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역대급 재능으로 환생-86화 (86/200)

# 86

86화 하니온 평정, 그 후의 막간(1)

하니온 왕국 중부 지방의 어느 평야 지대.

추수가 끝나고 황갈색의 마른 속살을 드러낸 평야 한복판에선 근 1만 명에 이르는 대군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들은 그란데 백작령과 드래프트 영지의 군대였다.

약 한 달 전, 그란데 백작은 루크의 전언을 받았다.

“전언! 전언! 병력 이끌고 마트리로! 시커먼 애들 사냥해 줘! 빨리! 빨리!”

전후 사정 따윈 개나 줘 버린 전언이었던지라 해석하는 데 꽤 애를 먹었다.

파이가 시도 때도 없이 ‘빨리빨리’를 외쳐 대는 통에 하는 수 없이 직접 드래프트 영지로 넘어가서 제랄드에게 해석을 부탁했다.

“아~ 저희랑 같이 마트리로 병력을 이끌고 가서 마물 토벌에 가담해 달라는 내용이군요. 응? 응응, 그렇군.”

“이번에는 또 뭐라고 하는 건가?”

“식량을 싣고 가서 구호 활동도 겸하라고 하더군요. 지방 영주들도 포섭해 두라고 하는데, 그 부분은 그란데 백작님께서 잘하시니 맡기겠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었다.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던 이가 어째서 하니온 왕국에 있는 것이며, 어쩌다 구호 활동 및 타국의 귀족들을 포섭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제랄드에게 물어보니 폐관 수련은 위장에 불과하고, 실제론 마법을 수련하기 위해 하니온 왕국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하지만 루크가 하니온 왕국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타국에 병력을 이끌고 가기엔 여러모로 명분이 부족했다. 루크의 부탁이니 웬만하면 들어주고 싶지만 그란데 백작에게도 입장이란 게 있으니 말이다.

이왕 드래프트 영지에 들른 차에 레이아나 보고 가려 했는데 쉬이 흘릴 수 없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레이아 아가씨 말씀이십니까? 아가씨도 루크 백작님과 함께 하니온 왕국으로 떠나셨습니다. 네, 둘이서 떠나셨지요.”

루크와 레이아가 둘이서만 함께 활동하고 있다는 말에 지금까지의 고민이 단번에 사라졌다.

명분이고 나발이고 그것이 뭣이 중요하던가.

딸아이가 사위로 삼고 싶은 사내와 둘이서 여행을 떠났으며 그들이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

마물 토벌? 구호 활동? 귀족 포섭?

까짓것 얼마든지 해 주지.

그리하여 그란데 백작의 병력이 드래프트 영지의 병력과 합류하여 하니온 왕국에 오게 된 것이었다.

그 후엔 기존에 남부 지방에서 활동하던 하니온의 토벌대와 함께 마물을 토벌하고, 지방의 영주를 포섭했다.

그란데 백작은 마물 토벌을 끝낸 후, 하니온의 토벌대와 헤어져 루크가 기다리고 있는 벤티버로 향했다.

루크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역시 레이아와의 진도를 물어보는 게 우선이었다.

벤티버로 향하는 내내 그란데 백작의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란데 백작의 군대를 드래프트 영지군이 뒤따르고 있었다.

드래프트 영지의 군대를 이끌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제랄드였다.

아레나 공국와의 전쟁 이후, 제랄드는 마나 회로가 적다는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판단했고, 병법 공부에 몰두했다.

줄곧 루크의 곁을 보좌한 경험과 아레나 공국에서의 사투를 밑거름 삼아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을 키웠고, 지금에 이르러 그 재능이 만개했다.

이번 마물 토벌에서도 유감없이 용병술을 발휘하여 루크의 빈자리를 메웠다.

제랄드는 러스트와 나란히 말을 몰고 이동하며 혀를 내둘렀다.

“수련하러 갔다가 일국의 영웅이 되다니, 정말이지 백작님의 행동은 예측할 수가 없군요.”

