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83화 고대의 정령왕(1)
지옥의 업화와 같은 불길이 루크의 몸을 뒤덮었다.
초목을 불태우고, 대지에 시커먼 그을음을 남기는 불길인 만큼 사람의 몸뚱이 하나쯤은 가볍게 재로 만들고도 남는다.
멀리서 보고 있던 사람들은 루크가 영락없이 타 죽었을 거라 여기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사람들도 바보는 아니다. 원래 피난 행렬에 쏟아질 예정이던 화염이었다. 루크가 시선을 끌어 준 덕분에 공격이 하늘로 향한 것임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한데 피난 행렬 곳곳에서 몇몇 이들이 화염이 일렁이고 있는 허공을 가리키며 탄성을 자아냈다.
“아!”
긴말이 필요 없었다.
치켜든 검지와 탄성만으로도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전해졌기에.
화염에 뒤덮였던 루크는 보란 듯이 화염 속을 빠져나오며 블링크를 연발했다.
“더블 캐스팅. 블링크, 블링크.”
지면에 발을 딛지 않고 허공에서 블링크를 시전하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몸이 추락하기 전에 복잡한 마나 배열을 마쳐야 하고, 마나 소모량도 지상에서 쓸 때보다 2배 이상 많다.
그럼에도 지면에서 사용하듯 손쉽게 연달아 블링크를 사용하는 루크였다.
하지만 이동 수단보다 더 중요한 것은 루크가 라그나로스의 화염이 작렬하는 열기 속에서도 그을음 하나 없이 멀쩡하다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고대의 정령왕을 사냥하는 일이다 보니 루크는 쉽지 않은 전투가 될 것을 예상하고 사전에 대책을 짜 왔다.
몸 주변에 항시 실드를 유지하는 것은 물론이고, 물 계열의 마법으로 실드 안에 냉기를 가득 채워 열기가 침투하기 못하도록 손을 써 두었다.
멀쩡한 모습으로 접근해 오는 루크를 두고 라그나로스가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흥을 돋울 정도는 되는구나. 좋은 목재일수록 좋은 숯이 된다지. 때깔 좋게 구워 줄 테니 사양 말고 덤비거라!”
라그나로스가 모기를 잡는 시늉을 하듯 루크를 향해 두 손을 강하게 마주쳤다. 라그나로스의 양손 사이에 갇힌 루크는 다시 한번 블링크를 써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화염이 이글거리고 있는 양손이 맞부딪치자 집채만 한 크기의 파이어볼 2개가 충돌한 양 강렬한 폭발음과 열기가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갔다.
콰아아앙!
라그나로스의 체온보다도 훨씬 뜨거운 열기가 한껏 피어오르며 농밀한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단순한 박수마저도 대마법사가 전력을 다해 퍼부은 공격처럼 무지막지하기 그지없다.
‘대신 방어 쪽은 허술하군. 벨 테면 베어 보란 건가.’
루크는 블링크를 연달아 시전한 끝에 라그나로스의 어깨 부근에 다다랐다. 그러고는 검에 대량의 마나를 불어넣어 마나 블레이드를 한껏 확장시켰다.
무기형 마물의 마나 회로를 대량으로 흡수하여 출력과 마나가 한껏 늘어났기에 마나 블레이드는 이전보다 훨씬 예리해져 있었다.
마나 블레이드가 라그나로스의 어깨 위로 떨어지는 순간, 루크에게 원인 모를 위화감이 엄습했다.
무시 못 할 위력을 지닌 마나 블레이드를 앞두고도 놈에게 방어나 회피를 하고자 하는 기색이 안 느껴졌다.
마치 무시해도 된다고 판단한 것처럼 말이다.
불안감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마나 블레이드는 라그나로스의 몸을 덮고 있는 화염에 닿자마자 증발했다.
치이이이익!
달군 프라이팬에 물방울을 떨어뜨리면 증발하며 소리가 나는 것처럼 치익, 소리와 함께 마나 블레이드 일부가 사라졌다.
라그나로스의 불길에 마나를 태우는 마나 번 능력이 가미되어 있던 것이다.
루크는 출력을 높여 마나 블레이드의 위력을 강화해 보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실오라기와 같은 모양새의 마나 블레이드는 화염에 닿는 족족 증발하여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흡사 성냥불에 실을 가져다 대면 타 버리듯 금세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라그나로스는 루크가 어깨 부근에 머물러 있다는 걸 알고선 자신의 어깨를 향해 입을 벌렸다.
