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79화 쓰레기 소각(1)
게데스 자작의 말을 들어 보니 하니온 왕국의 상태는 상상 이상으로 심각했다. 대리청정을 맡은 미네르바는 종교에 미쳐서 아슈타르 교 지부를 위해 법률까지 뜯어고쳤다고 한다.
아슈타르 교의 신전을 세우면 토지와 지원금을 하사하고, 지급한 토지를 자치령으로 구분하여 독자적으로 세금을 걷을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토지의 크기를 막론하고 왕가에서 허가를 내린 자치령이니 지방 영주들도 어지간한 명분 없이는 함부로 손댈 수가 없었다.
일부는 왕가에서 받은 지원금을 이용하여 고리대금업을 하는 신전도 있다고 한다. 대민 지원이라는 명목하에 신전에서 영지민들에게 싼 이자로 돈을 빌려주고, 계약서에 교묘하게 말장난을 쳐서 후에 비싼 이자를 요구하는 것이다.
만약에 돈을 갚지 못하면 담보로 잡아 두었던 토지를 통째로 빼앗거나 신전의 하인으로 부려 먹는 등 각종 횡포가 만연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치익!
게데스 자작이 곰방대에 담뱃잎을 쑤셔 넣고선 성냥에 불을 붙였다. 애연가들이 식후에는 늘 지상 위에 작은 구름을 남기듯, 게데스 자작도 겸사겸사 답답함을 완화시킬 목적으로 연기를 길게 뿜었다.
“후우, 가장 심각한 건 네드 주교입니다. 대비마마의 후광을 믿고 왕궁을 제집 드나들듯 하는 놈이지요.”
“라그나로스 계획서가 전해졌다면 하니온에 잠복 중인 데메그리 교의 조직도도 전해졌을 텐데, 그럼에도 처벌이 없었습니까?”
“처벌은커녕 추궁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네드 주교를 모함하는 자가 있다며 대비마마께서 현상금을 내걸었지요. 하늘이 무너져도 기도나 하고 앉아 있을 여자입니다. 코앞에서 네드 주교가 마물로 변한다 할지라도 모함이라고 믿을 겁니다.”
“흠, 압박 정도는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곯아 있군요.”
“그런데 라그나로스를 수도 근처에 풀어놓는다는 계획은 진짜인 겁니까?”
“확실합니다. 최근까지 마트리에 라그나로스 봉인석이 있었다는 정황이 포착되었으니까요.”
게데스 자작은 답답한 마음에 연기를 깊숙이 마시고선 길게 내뿜었다. 어찌나 길게 들이마셨는지 한 호흡에 연기가 다 나오지 못하여 한 번 더 숨을 내쉬어도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를 정도였다.
“안 그래도 서쪽 바다에서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온 적이 있었지요. 라그나로스 봉인석을 옮기면서 그 여파로 발생한 현상이라도 보면 될는지?”
“봉인석을 직접 배에 실을 린 없을 거고, 고래를 운반하듯 바닷물에 넣고 쇠사슬로 선박과 연결한 거겠지요. 그만한 현상이면 현지 해군도 이상하게 여길 텐데 전혀 수색하지 않는 겁니까?”
“기껏해야 적조 때문이겠거니 하고 무시하고 넘어갔습니다. 아마 네드 주교가 사전에 손써 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네드 주교의 영향력은 군대에도 미칠 정도다, 그리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후우, 라그나로스 계획이 진짜라면 벤티버의 수십만 백성이 몰살당할 겁니다. 최악의 경우엔 왕궁까지 무너질 테지요. 어떻게 방법이 없겠습니까?”
하니온 왕궁에서 압박조차 하지 않는다면 다른 이가 나서서 라그나로스의 봉인을 푸는 것을 저지할 수밖에 없다.
데메그리 교도 바보는 아닐 테니 상당한 실력자와 마물을 동원하여 봉인석을 지키고 있을 터.
데메그리 교의 의중을 알면서도 그들을 저지할 수 있는 실력자라면 굳이 다른 자를 찾을 것도 없다.
게데스 자작이 재떨이에 곰방대를 거꾸로 걸치며 기대하는 투로 넌지시 운을 띄웠다.
“이만큼 이야기가 진행되었으니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백작님은 데메그리 교를 소탕하기 위해 이곳에 온 거라고 봐도 되겠습니까?”
