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역대급 재능으로 환생-81화 (81/200)

# 81

81화 우둔하면 칼침을 맞는다(1)

“고오오오오!”

라그나로스의 포효가 열기를 싣고 퍼져 나가며 초목의 수분을 거두었다.

벤티버 북쪽 해안에는 한때 베아니치 공작과 외척 세력, 그리고 그들의 사병이었던 잿더미만 그득할 뿐이었다.

고작 세 번의 화염 방출로 이뤄 낸 결과였다.

오래전 한 번의 손짓으로 대군을, 한 번의 입김으로 성벽을 무너뜨렸으며 뭐든지 태우고자 하는 파괴 본능은 억겁이 지나도 여전했다.

금기를 범하여 정령계에서 추방된 정령왕 중에서도 가장 호전적인 성격을 지닌 정령왕, 그것이 바로 라그나로스의 실체였다.

라그나로스는 바다를 가로질러 해안에 상륙했다. 라그나로스 주위의 한층 뜨거워진 열기가 바닷물을 증발시키면서 마치 물안개로 만든 코트를 입은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하였다.

“이렇게 바깥 공기를 마시는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군. 날 깨웠다는 건 바라는 게 있기 때문이겠지. 그렇지 않느냐, 마계의 기운을 풍기는 자들이여.”

라그나로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선 20마리쯤 되는 까마귀가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중이었다. 마계의 기운을 풍기는 자란 하늘에 있는 까마귀 떼를 두고 던진 말이었다.

까마귀는 한시라도 빨리 라그나로스로부터 멀어지려는 양 힘차게 날갯짓하고 있었다.

질문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 불쾌했는지 라그나로스가 하늘을 향해 입김을 내뿜었다.

화르르륵!

브레스를 연상하게 하는 강한 화염이 방사되면서 까마귀 떼를 집어삼켰다. 슈탈랭 영지에서 마나를 잔뜩 흡수한 사두 들개의 브레스가 초라해 보일 정도로 강렬한 화염이었다.

화염이 구름처럼 뭉게뭉게 번져 나가며 사방을 환히 밝혔고, 열기로 인해 지면에 있는 모든 물체가 새까맣게 그을렸다.

피어오르는 화염 속에서 대부분 까마귀가 타 죽었는데, 오직 한 마리만이 목숨을 부지한 채로 추락했다.

까마귀의 몸 주위엔 반투명한 검은색 실드가 둘러져 타 죽는 것만은 면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달아오른 공기를 들이마신 탓에 현기증이 발생했는지 비틀거리며 지면에 부딪혔다.

땅에 떨어진 까마귀는 변신 마법이 풀려서 검은색 로브를 입은 데메그리 교의 사제로 되돌아갔다.

라그나로스는 데메그리 교 사제에게 열기가 덜 닿도록 조절하며 굵직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네놈이 날 봉인석에서 꺼낸 것이렷다.”

열기를 조절했다곤 하나 그래도 막 숯을 꺼낸 숯가마 속의 잔열처럼 고온이 남아 있었다.

데메그리 교 사제는 라그나로스의 위압감에 짓눌려 저도 모르게 절을 올리듯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고, 고대의 위대하신 정령왕이시여.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물으신 대로 봉인을 푼 것은 저희이며 위대하신 존재가 자유롭게 활동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커헉!”

사제의 말 중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는지 사제에게 대량의 열기가 쏟아졌다.

뜨거운 공기가 목을 태우고, 폐부에 한껏 부담을 주며 사제에게 고통을 선사했다.

응당 할 일을 했다는 듯 라그나로스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사제에게 전해졌다.

“미적지근해서 못 들어 주겠구나. 인간이란 존재는 어찌도 그리 한결 같이 온도가 낮은지 모르겠군. 지저분한 존재들을 섬기는 자여, 네게 듣고 싶은 말은 하나뿐이다. 아직 나 이외의 고대 정령왕들은 봉인되어 있느냐?”

데메그리 교의 사제는 목을 부여잡으며 바짝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컥, 컥컥, 봉인에서 풀려난 건 당신뿐입니다.”

“그나마 반가운 소식이군. 다른 녀석들의 모습은 꼴도 보기 싫으니 말이야.”

“고, 고대의 위대한 존재이시여. 이제 저는 물러나도 될는지…….”

사제는 열기의 구덩이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든 데메그리 교 사제의 머리 위로 거대한 불길이 떨어졌다.

라그나로스는 화염이 이글거리는 손바닥으로 사제를 내리찍었다. 손의 화염 속에서 사제의 몸은 삽시간에 시커먼 재가 되어 산산이 흩어졌다.

라그나로스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열기 섞인 한마디를 토해 냈다.

“조금은 발화점이 높은 놈인 줄 알았건만 역시나 미지근하군.”

* * *

라그나로스의 등장은 금세 벤티버에도 전해졌다.

“라그나로스가 나타났습니다! 주민들을 대피시키십시오! 한시가 급합니다! 주민 여러분도 시급히 남쪽으로 대피하실 준비를 해 주십시오!”

