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82화 우둔하면 칼침을 맞는다(2)
게데스 자작의 저택에서 계획을 짤 때, 루크는 레이아에게 개별적으로 행동할 것을 지시했다.
루크와 게데스 자작 일행은 외척 세력을 처단하고 라그나로스를 저지하는 데 집중할 테니, 레이아는 따로 움직이며 네드 주교를 쳐서 이번에야말로 황금 열쇠를 회수하라고 했다.
레이아가 소란을 틈타 신전에 도착했을 땐 벌써 미네르바 일행은 몰살당한 후였고, 대부분 자료는 소각되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루크의 말에 의하면…….
‘머리에 뇌라는 게 있다면 보험용으로 카이둔 국왕과 관련된 자료는 남겨 뒀을 테지. 이만큼 개고생을 했는데 도마뱀 꼬리처럼 잘려 나가긴 싫을 테니까.’
즉, 하니온 왕국 붕괴를 계획한 책임자인 네드 주교가 물증을 품고 있을 터.
그렇다면 네드 주교를 제외한 나머지 잔챙이들은 빨리 처리하는 게 상책이다.
레이아는 오른손으론 그래비티 마법을 유지하며 왼손으론 또 다른 마법을 장전했다.
“더블 캐스팅! 아이스 필드! 프로즌 오브!”
레이아는 고난이도 기술인 더블 캐스팅을 손쉽게 활용하며 다시금 광역 마법을 시전했다.
그래비티에 눌린 데메그리 교 사제들의 발밑에 서리가 맺히며 냉기가 한껏 피어올랐고, 반투명한 푸른 구체가 전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사제들은 구체에 관통당하는 족족 동사했다.
데메그리 교 사제들도 명색이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고 잠입한 자들이라 실력이 모자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나유저로 따지면 초급, 마법사로 따지면 3서클에 불과한 자들인지라 기껏해야 평범한 기사들이나 감당할 수 있는 실력이기에 그 이상의 실력자 앞에선 맥을 못 추었다.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레이아의 공세 앞에서 데메그리 교 사제들은 강풍 앞의 볏짚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와드득! 와지끈! 와드드득!
데메그리 교 사제들의 몸이 얼어붙었다가 부서지며 삽시간에 머릿수가 줄어드는 가운데, 네드 주교만이 반격에 나섰다.
“블링크.”
네드 주교의 신형이 사라졌다가 그래비티의 영향권 바깥에서 나타났다. 블링크를 쓸 줄 아는 걸로 봐선 최소 4서클 이상의 흑마법사일 터.
때마침 잔챙이 정리가 끝나면서 자연스럽게 레이아와 네드 주교의 일대일 구도가 갖춰졌다.
레이아는 네드 주교가 블링크를 쓰기 직전 보인 눈동자의 움직임을 통해 도착 지점을 가늠하여 마법을 쏘아 냈다.
“파이어볼!”
파이어볼은 네드 주교가 나타나는 곳에 정확히 떨어졌다.
방금 그래비티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네드 주교는 숨을 돌릴 틈도 없이 곧바로 방어 마법을 펼쳐야만 했다.
“허억! 다크 실드!”
검은색 실크처럼 반투명한 흑색 실드가 펼쳐지며 파이어볼을 막아 냈다. 다크 실드의 표면에 부딪힌 파이어볼이 폭발을 일으켰다.
퍼엉!
파이어볼은 폭발을 일으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불길로 네드 주교의 시야를 가렸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상대의 위치 등 정보를 부족하게 만든다.
시각에 의존하여 상대를 공격하고 자신을 지켜야 하는 입장에선 보이지 않는 것만큼 두려운 것도 없었다.
네드 주교는 다크 실드에 마기를 더욱 부여하며 물샐틈없이 방어하는 것에 치중했다. 기선을 제압당했기에 원치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후우웅!
바람이 연기를 걷어 내며 시야가 탁 트였지만 레이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네드 주교의 머리 위에서 레이아의 도발이 날아들었다.
