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85화 공왕이 될 권리
루크는 게데스 자작을 비롯한 하니온 귀족들의 맹세를 받은 후에야 휴식을 취했다. 라그나로스와의 일전으로 몸은 한계에 다다라 있었으며 피로 때문에 혈액 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손발의 끝이 저렸다.
루크는 당연히 국왕의 침실을 이용했다.
피로 때문에 옷을 갈아입는 것도 귀찮은 나머지 방에 들어서자마자 쓰러지듯 침대 위에 엎어졌다.
얼마쯤 잤을까?
기절하듯 잠든 후에 문득 눈을 뜨니 아침 햇살이 쨍쨍하게 방 안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 피곤했는데 고작 한두 시간 만에 깬 듯하다.
그런데 분명 자기 전에는 로브를 입은 채였는데 일어나니 실크 잠옷으로 바뀌어 있었다. 게다가 이불까지 꼭 덮어 준 걸로 봐선 자는 동안 누가 갈아입혀 준 것 같다.
때마침 누군가가 말도 없이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방에 들어온 이는 레이아였다.
레이아는 루크가 깨어 있는 줄 몰랐는지 어깨를 들썩였다.
“아휴, 놀래라. 아직 주무시고 계신 줄 알았어요.”
“실크 침대에 실크 잠옷이라니. 침대에서 미끄러지지 않은 게 다행이군.”
“그거 제가 갈아입혔으니까 안심하세요. 아무래도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가 없어서요.”
“수고했군.”
“수고랄 게 뭐 있나요. 고생은 루크 씨가 다 하셨죠. 아, 이젠 공왕 전하라 불러야 할까요?”
“아직 정식으로 공표된 게 아니니 백작이면 충분해.”
“알겠어요, 백작님.”
“꽤 피곤했는데 몇 시간밖에 안 잤나 보군.”
“네? 아~ 진짜로 푹 주무셨나 보네요. 이틀 동안 내리 주무셨어요.”
“이틀씩이나?”
“네, 배고프시죠? 바로 식사 준비시킬게요.”
“그렇게 해 줘. 그리고 내가 자는 동안 경과도 보고 부탁해.”
잠시 후 레이아의 지시를 받은 궁녀가 간단한 식사를 가져왔다.
루크는 침실 내에 비치된 테이블에 쟁반을 놓고 빵을 뜯으며 이틀간 있었던 일에 대해 보고받았다.
먼저 게데스 자작이 지금까지의 사건을 모두 상세히 서술한 공문을 작성하여 지방 영주들에게 발송했다고 한다.
그리고 대대적으로 하니온 왕국 내에 있는 아슈타르 교 사제들을 체포하여 이송할 것을 명했으며 아슈타르 교 신전에 주어진 토지를 모두 회수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틀간의 일을 낱낱이 보고한 레이아는 가져온 서류를 내밀었다.
“이건 네드 주교를 처리하고 얻은 서류예요. 하니온 왕국 정복에 성공하면 데메그리 교 사제들에게 합당한 보상을 주겠다는 내용이에요. 서류 마지막엔 겐크 왕국의 옥쇄가 찍혀 있었고요.”
“어디 보지. 음, 나쁘지 않군. 이거라면 카이둔 국왕도 발뺌 못 하겠지.”
“바로 사용할 건가요?”
“아니, 이걸 내밀면 전쟁이 벌어질 테니 좀 더 지금은 준비하는 게 나아. 공왕 자리에 올라서 국력을 끌어 올린 후에 사용할 생각이야.”
“그런 거라면 저는 끼어들 틈이 없겠네요. 마탑으로 돌아가서 공부나 더해야겠어요.”
“슬슬 비행 부대 실습도 해야 할 테니 그러는 게 좋겠지. 그러고 보니 서클 생성은 어떻게 됐어?”
애당초 레이아도 라그나로스의 열기가 만들어 내는 환경에서 수련하고자 같이 길을 나섰던 것이었다.
루크야 그랜드마스터의 경지를 이룩했으니 당초의 목적을 이룬 셈이지만 레이아는 어떻게 됐는지 아직 듣지 못했다.
그녀는 해맑게 웃으며 손가락을 V 자로 치켜들었다.
“5서클의 벽을 아주 가루로 만들어 버렸죠.”
“6서클이 됐나 보군.”
“백작님은요? 라그나로스 상대할 때보니까 난생처음 보는 기술을 쓰시던데, 그랜드마스터의 경지에 속한 기술 맞죠?”
“맞아.”
“후우,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실감이 안 되네요. 아는 사람이 전설의 경지에 오르다니.”
“그 나이에 6서클에 오른 것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야.”
“상대적으로 보면 제 일이야 빈약한 축에 속하죠. 아무튼 축하드려요. 아 참, 옷을 정리하다 보니까 이런 게 나오던데, 어디서 얻은 거예요?”
