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78화 오물통 속에선 누구든 함부로 믿는 게 아니다(3)
루크와 레이아에게 으름장을 놓은 경비병들이었으나 레이아의 당찬 목소리에 흠칫거렸다.
아무리 봐도 부랑자로밖에 안 보이는데 입으로는 귀족의 딸이라고 말하고 있다.
무시했다가 정말로 타 귀족가에서 온 손님이라면 크게 경을 치게 될 것이다.
그리될 바엔 조금 귀찮더라도 저택 안에 들어가서 확인하는 것이 나았다.
경비병 중 한 명은 정문에 남고, 다른 한 명은 사실 확인을 위해 저택 안을 향해 빠르게 걸어 들어갔다.
정문에 남아 있는 경비병이 헛기침하며 말투를 고쳤다.
“허흠! 지금 확인을 위해 안으로 들어갔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잠시 기다리자 저택 안에서 경비병이 헐레벌떡 뛰어나와선 정문을 열었다.
“게데스 자작님께서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앞으로는 용건 정도는 묻고 행동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면목 없습니다. 최근 이 주변 치안이 안 좋아서 예민해진 것이니 부디 너그럽게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경비병들이 말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었다.
시가지를 지나쳐 오면서 도시의 치안이 얼마나 악화되어 있는지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는가.
수도 경비대는 믿을 만한 것들이 못 되니 개인이 소유한 경비병들이 모든 범죄로부터 저택을 지켜야 했다. 때문에 민감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간 루크와 레이아는 정원수를 가로질러 저택 본채로 이동했다. 본채의 현관문 앞에 그란데 백작과 비슷한 연배의 말쑥한 중년 사내가 서 있었다.
중년 사내, 게데스 자작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갈색 정장에 그보다 연한 갈색 코트를 입고, 떡갈나무를 깎아 만든 지팡이를 땅에 짚고 있었다.
그는 레이아를 보고선 환히 웃으며 포옹을 나누었다.
“하하하! 오랜만이구나, 레이아. 처음에 네가 왔다고 들었을 때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단다. 정말 많이 컸구나. 제이나가 아슈타르 신의 품으로 떠났을 때 본 이후로 처음이니 4년 만이던가?”
“5년 만이에요. 아저씨는 별로 달라진 게 없으시네요.”
“이 나이쯤 되면 달라진 게 없다는 말이 왜 그리 기분 좋게 들리는지 모르겠구나. 그나저나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게 됐느냐?”
“볼일이 있어서 하니온 왕국에 들렀다가 아저씨를 뵙고 갈까 싶어서 왔어요. 며칠 쉬다 가도 되나요?”
“그럼, 그럼. 당연히 되고말고. 내 집이다 생각하고 편히 쉬거라. 그리고 저쪽의 일행분도 소개해 줬으면 좋겠구나.”
레이아가 소개하기 전에 루크가 먼저 나서서 자신의 신분을 각색했다.
“아가씨의 호위 기사로 따라온 루크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레이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전에 협의하지 않은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게데스 자작의 저택에 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평범하게 협조를 구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자고 했다.
그런데 저택에 들어오자마자 예정을 변경했다. 게데스 자작에게서 수상쩍은 냄새를 감지한 것이 분명하다.
솔직히 친척이기도 하고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게데스 자작은 친절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레이아가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느냐? 그건 또 아니다. 친척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기에 남들보다 더 친근하게 느껴질 뿐이지 몇 년에 한 번씩 만나는 자의 본성을 어찌 알겠는가.
여기선 사람을 간파하는 데 일가견을 지닌 루크의 판단을 믿는 게 맞다.
그리 판단한 레이아는 루크의 말에 장단을 맞춰 주었다.
“제 호위 기사예요. 실력이 뛰어나서 데리고 왔어요. 이래 봬도 명문가 출신이니까 소홀히 대접하진 말아 주세요.”
“하하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 호위 기사인데 섭섭하게 대할 리가 없잖느냐. 자자, 계속 여기 서 있기도 뭐하니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 * *
게데스 자작은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할 거라 판단하고선 시종을 시켜 방부터 내주었다. 만약을 위하여 레이아는 자신과 루크의 방이 나란히 붙어 있는 게 좋겠다고 판단하여 나란히 있는 손님방 두 개를 달라고 했다.
