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84화 고대의 정령왕(2)
본래 마법사는 심장 주변에 마나 회로를 둘러 서클을 만든다. 마나는 서클 안에서 회전하면서 마나 배열에 적합한 성질을 띤다.
보통은 심장 주변에 만드는 것을 루크는 상체 전체에 테두리를 두르듯 큰 원을 만들었다.
이 방법이 일반적인 마법사의 성질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마나유저의 특징까지 포함한다는 것이다.
마나유저의 경우 몸 전체에 마나 회로를 뻗음으로써 신체 능력의 향상을 꾀하고, 마나 본연의 힘만을 끌어내어 전투에 적용할 수 있다.
대신 마법사처럼 마나의 성질을 바꾸어 사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나 고유의 흩어지려는 성질을 붙잡아 둘 수단이 필요하다. 그 심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검이나 창 등의 무기이다.
단순하게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마법사: 마나 배열 방식. 일회용. 심지 역할을 맡을 도구가 필요하지 않음.
마나유저: 마나 주입 방식. 지속적으로 사용 가능. 심지 역할을 맡을 도구 필수.
한데 만약 허공에 마나를 배열하여 기술을 발현했는데 해당 기술이 지속성까지 띠고 있다면?
마법사의 화력과 응용력, 마나유저의 유지력과 관통력을 모두 갖추게 되는 셈이다.
루크는 자신에게 찾아온 변화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능력처럼 새로운 경지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단박에 알았다.
화르륵!
라그나로스가 전력을 다해 내뿜은 화염이 전방에서 날아들었다. 바닷물이 화염으로 되어 있고, 거기서 해일이 일어나면 이와 같은 풍경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광경이었다.
그걸 보는 순간 루크의 몸은 본능적으로 오싹한 감각을 느끼며 위험하다는 경고를 날렸다.
참 아이러니하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 이르러서야 그 어느 때보다 살아 있음을 실감하게 되니 말이다.
어쩌면 살아 있음을 자각하기 위해 일부러 이런 길만 택하는 걸지도 모른다.
거대한 화염 앞에서 그랜드마스터의 경지를 곧바로 시험할 수 있게 되어 기뻐하는 내가 있다.
루크는 검 끝에 시선을 두며 허공에 마나를 배열했다.
“투영.”
그랜드마스터는 미개척된 경지다 보니 해당 경지의 현상을 두고 어떻게 해석하느냐도 정형화되어 있지 않다.
누군가는 마법사의 관점에서, 누군가는 마나유저의 관점에서 해석할 것이다.
루크의 경우 후자였다. 자신의 본질은 검에 있다고 여겨 그랜드마스터의 이치를 가미하여 검을 쓰기로 작정했다.
루크의 머리 위, 마나로 이루어진 검이 만들어졌다. 검의 크기는 장장 5미터에 달했으며, 주변에 그 크기에 걸맞은 마나 블레이드가 둘러졌다.
마나 오라와 마나 블레이드를 발하기 위해선 심지 역할을 맡을 무기가 필요하다는 정설을 완전히 뒤집은 기술이었다.
생성된 검은 루크가 손에 쥔 검을 모사하듯 똑같은 각도로 움직였다.
루크는 쥐고 있는 검을 허리 옆으로 당기곤 허리를 힘껏 비틀어 발검했다.
후우우우웅!
투영된 검이 똑같이 횡을 그으면서 바람이 일었다.
폭풍은 화염을 좌우로 갈랐으며 투영된 검에 맺힌 마나 블레이드는 전방으로 뻗어 나가며 라그나로스의 몸에 직격했다.
치이이익!
라그나로스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화염에 깃든 마나 번은 여전히 건재했다. 투영된 검의 마나 블레이드가 라그나로스의 화염에 닿자마자 증발했다.
이전 마나마스터의 경지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증발하는 속도가 훨씬 느리다는 것이다.
불에 닿은 종이는 금세 타올라 재가 되지만 나무는 불길에 휩싸여도 한동안 자기 형태를 유지하는 것처럼, 그랜드마스터가 되며 한층 농밀해진 마나 블레이드는 완전히 증발하기 전에 화염 속으로 파고들어 라그나로스의 옆구리를 베어 냈다.
라그나로스는 강렬한 통증에 몸을 휘청이며 손으로 옆구리를 감쌌다. 고통이 주는 아픔은 라그나로스도 인간과 다르지 않을 텐데도 놈은 도리어 즐거워하였다.
“크윽, 크흐흐. 오랜만에 고통이라는 걸 느껴 보는구나. 그래, 이런 감각도 존재했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취향 참 고약하군.”
