한다.

출세욕을 이용하며 알아서 눈에 불을 켜고 범인을 잡아줄 터.

이 나라에선 누구도 자신을 거역할 수 없다.

그게 설사 신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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