각자 방에 짐을 풀고 게데스 자작이 제공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선 복도로 나왔다.
방에 들어갈 때만 하더라도 꾀죄죄한 여행자 같은 행색이었는데, 씻은 후에 옷을 갈아입자 선남선녀가 따로 없었다.
루크는 레이아의 차림을 위아래로 훑고선 짤막한 감상을 내놓았다.
“옷 하나로 사람 인상이 확 달라지는군.”
“차려입는 쪽이 취향이신가 봐요?”
“정확히는 상황에 맞는 옷을 입을 줄 아는 사람이 취향이지. 복장조차도 유용하게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면 더 좋고.”
“그건 여자가 아니라 부하 취향 아닌가요?”
“부하의 질문이니 바라는 부하의 성향을 묻는 줄 알았지.”
“아직 루크 백작가에 정식으로 취직한 게 아니니 부하라 할 순 없죠.”
“예행연습이라고 생각해.”
“그러죠. 월급만 주시면 저야 지금 당장이라도 부하 노릇 할 자신 있어요.”
“성과에 따라 어련히 안 줄까. 하는 거 봐서 알아서 챙겨 줄 테니 염려 마.”
두 사람은 게데스 자작이 기다리고 있는 식당으로 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게데스 자작에겐 호위 기사라고 소개했기 때문에 합을 맞추기 위해서 일부러 루크가 한 발짝 뒤에서 따라갔다.
레이라는 항상 루크의 보폭을 따라가느라 바빴다. 그래서 자신이 앞서 걷는 상황이 어색할 따름이었다.
레이아는 오랜만에 원래 보폭으로 걸으며 루크에게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근데 왜 호위 기사라고 소개한 거예요? 아저씨한테서 수상한 낌새라도 풍기던가요?”
“지팡이에 아슈타르 교 문양이 새겨져 있었어. 그것도 고액의 기부자에게 증정하는 금박 문양이었지. 아슈타르 교에서 VIP급으로 분류되려면 기부액이 50억 루소 이상이어야 한다지?”
저택의 규모나 안에 있는 물건의 수준을 감안하면 게데스 자작의 개인 자산이 50억 루소 이상이라고 보긴 힘들었다.
겉보기에만 검소한 것처럼 꾸며 놓은 것이거나, 쪼들리는 생활을 하면서도 아슈타르 교에 기부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게데스 자작에게 다른 일면이 있다는 건 둘째 치고서라도 그 짧은 시간에 지팡이의 문양을 살펴본 루크의 관찰력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현 하니온 왕국에서 아슈타르 교는 거의 다 데메그리 교 사제들이 위장하고 있으니 연관되어 있을 수도 있다고 판단한 거군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이왕 위장하는 거 가명을 쓰시지 그러셨어요.”
“뭐 어때. 루크란 이름은 흔한 편이고, 여기선 대부분 못 알아들을 텐데, 뭘.”
“아무튼 아저씨가 고액 기부자라고 해서 달라질 건 없죠. 오히려 고액 기부자의 연줄을 타면 손쉽게 고위 사제들에게 닿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중요한 건 명분인데…….”
당장은 적당한 명분이 떠오르지 않는지 루크를 슬쩍 보는 레이아였다.
자신은 당장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나, 루크라면 방안을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제랄드나 러스트, 오즈가 항상 그래 왔듯 레이아도 어느덧 드래프트 영지민화가 되어 있었다.
역시나 루크는 심드렁하게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을 내놓았다.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100퍼센트 먹히는 방법이 있지. 식당에 가서 게데스 자작에게 이렇게 말해.”
* * *
“아슈타르 교의 세례를 받고 싶다고 했느냐?”
“네, 원래는 이냥저냥 별생각 없었는데 여기 오니까 다들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시더라고요. 마법과 종교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으니 온 김에 세례를 받을까 하는데, 고위 사제 중에 알고 지내는 분 있으세요?”
승마가 취미인 사람에게 말 얘기를 꺼내면 입이 마르도록 명마에 대해 읊어 대고,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물고기 얘기를 꺼내면 자신이 낚은 물고기에 대해 밑도 끝도 없이 자랑한다.