고오오오오!
인근에 있는 공기의 흐름마저도 바꾸는 강한 흡입력이 루크의 몸을 당겼다. 라그나로스의 몸속은 숯가마나 다름없기에 만약 휘말린다면 즉시 타 죽을 것이다.
루크는 블링크를 시전해 라그나로스의 어깨 너머로 이동하며 지상으로 내려갔다. 지면에 발이 닿자마자 실드 안의 냉기를 보충하는 등 재정비하는 시간을 가졌다.
‘마나를 두른 검으로 공격하면 마나를 증발시키고, 마나를 두르지 않으면 화염에 검이 녹아내린다. 괜히 고대인들이 봉인이란 수단을 택한 게 아니었군.’
무지막지한 화력과 상처를 입힐 수 없는 몸.
유일한 방법은 라그나로스의 몸체보다 더 강력한 냉기로 화염을 꺼트리고, 그 밑에 자리 잡고 있는 본체를 베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루크의 재능은 화염 계열에 특화되어 있어서 물 계열 쪽은 아무리 마나를 쏟아부어도 원하는 만큼의 위력을 바라긴 힘들었다. 그나마 레이아가 재능을 갖추고 있긴 하나 라그나로스를 제압할 만큼의 힘은 없다.
사실상 물 계열의 마법으로 라그나로스를 제압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랜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면 라그나로스를 벨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단, 그랜드마스터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체험한 적도, 문헌상으로도 남아 있는 정보도 없다 보니 확신할 순 없다.
통할지 모르나 시도라도 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이미 루크의 체내에선 서클의 생성이 진행되고 있었다.
‘오즈 학장의 말대로군. 확실히 화염 계열에 특화된 환경이라 서클 생성 속도가 종전보다 훨씬 빨라졌어.’
라그나로스의 열기는 평범한 열기가 아니다. 정령계에서 추방당하긴 했어도 라그나로스는 정령이다. 정령의 본질은 이 세상의 모든 환경을 조율하는 것이기 때문에 라그나로스쯤 되는 정령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변 환경을 바꾼다.
현재 라그나로스의 주변은 화염 계열에 재능을 가진 자에겐 더할 나위 없는 수련 장소가 되어 있었다.
평범한 환경에서는 온종일 공을 들여야 몇 센티미터가량 움직이던 마나 회로가 지금은 기름칠한 태엽처럼 매끄럽게 움직이고 있다.
벌써 다섯 번째 서클은 완성되었고, 여섯 번째 서클도 절반가량 만들어졌다.
오즈 학장의 이론대로라면 그랜드마스터가 되기 위한 조건은 마나마스터이자 6, 7서클 마법사의 경지를 갖추는 것이라 하였다. 고로 빠르면 6서클, 늦으면 7서클 때 변화가 찾아올 것이다.
라그나로스는 루크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로 갔나 했더니 거기 있었군. 초반의 기세는 어디 갔느냐? 고작 한 번 공격하고 전의를 상실한 건 아니겠지?”
“전혀. 나이 먹고 불장난이나 치는 방화범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 중이었지.”
“주둥이 나불거릴 여유가 있는 걸 보니 제 풀에 지쳐 나가떨어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죽이려고 덤벼드는 상대가 좋나 보지? 취향 한번 독특하군.”
“세상 살아가는 데 있어 여흥이 없다면 시체나 다름없지. 즐길 거리를 주는 자를 싫어할 리 없지 않느냐.”
“건달의 사고방식이군. 좀 더 건설적으로 살지그래?”
“우문이구나. 네놈은 태풍이나 해일에 삶의 방식을 묻더냐? 내가 곧 환경이니 적응하지 못하는 자는 죽을 뿐이지.”
“그래서 환경을 바꿔 가며 살아온 인간이란 종족을 무서워하는 건가? 인간을 향한 호전성은 공포심에서 비롯된 거였군. 보기보다 겁쟁이인걸?”
“크하하하! 재미있는 견해로구나. 시건방지긴 해도 바닥에 이마를 비비는 놈들보단 낫군. 이 시대가 지루하지만은 않다는 걸 증명해 줘서 고맙구나.”