원래 목적은 라그나로스의 열기를 이용해 단기간에 서클을 늘리는 것이고, 겸사겸사 카이둔 국왕을 궁지로 몰 수 있는 물증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데메그리 교의 소탕은 과정에 포함되어 있을 뿐이지 목적이라고까지 할 만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루크는 이 상황을 잘 이용하면 겐크 왕국을 얻기에 앞서 하니온 왕국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 판단하였다.
루크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가는가 싶더니 그의 입에서 게데스 자작이 혹할 법한 말이 흘러나왔다.
“얼추 비슷한 목적으로 오긴 했지요. 어떻습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데메그리 교를 소탕할 겸 하니온 왕궁의 썩은 부위를 도려내지 않겠습니까?”
“거기까지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저희야 좋지만 타국의 귀족이신데, 그 부분까지 도움을 받기엔 너무 염치없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물론 공짜는 아닙니다. 보수를 요구하기에 앞서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게데스 자작님과 같은 생각을 가진 자가 몇이나 됩니까?”
“일단 장로회의 말석에 있는 자들은 전부 동지라고 보면 되고, 왕궁 내에서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다 뿐이지 저와 같은 생각을 지닌 자들이 제법 될 겁니다.”
“조만간 선택의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 그들과 함께 저를 선택한다고 약조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어떤 선택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걸 알려 드리면 보수라 할 수 없지요. 한 가지 확실한 건 라그나로스 계획은 반드시 저지할 것이고, 왕궁까지 정화한다 치면 어지간한 보수론 어림도 없으니 이 정도는 되어야 수지가 맞지 않겠습니까?”
조만간 다가올 선택의 기로에서 루크의 편에 설 것.
그것이 어떤 선택인지 알 수 없으나 게데스 자작, 나아가 하니온 왕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이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공국이라곤 하나 일국을 멸할 정도의 능력을 갖춘 자, 루크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게데스 자작은 재떨이에 걸쳐 둔 곰방대를 다시 집어 들었다. 핀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금 담뱃잎을 쑤셔 넣어 다시 불을 붙였다.
아까는 답답한 마음에 폈다면 지금은 생각을 정리하느라 습관적으로 연기를 들이마시는 것이었다.
쑤셔 넣은 담뱃잎이 모두 재로 화할 즈음 게데스 자작이 결단을 내렸다.
“금이 있을지 뱀이 있을지 모르는 상자를 떠안는 셈이군요. 그래도 이대로 앉아서 죽는 것보단 나을 테지요. 그 상자, 사겠습니다.”
“외척과 네드 주교에게 반감을 가진 자들을 모두 설득해서 계획에 동참시키십시오.”
“설득하려면 구체적인 내용이 필요합니다. 누구도 실행 가능성이 적은 계획에는 동참하려 들지 않을 테니까요.”
루크는 자신의 쪽으로 다가오는 담배 연기를 손으로 흩트리며 구체적인 계획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루크의 계획이 흘러나오는 동안 게데스 자작의 얼굴에 감탄이 깃들었다.
* * *
하니온에 있는 아슈타르 교의 대신전에서 한창 성대한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추수 감사절을 맞아 대신전에서도 아슈타르 신에게 올해의 수확을 감사하고, 내년의 풍요를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
행사의 규모는 어지간한 국가의 대행사에 필적하는 수준이었으며 모든 비용은 하니온 왕궁에서 대 주었다.
신전에는 만국기를 연상하게 하는 금박의 등불이 가득 걸려 있어서 마치 별들이 지상에 내려와 반짝이는 것 같았다.
신전 입구에 있는 아슈타르 신의 황금상은 높이가 무려 4미터나 되어 마치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한 모습으로 있었다.
한밤중인데도 전국에서 찾아든 순례자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고, 헌금함은 몇 개나 놓았으나 계속 가득 차는 탓에 몇 번이나 비워야 했다.
신전 안쪽의 깊숙한 방 안에선 사제들과 귀족들이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하하하, 올해 추수 감사절 행사도 성공적이군요. 날이 갈수록 사람들의 신앙심이 깊어지는 걸 보니 제가 다 기분이 좋습니다.”
“모두 전하와 대비마마의 은혜 덕분 아니겠습니까.”
“최근에 불손한 자들의 모함에 근심이 깊으셨을 텐데 밝으신 모습을 보니 저희도 안심이 되는군요.”