같은 맥락에서 종교를 믿는 사람에겐 당연히 종교 얘기가 먹히기 마련이다.
레이아는 루크가 시킨 대로 아슈타르 교의 세례를 받고 싶다고 전했다. 게데스 자작이 종교에 빠져 있는 자라면 전도의 기회를 마다치 않을 터.
그러나 의외로 게데스 자작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에둘러 거절의 뜻을 전했다.
“그런 거라면 여기서 받지 말고 겐크 왕국에 돌아가서 받는 게 어떻겠느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후우, 여기 교단은 교단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란다. 대리청정을 맡고 계신 대비마마께서 아슈타르 교에 푹 빠져 계신 탓에 종교인들의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있지. 그것들은 종교인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들이야.”
게데스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세상에 자기 영지와 병사를 가지고 있는 종교인이 어디 있느냐? 그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게 하니온 왕국의 현실이란다. 난 여기서 세례받는 걸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구나.”
아슈타르 교가 강세를 띠고 있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던 바이다. 한데 설마 하니온 왕국 권력의 정점에 있을 줄은 몰랐다.
미네르바 대리청정 체제에서 네드 주교란 작자가 암중 실세라도 되는 양 권력을 행사하여 백성들은 물론이고 귀족들도 네드 주교에게 굽실거리고 있다고 한다.
특히 왕궁에 출입하는 귀족들은 아슈타르 교의 주일마다 예배에 참가하여 헌금을 내야 하는데, 요구하는 액수가 상상을 초월한다고 한다.
즉, 게데스 자작이 VIP 기부자가 된 것은 자의에 의한 게 아니라 타의에 의한 것이었다. 강제로 헌금을 내다보니 그 액수가 50억 루소가 된 것일 뿐이었다.
지금의 검소한 생활도 게데스 자작이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아슈타르 교의 횡포에 시달려 돈이 없기 때문이었다.
루크는 게데스 자작이 아슈타르 교에 반감을 가지고 있단 것을 알고 적극적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혹시 최근에 하니온 왕궁에 굉장히 위험한 내용이 담긴 서류가 도착하진 않았습니까?”
게데스 자작은 줄곧 가만히 있던 호위 기사의 첫마디가 정치적인 주제라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자네가 어째서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묻고 싶군.”
게데스 자작이 VIP 기부자이기에 신중을 기하고자 호위 기사인 척했다만 네드 주교에게 반감을 가진 자라면 얘기가 다르다.
루크는 처음 노선이었던 사정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는 방향으로 말을 꺼냈다.
“슈탈랭 영지의 아슈타르 교 신전을 부순 게 저희니까요.”
게데스 자작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레이아가 옛날부터 천재 마법사라 불리던 것까진 그도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수많은 마물을 홀로 처리할 만한 실력자라고 생각하긴 힘들다.
하면 레이아와 함께 있는 자가 주력이란 뜻이 되는데, 아무리 봐도 겉모습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귀공자풍의 청년에 불과했다.
수많은 마물을 처리해도 이상하지 않을 실력자에 루크란 이름을 지닌 자.
아까 그의 이름을 들었을 땐 그저 동명이인이겠거니 했다.
왜냐하면 아레나 공국을 무너뜨린 영웅이 타국의 힘없는 일개 자작가에 들를 리가 없지 않은가.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오히려 본인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나이가 어리고 다른 나라의 귀족이라 할지라도 직급 자체는 자신보다 높다.
더군다나 떠오르는 최강자라 불리는 자를 두고 어찌 경솔히 행동하랴.
게데스 자작은 어찌 감히 자기가 상석에 앉을 수 있겠냐는 양 얼른 몸을 일으켰다.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루크 백작님. 다시 한 번 정식으로 인사를 드릴 기회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루크는 괜찮다는 의미에서 손을 가볍게 흔들며 깍지를 끼고 턱을 괴었다.
“손님으로 온 것이니 개의치 마십시오. 그보다 왕궁 내부 사정을 좀 더 자세히 듣고 싶군요. 적어도 방치된 배수로보단 덜 썩어 있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