“할 줄 아는 건 가짜 전도와 제 몸 지키는 것밖에 없나 보네요.”
레이아의 팔에 녹색 기운이 머물며 바람으로 이루어진 랜스가 생성되었다.
레이아는 네드 주교를 향해 떨어지며 다크 실드 위로 랜스를 뻗었다.
랜스가 다크 실드 위에 부딪힘과 동시에 맹렬히 회전하며 표면을 강하게 긁었다.
카가가가강!
네드 주교는 윈드 랜스와 격돌하는 실드 표면에 마기를 집중하며 필사적으로 막아 냈다.
“오냐, 네년에게 재능이 충만한 것은 인정하마. 네 주인이 누구냐? 무슨 목적으로 우릴 방해하느냔 말이다.”
“알려 준다고 해도 오래 기억하진 못할 텐데요?”
“빌어먹을 년, 몸이 으스러져도 같은 소리를 지껄일 수 있을지 두고 보자꾸나. 쉐도우 텐타클!”
실드 안에서 네드 주교가 손을 높이 올렸다.
그러자 레이아의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다수의 검은색 촉수가 뻗어 나왔다.
레이아는 윈드 랜스를 풀고 손을 들었다.
“아이스 스피어!”
얼음으로 이루어진 창이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네드 주교는 코앞에 있건만 엉뚱한 곳으로 마법을 시전한 것이다.
네드 사제는 레이아가 급한 나머지 실수한 것으로 생각했다.
“흥, 밑천을 빨리도 드러내는군. 주둥이에 비해 실력은 변변찮구나.”
검은색 촉수들은 기괴한 형태로 꿈틀거리다가 레이아를 옭매기 위해 일제히 몸체를 쭈욱 뻗었다.
철창처럼 사방을 에워싸며 다가오는 촉수들 사이에서 레이아는 냉정하게 더블 캐스팅을 읊었다.
“더블 캐스팅! 푸시! 윈드 커터!”
푸시 마법에 의해 네드 사제의 몸이 실드를 두른 채로 멀찍이 밀려났다. 더불어 레이아의 손에서 뻗어 나온 바람의 칼날이 전방에 있던 촉수들을 잘라 내며 활로를 열었다.
레이아는 활로를 통해 촉수의 포위망에서 빠져나왔고, 윈드 커터는 촉수를 벤 후에도 위력을 유지하며 네드 사제의 블랙 실드를 두드렸다.
카앙! 카앙! 캉! 쩌적!
네드 사제는 윈드 커터의 위력에 블랙 실드에 균열이 가는 것을 확인하고 실드의 형태를 변형시켰다. 몸 전체에 두르고 있던 실드를 전방에 집중시켜 카이트 실드처럼 변형한 것이다.
실드의 면적이 줄어든 대신 실드의 두께가 두꺼워지며 균열이 금세 사라졌다.
게다가 쉐도우 텐타클로 반격한 덕에 전투 개시 이후 시달리던 압박으로부터 겨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반격은 이제부터라는 양 네드 사제가 마기로 이루어진 사브르를 소환하며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상당히 시건방진 짓을 해 주었으니 내 특별히 공을 들여 한 점 한 점 포를 떠 주마. 그 후에 천천히 네년의 주인이 누군지… 커헉!”
푸욱! 즈즈즈즉!
반격에 나서려던 찰나, 하늘에서 아이스 스피어가 떨어져 네드 사제의 어깨를 관통했다. 아이스 스피어의 냉기가 퍼지면서 관통한 부위를 중심으로 몸이 얼어붙었다.
아까 레이아가 하늘로 쏘아 올린 아이스 스피어가 이제 떨어져 네드의 몸을 관통한 것이다.
냉기 때문에 입술이 점점 보랏빛으로 물드는 가운데 네드 주교는 믿을 수 없다는 양 눈을 끔뻑였다.
“내, 내가 실드를 변형시킬 걸 예상하고서? 그,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아이스 스피어가 떨어질 위치와 시간, 그리고 푸시 마법을 쓸 순간을 완벽하게 계산해야만 가능한 일격이었다.