“어디 하루 이틀 겪는 일인가. 휴가 중에도 이득을 취할 사람이니 쇠락해 가고 있는 왕국에서 영웅으로 추앙받는 것쯤이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

“제발 휴가 좀 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원체 쉬질 않으시니 요즘 들어 ‘천재 박명’이란 말이 왜 있는지 실감하는 중입니다.”

“그거 말인데, 20대에 몸을 혹사시키던 습관이 30대 때도 계속되니까 몸이 버티지 못하는 게 아닐까? 지금이야 괜찮을지 몰라도 우리 백작님도 슬슬 나이가 있으니 걱정되긴 하는구먼.”

“결혼이라도 하면 조금 나아지시려나.”

“에잉, 바랄 걸 바라야지. 누가 그 성격 감당하겠어? 우리 백작은 가정보다 일을 택할 사람이야.”

“그럼 같이 일할 수 있는 배우자를……. 하아, 그래서야 본말전도군요.”

“우리 백작님 같은 유형은 본인보다 기가 더 센 사람이 꽉 조이는 수밖에 없어.”

“그런 사람이 존재할까요?”

“글쎄.”

제랄드의 시선이 러스트의 어깨로 옮겨 갔다.

러스트의 어깨에는 파이가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전속력으로 해협을 건너 그란데 백작령까지 이동한 데다, 하니온 왕국에 도착한 후에도 쉬지 않고 마물 토벌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으니 피곤한 게 당연했다.

파이는 꾸벅꾸벅 졸다가 머리를 크게 휘청이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 잠이 덜 깼는지 푸른 눈을 끔뻑이며 뜬금없는 인사를 연발했다.

“다녀왔습니다! 다녀왔습니다!”

자다 깨서 집인 줄 알고 무심결에 집에서 인사를 하는 것처럼 잠꼬대하는 파이였다.

제랄드는 이왕 파이가 깬 김에 루크와 레이아에 대해 물었다.

“파이, 백작님과 레이아 아가씨 둘 사이는 어떻든?”

“무슨 사이?”

“남녀 사이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나 싶어서 말이야.”

“몰라! 몰라!”

“하긴 아직 네겐 이른 감이 있는 분야이긴하지.”

“제랄드는 이론박사! 이론만 빠삭해!”

“요거 봐라. 앵무새 주제에 사람 뼈를 때리네.”

러스트가 품에서 간식을 꺼내어 파이에게 먹여 주며 초탈하게 웃었다.

“하하, 뭐 우리끼리 이러쿵저러쿵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긴 하지. 백작님의 부담을 덜 수 있게 주변에서 받쳐 주는 게 최선 아니겠나. 내가 보기엔 자네도 쉬어야 한다고 생각하네만.”

“백작님께서 끊임없이 정진하고 계시는데 아랫사람으로서 어찌 마음 편히 쉬겠습니까. 어쨌든 간만에 백작님을 뵐 생각을 하니 기대되는군요. 일단 축하 인사부터 드리고, 그 뒤에 드래프트 영지의 근황과 마물 토벌 과정을 보고하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 논해야겠지요.”

“기뻐 보이는구먼.”

“주군께 충성을 다하는 것이 제 삶의 보람이자 기사로서의 존재 의의이니 말이죠. 아, 빨리 벤티버에 도착하지 않으려나.”

루크를 보지 못한 약 두 달간 더더욱 충성심이 높아진 듯한 제랄드였다.

저쯤 되면 거의 병이다.

러스트는 눈앞에서 루크 교의 광신도 한 명이 탄생하는 광경을 목격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드래프트 영지의 병력이 근래 들어 자신들을 괴롭히던 마물들을 퇴치해 주었다.

게다가 드래프트의 영주는 라그나로스를 쓰러뜨려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 냈고, 막대한 양의 식량을 풀어 기근에 허덕이는 자들의 배를 채워 주었다.

민심이란 단순히 자유와 정의를 열창한다고 움직이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정치가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던가.

자신들의 삶을 개선시켜 주길 바란다.

족보나 전통을 논하는 건 배부른 자의 외침에 불과하다.

지금 하니온 왕국의 상황이 딱 그러했다.