레이아가 주머니에서 붉은 구슬을 꺼냈다.
무언가 귀중품이라 생각하여 따로 어딘가에 넣어 두기보단 직접 가지고 있는 게 안전할 거라고 판단한 듯하다.
루크는 그녀의 손바닥 위에 있는 구슬을 집어 들며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라그나로스가 죽은 후에 떨어진 물건인데 뭔지 알아보겠어?”
“흐음, 글쎄요. 고대의 정령왕이 죽은 경우가 처음이라 이런 물건이 떨어진다는 것조차 몰랐네요.”
“그렇다면 오즈 학장에게 물어도 똑같은 대답이 돌아오겠군.”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래도 정령과 관련된 물건이니 저명한 정령사라면 알지도 몰라요.”
“이게 뭔지는 나중에 알아보는 걸로 하고, 쌓여 있는 일거리부터 처리해야겠군.”
루크는 일단 공왕의 절차부터 밟을 생각이다.
그래야 미네르바와 외척 세력 때문에 누더기처럼 꼬질꼬질해진 현행 법률을 바꿀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 뒤엔 국력을 회복하는 데 힘쓰며 차근차근 본거지를 드래프트 영지에서 벤티버로 옮길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려면 가장 먼저 아직 설득하지 못한 지방 귀족들의 회유가 급선무다. 지방 귀족들이 등을 돌려 그들을 토벌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면 그 숫자만큼 새로운 귀족을 채워야 한다.
카이둔 국왕이라면 자기 사람을 새 귀족으로 집어넣으며 어떻게든 훼방할 터.
그러니 사전에 아예 공석이 생기지 않도록 손을 써 두는 것이 상책이다.
손은 이미 써 두었다.
벤티버에 입성하기에 앞서 보험을 들어 두고자 파이를 그란데 백작령에 보내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슬슬 효력을 발휘할 때가 되었다.
* * *
루크의 부름을 받고 회의에 참석한 장로들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방 영주들에게 지금까지의 사건 경위를 담은 공문을 보내면서 비밀리에 국명이 하니온 공국으로 바뀔지도 모르며 차기 공왕은 루크가 될 거란 내용을 담아 보냈다.
대화의 장은 언제나 열려 있으니 현 상황에 불만이 있는 자는 솔직하게 자기 의견을 밝히라는 내용까지 덧붙였다.
갑자기 나라의 명칭이 바뀌고 새로운 왕가가 탄생하는 것이니 대부분 불만을 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각 지방에서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게데스 자작은 지방에서 보내온 회신을 종합하여 보고를 올렸다.
“너무 의외라서 다른 의미로 놀랐습니다. 지방 영주들의 9할 이상이 백작님의 공왕 즉위를 지지한다는 의견을 보내왔습니다. 배부한 공문이 200건, 돌아온 답변이 120건이긴 한데… 그렇다 치더라도 이미 과반수가 지지한 셈입니다.”
이미 공왕 즉위는 확정되었다고 판단했기에 게데스 자작을 대하는 루크의 말투는 평대로 바뀌어 있었다.
“다 죽어 가던 영지를 도와주었으니 지지를 안 할 수가 없지.”
“또 무슨 마법을 부리신 겁니까?”
“그란데 백작에게 미리 전언해 뒀을 뿐이야.”
“전언이라면?”
“그란데 백작령의 병력을 이끌고 드래프트 영지의 병력과 합류하여 마트리 항으로 가 달라고 부탁했지. 아마 한참 전부터 하니온 남부 지방의 마물을 토벌했을 거야. 활동하면서 내 이름을 댔을 테니 지방 영주들에게 나의 인식이 긍정적으로 박혀 있었을 테지.”
파이를 전령 삼아 그란데 백작에게 마물 토벌에 가담해 달라고 전했다.
드넓은 남부 지방을 감당하려면 드래프트 영지의 병력만으로는 부족하다. 하지만 그란데 백작령의 병력까지 합치면 숫자가 꽤 되니 어렵지 않게 남부 지방의 마물을 토벌할 거라고 판단하였다.
덕분에 따로 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손쉽게 지방 영주를 회유할 수 있었다.
지방 영주들을 어떻게 회유할지를 두고 이틀 내내 고민한 게데스 자작이다. 그래서 자신의 고민이 사전에 해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지방 영주들의 반발까지 염두에 두고 미리 작업하신 겁니까?”
“겸사겸사 처리한 거지. 처음엔 자작을 만나러 갈 때 자작이 배신할 경우를 대비한 수였으니까. 만약에 자작이 우릴 수상히 여기고 미네르바에게 밀고하면 우리가 하니온 왕국에 들어온 이유를 설명해야 하잖아? 마물 토벌에 일조하기 위한 사전 시찰이었다고 말할 생각이었지.”