“어딜 가도 마음이 병든 자들은 있는 법이지요. 거기에 연연하지 않고 아슈타르 신의 은총이 널리 퍼지도록 기원하는 게 저희의 의무이자 도리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네드 주교님을 보고 있으면 공부가 많이 됩니다. 앞으로도 불안에 떠는 백성들을 위해 힘써 주십시오.”
“아무렴요. 대비마마와 여러분의 신앙심이 이리 깊으시니 아슈타르 신의 은총이 하니온 전역에 널리 내려앉을 겁니다.”
방 안에 있는 사제들은 아슈타르 교 대신전의 고위 사제들이고, 귀족들은 미네르바 덕에 출세한 외척들이었다.
네드 주교가 왕궁, 그리고 약소 귀족들로부터 뜯어낸 돈 일부는 외척들에게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네드 주교는 종교를 앞세워 뽑아낸 돈으로 권력을 사고, 외척들은 가만히 있어도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으니 그야말로 썩은 연못의 거머리와 기생충 같은 조합이라 할 수 있겠다.
방 안에선 외모를 위주로 뽑은 듯한 미녀 사제들이 술을 따르고, 술상에는 국왕의 만찬에나 오를 법한 산해진미가 그득했다.
누가 이를 두고 사제들이 먹는 식탁이라고 생각하겠는가!
네드 주교는 여사제를 시켜 물건을 가져오라 하였다.
“아가야, 그걸 가져 오거라.”
여사제는 상자를 나이가 지긋한 귀족에게 건넸다.
외척 중에서도 가장 작위가 높은 자이자 중심에 서 있는 자, 베아니치 공작이었다.
베아니치 공작은 상자를 감싸고 있는 자줏빛 비단을 풀어 헤치며 내용물을 확인했다.
상자 안에는 묵직한 금괴가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 얼핏 봐도 10억 루소는 족히 될 법한 양에 베아니치 공작의 입이 귀에 걸렸다.
“뭘 또 이런 걸 준비하고 그러십니까.”
“받은 만큼 베풀어라, 아슈타르 신을 섬기는 몸이니 교리에 충실해야지요. 국정을 돌보려면 자금이 많이 필요하실 테니 요긴하게 써 주십시오.”
“응당 그래야지요. 네드 주교께서 이토록 하니온의 미래를 위해 힘써 주시니 든든할 따름입니다.”
주거니 받거니 좋게 포장하며 저희끼리 배를 불리는 모습이었다.
누군가가 마물에게 죽든 말든, 누군가가 신을 찾으며 두 무릎을 흙먼지로 더럽히든 말든 그들은 날이 갈수록 배에 들어찬 기름을 더하기만 했지 뺄 줄을 몰랐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던 차에 어느 젊은 귀족이 장내에 들어와 베아니치 공작에게 귓속말했다.
귓속말을 들은 베아니치 공작은 일순 표정을 달리했다. 그러나 금세 가식적인 미소를 띠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위치가 위치이다 보니 경사스러운 날에도 일이 들어오는군요.”
“허허허, 우수한 만큼 수수료 떼는 거라 생각하시지요. 술은 많이 남아 있으니 일 보고 오십시오.”
방에서 나와 문을 닫고 네드 주교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위치까지 이동하고 난 후에야 젊은 귀족과 아까 하던 얘기를 마저 했다.
“역모의 정황을 발견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더냐?”
“경비병들의 보고에 의하면 게데스 자작을 비롯한 장로회 소속 귀족 5명, 그 외에도 상당수의 귀족과 기사가 수도 내에 있는 저택을 비우고 북쪽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각 귀족의 저택에 남아 있던 시종들을 추궁하여 역모를 운운하는 걸 들었다는 증언을 확보했습니다.”
게데스 자작과 그 일당이라면 장로회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는 자들이다.
항상 외척 세력과 네드 주교가 뭐만 하면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자들이라 마음에 안 들었는데, 역모를 모의했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얼마 전에 슈탈랭 영지에서 네드 주교를 모함하기 위한 자료가 발견된 사건이 머릿속에 맴돈다. 예의 사건이 게데스 자작 일당이 꾸민 일이라고 생각하면 앞뒤가 맞아떨어진다.
베아니치 공작은 차라리 사전에 놈들의 움직임을 포착한 것을 기쁘게 여겼다.
“안 그래도 눈엣가시 같은 놈들이었는데 잘됐구나. 왕궁에 가서 대비마마께 긴급회의를 건의하거라. 내 단호히 놈들을 섬멸해야 한다고 청하겠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