수도 방위군에 남아 있던 기사들과 병사들은 재빨리 긴급 재난 시 대피하는 강령대로 움직였다. 비상종을 울리고, 사람들에게 라그나로스가 접근해 오고 있다고 알렸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정도껏이어야지, 난데없는 라그나로스의 접근에 주민들은 대혼란에 빠졌다.

“짐은 됐으니까 대충 챙겨! 길 막히기 전에 빨리 가야 해!”

“라그나로스가 뭔데? 뭔데 그래?”

“야, 이럴 때 한몫 챙겨야지. 빈집이 널려 있는데 그냥 가려고?”

“야, 이 새끼야! 거기 우리 집인데 어딜 함부로 들어가? 죽고 싶어?”

“여보! 놔두고 빨리 가요! 집에 뭐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기다려 봐. 내 저것들 다리몽둥이만 분질러 버리고 바로 따라갈 테니 애들 데리고 먼저 출발해.”

라그나로스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에 성문이 혼잡해지기 전에 빠져나가려는 자, 라그나로스가 뭔지 몰라 어리바리한 자, 혼란을 틈타 한몫 챙기려는 자.

인구수가 50만 명에 이르는 도시이다 보니 가지각색의 부류로 나뉘어 제각각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재앙을 대목 삼아 한몫 챙기려는 자들과 그들을 저지하려는 자들이 뒤엉키며 혼란을 가중시켰다.

모든 시민을 통제하기에는 수도 방위군의 숫자가 너무 부족했다.

안 그래도 남부 지방으로 파견을 나간 자가 많아서 구멍이 많이 생겼는데, 게데스 자작을 쫓는답시고 또다시 대량의 인원이 빠져나가면서 수도에 남아 있는 인원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고작 수백 명으로 수십만 명의 피난을 통제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북문은 안 됩니다! 북쪽 이외의 다른 성문으로 대피하십시오! 북쪽! 북쪽 말입니다! 거기! 북문으로 가지 말라고 계속 말하는데, 사람이 말하면 좀 들으십시오!”

“우리 집에 좀도둑이 들었어요! 저놈 좀 어떻게 해 주세요!”

“나중에 처리해 드릴 테니 지금은 피난부터…….”

“대놓고 들어가서 훔쳐 가고 있는데 왜 가만히 있냐고요! 빨리 좀 가 줘요! 우리 집 다 털리겠네.”

“우리 애 좀 찾아 주세요! 애가 없어졌어요!”

피난 유도에 나선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목이 쉴 지경이다.

경비병들은 이리저리 치이며 지쳐 가는 가운데 잠잠하기 그지없는 왕궁을 바라보았다.

“이런 썩을! 생난리가 따로 없네. 이리 바삐 미쳐 돌아가는데 왕궁에선 왜 아무것도 안 하는 거야?”

* * *

왕궁 안에 남아 있는 자는 거의 없었다.

라그나로스가 출현했다는 소식에 남아 있던 몇 안 되는 귀족마저도 황급히 피난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미네르바와 어린 국왕도 환관과 함께 마차에 올라 피난 준비에 나섰다.

미네르바는 마차 안에서 극심한 편두통을 느끼며 검지로 관자놀이를 꾸욱 눌렀다.

“정말로 라그나로스가 나타난 건가요?”

끝까지 그녀를 보필하기 위해 남아 있던 환관이 진땀을 뻘뻘 흘리며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했다.

“사실입니다, 대비마마. 놈이 벤티버로 다가오고 있으니 시급히 국왕 전하와 함께 피신하셔야 합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네드 주교는 계획서가 모함을 위해 조작된 서류라고 했다고요.”

“그… 유감스럽지만 실제로 계획서대로 실행된 이상 네드 주교가 거짓말을 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피신하여 안전을 도모하고 사태가 진정되었을 때 그를 불러 죄를 물으시지요.”

“아뇨, 전 네드 주교가 거짓말을 한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신을 섬기는 몸으로 거짓말할 리가 없잖아요? 제가 얼마나 기도하고, 헌금을 냈는데……. 분명 무언가 오해가 있는 거겠죠. 마차의 방향을 돌리세요. 신전으로 가서 네드 주교에게 직접 해명을 들어야겠어요.”

“안 됩니다! 여기서 마차를 돌리면…….”

“돌리세요!”

* * *

한편 하니온 왕국의 아슈타르 교 대신전에선 한창 도주하려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네드 주교는 현장의 가운데에서 아슈타르 교 사제를 가장한 데메그리 교 사제들을 지휘했다.

“짐은 최소한으로 챙겨라! 파이넨으로 가서 드래프트 영지의 항구로 돌아간다! 플램 강에 들어서면 예정된 루트로 뿔뿔이 흩어지도록!”

“네드 주교님! 남아 있는 자료는 어떻게 할까요?”

“그걸 질문이라고 하느냐? 전부 태워라.”

신전 깊숙한 곳에는 외부에 공개되면 곤란한 문서가 많이 있었다.