“아~ 그래서 처음에 제게 레이아의 호위 기사라고 하신 거군요. 지금이니까 드리는 말씀이지만 처음부터 밀고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거야 결과론적인 이야기지.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럼 지금 남부 지방에선 그란데 백작령과 드래프트 영지의 병력이 활동 중이겠군요.”
“아마 지금쯤이면 토벌을 마치고 이리로 오고 있겠지. 병력이 도착하면 드래프트 영지로 돌아갈 생각이야. 정식으로 공왕의 절차를 밟고 돌아올 테니, 자리를 비운 동안의 일 처리는 게데스 자작에게 맡기도록 하지.”
“열과 성을 다하여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루크는 이미 영웅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렇기에 하니온 왕국의 민심을 휘어잡는 건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성가신 건 카이둔 국왕 쪽이다.
가진 권리를 사용하는 것이지만 카이둔 국왕은 철석같이 아레나 공국의 공왕을 생각하고 내준 권리였다.
서면상으로는 ‘주인 없는 땅을 차지할 권리’라고 표기되어 있으니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드래프트 영지와 하니온 왕국의 영토를 다 합치면 겐크 왕국보다도 영토가 넓다. 카이둔 국왕으로선 루크가 본국보다 큰 규모의 영토를 소유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진 않을 것이다.
분명 온갖 방해를 할 테지.
그래도 문제없다.
이쪽은 황금 열쇠를 쥐고 있으니까.
물론 당장 사용할 생각은 없다. 하나 황금 열쇠를 쥐고 있단 뉘앙스를 풍기기만 해도 쉽사리 움직이지 못할 터.
남작에서 백작으로, 그리고 이번에는 공왕으로.
계단을 두세 개씩 성큼성큼 뛰어오르며 무력뿐만 아니라 직위도 정점을 향해 올라가는 루크였다.
* * *
겐크 왕궁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왕의 침소.
침소 안에선 지금 막 카이둔 국왕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치고 있었다.
콰앙!
테이블이 한껏 몸서리치자 셰리주가 담긴 술병이 강하게 흔들렸다.
이어서 카이둔 국왕의 호통이 떨어졌다.
“실패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카이둔 국왕의 앞에는 검은 로브를 입은 사내가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까마귀 모습으로 날아들어 침소에 방문한 데메그리 사제는 담담히 방금 보고한 사항을 재차 입에 담았다.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네드 주교는 사망했고, 라그나로스는 소멸되었다고 합니다.”
“라그나로스가 소멸되었다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냔 말이다! 네놈, 사실대로 고하는 게 좋을 게야. 대정령왕용 병기를 다른 자에게 팔아넘긴 건 아니겠지?”
“전하 이외의 다른 이에게 하나뿐인 병기를 팔아 무슨 이득을 보겠습니까? 소문에 따르면 루크 백작이 단독으로 라그나로스와 맞붙어 제압했다고 합니다.”
“루크 백작? 또 그놈인가! 잠깐, 누가 누구랑 단독으로 붙어?”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루크 백작이 단독으로 라그나로스를 제압했습니다. 수만 명의 목격자가 있으니 거짓이라 보긴 힘들겠지요.”
정말로 믿기지 않는 소식이다.
라그나로스가 어떤 존재인가.
일국을 멸하고도 남을 힘을 지닌 고대의 정령왕이다.
그런 괴물을 혼자서 제압했다.
그 말인즉슨 루크가 일국을 멸하고도 남을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계획이 무너진 것의 책임을 논할 때가 아니었다. 만약에 루크가 겐크 왕궁을 향해 검을 겨눈다면 일이 어마어마하게 커질 것이다.
대륙 정벌을 논하기는커녕 겐크 왕국의 존속을 걱정해야 할 판국이었다.
“크윽, 놈은 공왕이 될 권리를 가지고 있어. 분명 하니온 왕국을 지배하겠다고 나서겠지. 골치 아프게 됐군.”
사제는 카이둔 국왕의 걱정을 읽곤 방책을 내놓았다.
“루크 백작 본인부터 무너뜨리려고 하면 움직임을 읽히기 쉬우니 아랫사람부터 공략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중요할 때 반기를 들도록 만들자는 건가?”
“때마침 이런 일에 적격인 정령사 한 명을 알고 있습니다. 타 종족 사람이라 일이 틀어져도 잘라 내면 그만이니 뒤탈을 걱정할 필요도 없지요.”
카이둔 국왕은 잠시 고민하더니 언제 당황했냐는 듯 냉정을 되찾으며 고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하니온 왕국 공략 실패 건을 만회할 기회를 주지. 여차할 때 내분을 일으킬 수 있게 확실히 작업을 마쳐 두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