루크가 하니온 왕국의 정치판에 개입하자마자 횡포를 부리던 아슈타르 교 신전이 차례차례 철거되고, 위세를 떨던 외척들은 단박에 몰락했으며 마물의 위협에 두려워하던 생활에서 벗어났다.

그러니 하니온 왕국의 백성들이 지지를 안 할 수가 없었다.

“그거 들었어? 루크 백작이 우리나라의 왕이 될지도 모른대.”

“그게 가능해? 다른 나라 귀족이잖아.”

“겐크 국왕이 공왕이 될 권리를 줬다나 뭐라나. 어차피 하니온 왕가도 대가 끊긴 마당에 누가 왕이 되든 똑같은 소리 나오지 않겠어? 이왕이면 잘하는 사람이 낫지.”

“고기도 뜯어 본 놈이 안다고 망해 가던 땅을 재건한 사람이니 잘하겠지.”

온통 지지하는 의견으로 일색인 가운데 그란데 백작과 제랄드가 이끄는 병력이 벤티버에 도착했다.

루크는 형식적인 환영 절차를 밟으며 그들을 맞이한 후 곧바로 그란데 백작과 제랄드, 러스트를 따로 불러 대화를 나누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란데 백작님.”

“수고랄 게 뭐 있나. 부모가 딸아이의 안전을 위해 발 벗고 나서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

“레이아를 위해 마물 토벌에 나섰다고 말씀하시면 제게 갚아야 할 빚이 줄어들지 않을 겁니다만?”

“그걸로 됐네. 빚도 재산이라 한다지. 남겨 놔야 할 빚이라면 남겨 두는 게 바람직하지.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네.”

“말씀하시지요.”

“정말로 단독으로 라그나로스를 쓰러뜨린 겐가?”

그란데 백작의 질문에 제랄드와 러스트가 귀를 쫑긋 세웠다.

여기 오는 내내 확인하고 싶었던 사항이다. 벤티버 시민 모두가 증인이니 믿어 의심치 않아도 될 사실이긴 하나 본인 입을 통해 듣고 싶었다.

루크라면 남들이 모르는 방법을 썼을지도 모른다.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니까.

루크는 숨기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일이었기에 쿨하게 있는 그대로 말했다.

“일대일로 붙어서 재로 만들었지요.”

“어떤 방법을 쓴 건가? 고대에도 제압하지 못해서 봉인하는 게 고작이었던 존재인 걸로 아네만.”

“그랜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더니 베어지더군요. 그게 전부입니다.”

마치 책만 읽고 만점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듣고 있는 쪽이 바보가 되는 듯한 대답이었다.

그나마 제랄드와 러스트는 루크가 그랜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겠다는 목적으로 하니온에 갔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기에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여태껏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보란 듯이 해내는 모습을 수차례 보아 왔기에 남들보다는 면역이 생겨 있었다.

하지만 면역이 없는 그란데 백작은 숨넘어갈 듯 놀라며 말까지 더듬었다.

“그, 그, 그, 그랜드마스터? 농담이면 정말로 화낼 걸세.”

“단독으로 라그나로스를 쓰러뜨린 게 그 증거이지요.”

“허어, 갈수록 점점 멀어지는구먼. 격차가 더 벌어지기 전에 마탑에 입학시켰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

“마탑?”

“아무것도 아닐세. 그나저나 따로 할 얘기가 있다고 했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문제까진 아니고, 장차 크게 일 하나 벌여 볼까 싶어서 미리 준비해 두고자 합니다.”

“일? 일 좋지.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돕겠네.”

그란데 백작은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지금 소문이 떠들썩한 공왕 즉위 건을 말하는 줄 알았다.

그란데 백작의 처가가 하니온 왕국의 명문가이기에 즉위 이후 정책을 개편할 때 도움을 주는 건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장차 사위가 될지도 모르는 이가 강국을 건설한다는 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정작 루크의 입에선 그란데 백작의 예상과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루크의 발언은 아까와는 다른 의미에서 그란데 백작을 놀라게 만들었다.

“조만간 겐크 왕국을 집어삼킬 생각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