라그나로스는 다시금 숨을 들이마시며 화염을 내뿜었다.
번들거리는 화염을 똑바로 직시하자니 저절로 눈매가 가늘게 좁아졌다.
“더블 캐스팅. 블링크, 블링크.”
화염의 범위가 워낙에 넓어서 블링크를 연달아 시전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범위 내에 머물러 있었다.
이윽고 화염이 루크를 집어삼키며 실드를 뜨겁게 달궜다.
쩌적! 쩌저적!
공격을 받아 내는 것도 한계에 이르렀는지 실드가 비명을 질렀다. 무려 가진 마나의 7할을 쏟아부어 만든 실드이건만 벌써 균열이 생겼다.
루크는 화염 속에서 빠져나와 실드에 마나를 보충하여 균열이 간 부위를 보강했다.
‘여섯 번째 서클을 완성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해. 녀석이 먼저 실드를 부수느냐, 실드가 부서지기 전에 6서클이 되느냐. 거기서 승패가 갈리겠군.’
생각을 정리하는 와중에도 화염은 계속 쏟아졌다.
단순히 피하는 것처럼 보여도 루크는 동시에 세 가지 일을 하는, 실로 섬세한 작업을 펼치는 중이었다.
실드를 유지하면서 실드 내부의 냉기를 유지하고, 라그나로스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블링크로 미리 빠져나가며 화염에 갇히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내부에선 계속 마나 회로를 움직여 서클을 생성하고 있었다.
그나마 화염 계열 수련에 최적화된 환경이라 많이 집중하지 않아도 원활하게 서클을 생성할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라그나로스는 한쪽이 공격하고, 한쪽이 회피만 하는 패턴에 질렸는지 공격을 멈추었다.
“아무래도 노림수가 있나 보군. 하지만 패를 너무 아껴도 지겨운 법이지. 피차 불놀이나 하러 온 게 아니니 슬슬 종지부를 찍자꾸나.”
라그나로스가 종전보다 입을 훨씬 크게 벌리며 긴 숨을 내쉬었다. 마치 잠수하기 전에 호흡을 한껏 들이마시려고 준비하는 것처럼 말이다.
숨을 들이마시는 것만 봐도 여태까지와는 궤를 달리하는 규모의 공격이 올 거란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피하는 것은 고사하고 실드가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다.
더 이상의 회피를 무의미하다.
피하려고 신경을 쏟느니 맞받아칠 수 있는 화력을 갖추는 데 집중하는 게 맞다.
루크는 준비 중이던 블링크와 실드 안에 냉기를 공급하기 위해 발현하던 마법을 중단하고 모든 마나를 서클 생성 쪽으로 돌려 박차를 가했다.
고오오오오오.
코앞에서 역대급 화력이 작렬하려는 순간에도 루크는 조금도 조급해하지 않았다.
조급해하는 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에.
게다가 라그나로스를 풀어놓고 나중에 제압하여 영웅 자작극을 펼치는 건 원래 카이둔 국왕의 작전이다.
즉, 카이둔 국왕은 이미 라그나로스를 제압할 수단을 갖춰 두었기에 이와 같은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카이둔 국왕이 할 수 있다면 루크도 할 수 있을 터.
물론 카이둔 국왕과 달리 루크는 정면 대결을 택하였으니 제압하는 방법이 판이하게 다르긴 하다. 하나 수단의 차이가 있다고 한들 카이둔 국왕 정도의 인물이 할 수 있는 걸 못해서야 대륙 정벌이 어디 가당키야 하겠는가.
이윽고 장전을 마친 라그나로스가 가슴을 한껏 부풀리더니 화염을 내뿜었다.
지금까지 내뿜은 화염보다 훨씬 뜨겁고, 범위는 몇 배나 더 넓었다.
루크의 전신이 화염에 비치며 벌겋게 물들어 가던 찰나.
간발의 차로 여섯 번째 서클이 완성되었다.
오즈의 이론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실제로 루크는 여섯 번째 서클을 완성함과 동시에 몸속에서 크나큰 변화가 생겼음을 느낄 수 있었다.
변화의 결과가 그랜드마스터의 경지임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루크는 자신의 몸에 찾아든 변화를 감지하곤 라그나로스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종지부를 찍는 건 그쪽이 아니라 내가 될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