라그나로스 계획과 관련된 자료부터 시작하여 마물을 퍼트려 병력을 남부 지방으로 보내도록 유도한다는 계획서, 그리고 카이둔 국왕이 배신할 경우를 대비하여 보험용으로 남겨 둔 관련 자료까지.

카이둔 국왕이 연루되어 있다는 자료 빼곤 전부 앞뜰에 모아 불태웠다.

그리고 이제 떠나려던 차에 고급 마차 한 대가 대신전으로 들어왔다.

마차의 문이 열리면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급하게 마차에서 내렸다.

미네르바였다.

네드 주교는 눈살부터 찌푸렸다. 어떤 용건으로 온 건지 대강 짐작은 간다. 그래서 짜증 난다.

이웃을 사랑하라느니, 소유는 죄악이며 베푸는 게 선이라고 지껄이는 위선 덩어리인 교리에 푹 빠져 주구장창 기도만 해 대는 여자가 이곳에 온 이유는 뻔했기 때문이다.

“네드 주교, 정말로 라그나로스가 나타났다죠? 이게 어떻게 된 건…….”

네드 주교는 흑마법의 일종인 ‘블랙 사브르’로 손에 마기로 이루어진 검을 소환하였다. 그러고는 일말의 지체 없이 사브르로 미네르바의 가슴을 찔렀다.

푸욱!

시간이 없는 마당에 여태껏 상황도 파악하지 못하고 앵앵거리는 자를 상대해서 뭐하겠는가.

따로 목격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얼마 후면 하니온 왕국 전역이 잿더미가 될 테니 더 이상 입 발린 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이거, 말을 끊어 죄송하게 됐습니다. 지금은 대비마마와 놀아 줄 시간이 없어서 말입니다.”

“네드… 주교…….”

사브르를 빼내자 피가 한껏 쏟아지며 미네르바의 몸은 실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대리청정을 맡아 일국의 최고 권력자로 불리던 사람치곤 허무하기 짝이 없는 최후였다. 능력 없이 목소리만 크던 인물인 만큼 처절한 최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정녕 불쌍한 자는 어린 국왕, 쿠잔이었다.

그는 어미가 죽는 광경을 목격하고도 감정이 없는 인형처럼 멍하니 제자리에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그냥 가만히 앉아 있어라. 아무것도 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라. 가만히 있는 게 네 역할이다.’

친모에게 그리 교육받았기에 어린 나이부터 온갖 더러운 행태를 보아도 모른 척하고, 온갖 망발이 들려와도 귀를 닫고 가만히 있었다.

이렇게 감정을 배제하고 인형처럼 가만히 있는 것만이 아이가 어머니로부터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알고 있다,

자신은 그저 도구에 불과하며 어머니도 그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자신을 낳았을 뿐이란 걸.

네드 주교로선 딱하다는 감정보단 한심함이 앞섰다.

“어리다는 것을 방패로 삼을 정도로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단다. 달리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느냐?”

쿠잔으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전부터 살아 있다는 감각이 없었는데 죽음이라고 가슴에 와닿겠는가.

여태까지 그래 오던 것처럼 생애의 마지막 조롱 앞에서도 귀를 닫고 인형 행세를 일관할 따름이었다.

그에 네드 주교는 아무런 감흥 없이 사브르를 휘둘러 쿠잔의 목, 그리고 환관과 마부의 목까지 모두 베어 냈다.

서걱! 서걱! 서걱!

그러고는 피투성이가 된 마차 안에서 나오며 사제들을 독촉했다.

“쓸데없는 것들 때문에 시간만 낭비했군. 그냥 신전을 통째로 태워 버려라!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일일이 자료를 나르느니 신전을 통째로 태워 버리는 게 빠르겠다 싶어서 명령을 수정했다.

사제들이 기름을 가져오기 위해 창고로 향하려던 찰나,

신전 정문 쪽에서 주문을 영창하는 당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비티!”

5서클 마법에 속하는 광역 마법이 시전자의 수준을 증명하듯 넓게 깔리며 사제들의 몸을 짓눌렀다.

쿠구구궁!

앞뜰에 있던 사제들이 중력의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한쪽 무릎을 꿇음과 동시에, 정문에서 은발 여인이 걸어 들어왔다.

웨이브가 진 은발은 달빛이 내려앉아 결을 따라 흐르고 있었으며 새하얀 피부는 백설도 감히 제 색을 들이밀지 못할 만큼 깨끗했다.

가차 없이 날린 광역 마법과 남다른 분위기를 통해 네드 주교는 여인이 범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게데스 자작의 조력자가 누군가 했더니, 아직 피도 안 마른 꼬맹이였군.”

“정확하게 말하면 조력자의 조력자쯤 되죠.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요?”

“흥, 서투른 재주 하나 믿고 기고만장하게 구는구나. 죽이기 전에 하나만 물으마. 무슨 목적으로 우리를 방해하려 드는 것이냐?”

여인은 누구를 빼다 박은 양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능청스레 입을 달싹였다.

“글쎄요, 전 그냥 황금 열쇠를 회수하는 사람에 불과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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