더욱 놀라운 건 윈드 랜스로 실드를 약화시킨 것, 윈드 커터로 실드를 변형하도록 만든 것까지 모두 이 일격을 위한 준비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만약에 네드 사제가 윈드 커터를 실드로 막지 않고 블링크로 피했다면 아이스 스피어를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네드 사제가 서 있는 위치에선 어느 쪽으로 블링크를 쓰던 아까 쓴 아이스 필드의 여파가 남아 있는 장소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기에 사실상 회피해도 불리한 건 마찬가지였다.
“윈드 커터!”
레이아는 저체온증에 시달리며 저 혼자 허연 김을 내뿜고 있는 네드 사제에게 바람의 칼날을 날렸다.
묘비에 새길 말 따윈 묻지 않았다.
그것보다 처리할 수 있을 때 확실히 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바람의 칼날이 공기를 양단하며 일직선를 그리더니 네드 사제의 목을 베어 냈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진 네드 사제의 시신에 다가가서 로브 안쪽에 꽁꽁 숨겨 놓은 두루마리를 꺼냈다.
두루마리엔 라그나로스 계획에 일조한 데메그리 교 사제 일동에게 그에 준하는 보상을 내리겠다는 내용과 함께 겐크 왕가의 옥쇄가 찍혀 있었다.
카이둔이 직접 데메그리 교와 내통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물증이었다.
황금 열쇠를 입수한 레이아는 두루마리를 챙기며 저 혼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판 짜는 거 다른 사람한테는 이렇게 잘 먹히는데 이상하게도 그 사람한테는 안 통한단 말이야. 참 신기해.”
* * *
북쪽 해안을 벗어난 라그나로스는 벤티버로 직행했다. 벤티버의 시가지에서 뻗어 나오고 있는 야경 일부를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야경이 존재할 정도의 도시라면 상당수의 인간이 거주하고 있을 터. 봉인에서 풀려난 직후의 운동감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에 지체 없이 벤티버로 이동했다.
벤티버에 접근하니 성문을 통해 빠져나오고 있는 수많은 인파가 눈에 들어왔다.
한없이 나약하고 하잘것없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라그나로스를 목격하고선 혼란에 빠진 개미 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우와아아아! 왔다! 왔다고! 와 버렸어!”
“제기랄! 뭐든 좋으니 어떻게 좀 해 봐! 왕궁은? 아슈타르 교는? 평소에 기도다 헌금이다 번지르르한 말만 늘어놓으며 혈세를 빨아먹고는 이럴 땐 왜 없는 거냐고!”
라그나로스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열기 때문에 쓰러지는 인간이 속출했다.
참으로 유쾌한 광경이다.
쪼그마한 생명체가 자신보다 거대한 존재에 질려 격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만큼 유쾌한 일이 또 있을까.
공포를 장작 삼아 그의 몸은 더욱 거대해질 것이며 비명 소리를 풍로 삼아 화염의 열기는 더더욱 뜨거워질 것이다.
라그나로스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고오오오오!
고작 한 호흡을 들이마셨을 뿐이건만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화염을 방출하려고 입을 오므린 순간, 라그나로스의 아래에서 주문을 영창하는 소리가 들렸다.
“블링크.”
어느새 다가온 금발의 청년이 블링크를 시전했고, 그의 신형이 사라지더니 라그나로스의 머리 위에서 나타났다.
청년은 손에 검을 쥐고 있었는데, 보랏빛 검신 주변에 마나 블레이드가 맺혀 있었다.
날 제압하기 위해 온 건가?
먼저 덤비는 자를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이런 자를 잿더미로 만드는 것 또한 유흥의 하나이니 부디 발화점이 높은 자이길 바란다.
불길에 쉽사리 타 버려서야 흥이 식지 않는가.
라그나로스는 턱을 치켜들며 청년이 머무르고 있는 하늘을 향해 화염을 내뿜었다.
화르르르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