“감각 일부가 결여된 삶이란 생각보다 지루하지. 부디 제대로 즐기기 전에 죽진 말아다오.”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투영검을 갖춘 루크와 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라그나로스.
두 존재가 서로를 향해 달려들면서 신화 속에서 나올 법한 전투가 벌어졌다.
루크와 라그나로스를 제외한 나머지 이들은, 레이아부터 게데스 자작 일행과 피난민까지 전투 광경을 지켜보았다.
정말로 신화 속에 남을지도 모르는 전투의 산증인이 되는 영광을 마다할 자는 없었다.
전투라는 것이 이토록 숭고하고도 장엄할 수도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루크가 검을 휘두르면 라그나로스의 화염이 갈라졌고, 라그나로스는 몸에 상처가 늘어나는 와중에도 일절 물러섬 없이 가진 것을 모두 토해 냈다.
갈라진 화염 사이로 새로운 화염이 뻗어 나오며 불꽃이 허공을 끊임없이 점유했고, 투영검은 마치 일류 요리사의 조리 과정을 재현하는 양 화염을 가르고 라그나로스의 몸에 칼집을 남겼다.
전투는 날이 밝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동쪽 지평선에 태양이 고개를 내밀며 더 이상 라그나로스의 화염 없이도 주변이 환히 보일 즈음.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만 같던 라그나로스의 화염이 멎었다.
쿠웅!
힘이 다한 라그나로스가 비틀거리며 땅 위에 쓰러졌다.
몸 주위에 피어오르던 화염은 온데간데없고, 흑색의 상반신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흑요석을 닮은 매끈한 본체 곳곳에 베인 자국이 만연했다.
사람으로 치면 전신에 깊은 검상을 입은 격이다.
그럼에도 끝까지 전력을 다해 공격했다. 마치 머릿속에 물러섬이란 없는 것처럼 검상이 벌어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격만을 한 탓에 쓰러뜨리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단순하기 때문에 단단하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정령이었다.
루크는 잿불처럼 은은한 열기만이 남아 있는 라그나로스에게 다가서며 투영검을 해제했다.
“남길 말이 있다면 들어 주지.”
라그나로스는 간신히 팔을 들어 올리며 엄지와 검지를 살짝 벌렸다.
“종이 한 장 차이였는데 아깝구먼.”
파괴 본능을 가진 정령만 아니었다면 엄지를 치켜들었을 넉살이었다.
불의 본질은 태우는 것에 있으니 어찌 보면 가장 불꽃의 본질에 근접한 정령이었을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인간의 관점이 있는 것처럼 정령에게 정령의 관점이 있을 테다. 인간이 정령의 본질을 논해 봤자 사족에 불과할 테지만 굳이 논하자면 본능에 충실했다고 평하고 싶다.
이내 라그나로스의 본체가 하단 부분부터 재가 되어 흩날리며 서서히 소멸되었다.
이윽고 머리끝까지 모두 소멸되었을 때, 라그나로스의 본체가 있던 자리에는 엄지만 한 붉은 구슬이 남아 있었다.
루크는 붉은 구슬을 집어 들며 면밀히 살펴보았다.
“내단… 같은 건가?”
이런 건 오즈 학장이 잘 알고 있으니 영지에 돌아가서… 아니다. 레이아도 다방면으로 박학다식하니 보여 주면 무슨 물건인지 알려 줄 것이다.
나중에 물어볼 요량으로 주머니에 붉은 구슬을 넣어 두었다.
그와 동시에 등 뒤에서 함성이 쏟아졌다.
“와아아아아!”
저 멀리서 피난을 가지 않고 숨죽여 전투를 지켜보던 이들이 루크를 향해 환호성을 터뜨렸다.
그들 모두 날밤을 새워 눈이 붉게 충혈되고, 미지근해진 강물에 몇 번이고 들락날락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들의 눈에 루크는 영웅 그 자체로 비쳤을 것이다.
실제로 그에 준하는 활약을 보였고 말이다.
광활한 벌판 위에 흩날리는 재를 등진 채로 서 있는 한 사내와 그에게 환호하는 사람들.
주인 잃은 땅의 한가운데에서 상징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 * *
가장 큰 난관이었던 라그나로스 사냥은 끝났다.
제아무리 강철 같은 체력을 지닌 루크라도 전투 후에 지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쉬기에는 아직 할 일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카이둔 국왕이 무엇 때문에 마물이며 라그나로스를 이용하려 했던가.
바로 하니온 왕국을 집어삼키기 위함이다.
계획의 결과물까지 온전히 손에 넣어야 완벽한 성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루크는 휴식을 취할 틈도 없이 곧바로 하니온 왕궁에 입성했다. 그러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대회의장에 있는 왕좌에 앉았다.
루크를 따라 대회의장에 들어온 게데스 자작, 그리고 작전에 가담한 하니온 왕국의 귀족 일동은 한창 웃고 떠들다가 루크의 행동에 웃음기가 싹 가셨다.
“루크 백작님, 저희는 당신이 왕좌에 앉으신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는지요?”
“이전에 카이둔 국왕과 약조한 것이 있습니다. 주인 없는 땅이 생길 시 공왕이 될 권리를 주기로 했지요. 마침 이 땅에 주인이 없으니 권리를 행사하기에 안성맞춤 아니겠습니까?”
“루크 백작님껜 목숨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하니온 왕국이며 저희는 대대로 하니온 왕가에 충성을 바쳐 왔습니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듯 하니온 왕가의 직계 자손에게만 충성을 다하겠다는 맹세를 저버릴 순 없습니다.”
아직 게데스 자작은 미네르바와 어린 국왕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고 있었다.
난리 중에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도리가 없었고, 라그나로스란 재앙 앞에서 감히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른다면 알려 주면 될 일이다.
루크는 왕좌 옆에 서 있는 레이아에게 눈길을 보냈고, 레이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전했다.
“하니온의 국왕 전하와 대비마마는 네드 주교의 손에 돌아가셨어요. 제가 네드 주교를 처리하러 가니 앞뜰에서 명을 달리하셨더군요.”
“네드 주교가? 그자가 어찌…….”
“아마 라그나로스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듣고 같이 피신할 겸 사정을 들으러 갔다가 안타까운 일을 당하신 것 같아요.”
어린 국왕, 비오테 칸 쿠잔은 하니온 왕가의 유일한 직계 자손이었다. 사실상 그가 죽음으로써 하니온 왕가의 대가 끊긴 것이다.
대가 끊겼으니 하니온 귀족들의 맹세도 무의미하게 되었다.
더불어 지금 이 순간, 루크와 게데스 자작 사이에 오간 약속이 유효하게 작용했다.
“게데스 자작님, 분명 작전을 펼치기 전에 한 가지 약속을 했을 겁니다. 선택해야 할 때 저를 지지하기로 했었지요. 맹세를 중히 여길 줄 아시는 분이라면 무효화된 맹세보다 효력이 유효한 쪽을 택할 거라고 믿겠습니다.”
게데스 자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약속을 맺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루크가 말하는 ‘선택의 때’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만약에 루크가 지금 이 상황을 가정하고 약속을 내민 것이라면 사전에 쿠잔의 죽음을 예측하고 있다는 게 된다.
장내에 있는 자들 중 누가 루크의 능력을 부정하랴.
무력이며 지략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적 능력도 최악의 영지라던 드래프트 영지를 부강하게 만들며 모두가 인정할 실적을 남겼다.
다만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고, 타국의 인물이 왕이 되는 것이니 거부감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었다.
“약속은 약속이니 지켜야겠지요. 하지만 저희가 미숙한지라 인식 때문에 다소 거부감이 드는 건 사실입니다. 백작님의 실력을 직접 목격한 저희도 이런데 생면부지의 지방 귀족들은 어떻겠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지방 영주들이 반발하며 때아닌 내전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안 그래도 미네르바와 외척 세력의 폭정 때문에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내전까지 벌어지면 국력을 회복하기는커녕 이대로 나라 전체가 폭삭 무너질 수도 있었다.
그에 루크는 명쾌한 대답을 내놓았다.
“일단 해 보고 문제가 생기면 그때 가서 또 생각하면 될 일입니다. 해 보기도 전에 두려워해서야 무엇을 취할 수 있겠습니까?”
게데스 자작을 포함한 귀족 일동은 찬물이라도 끼얹은 양 침묵했다.
변화를 무서워해서야 어찌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요 며칠간 루크가 보여 준 모습은 지배자의 귀감이나 다름없었다.
원하는 것이 있기에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하고,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듯한 희박한 확률에 목숨을 걸어 기어코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 과정에 있어 부정이란 조금도 없었고, 온전히 실력만이 있었을 뿐이다.
루크가 보여 준 일련의 과정들이야말로 그들이 바랐던 왕의 모습이지 않은가.
갑작스러운 변화가 무서운 나머지 저도 모르게 회피하는 태도를 취한 것이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게데스 자작은 결심을 세운 듯 결의에 찬 표정을 지으며 스스로 몸을 낮추었다.
“구 하니온 왕국의 귀족 일동, 주군께 충성을 다하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