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87화 하니온 평정, 그 후의 막간(2)
루크는 공왕의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겐크 왕국을 집어삼킨다고 선언하였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어디서 함부로 역모를 꾀하냐고 호통을 칠 정도로 위험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루크의 말은 하니온 왕국, 겐크 왕국, 아레나 공국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왕국을 세우겠다는 야심가의 발언처럼 들렸다.
루크의 폭탄 발언 앞에서 제랄드와 러스트는 흔들리는 기색 없이 ‘담담히 올 게 왔구나’ 하고 여겼다.
제랄드는 오래전부터 루크가 대륙 정복의 야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러스트의 경우 이전에 겐크 왕궁의 꼬락서니를 직접 목격했기에 언젠가는 루크가 칼을 뽑아 들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한 가지 염려되는 게 있다면, 이 자리에 있는 자 중 유일하게 그란데 백작만이 외부인이라는 것이다.
몇 년간 알고 지냈고, 다른 귀족들에 비하면 그나마 제정신이 박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계획에 가담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귀국한 후에 밀고하면 루크만 곤란해진다.
하지만 루크에게 익숙해진 제랄드는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다. 반대로 생각하면 말해도 되기 때문에 이야기를 꺼낸 것이지 않겠는가.
“그란데 백작님과는 이미 협의를 마친 겁니까?”
사전에 이미 협의를 마쳤다면 그란데 백작 앞에서 대놓고 거사의 뜻을 밝힌 게 납득이 된다.
제랄드가 나름대로 궁리하여 내놓은 대답이었는데 안타깝게도 간발의 차로 빗나간 듯하다.
루크는 엄지와 검지를 종이 한 장만큼 벌리며 오답이라 말하였다.
“방향은 맞았는데 한 걸음이 부족하군.”
“방향이라도 맞으니 다행이군요.”
그란데 백작도 보통내기는 아닌지라 드래프트 영지식 대화를 금세 간파하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잘 알겠네. 이미 자네에게 깊이 연관되어 있으니 거사를 벌이면 나 또한 자네 편으로 인식되겠지. 자네에게 가담하지 않으면 이너프 산맥과 골디브 사이에서 고립되어 죽게 된다, 그리 말하고 싶은 거 아닌가?”
정확하게 짚었다.
그란데 백작 본인이 부정한다고 하더라도 겐크 왕궁에선 루크 세력의 일부로 판명할 것이다.
천재 마법사라 불리는 딸이 드래프트 영지의 마탑에 다니고 있고, 루크의 하니온 왕국 제패에 지대한 조력자였으며 그란데 백작 또한 병력을 이끌고 타국으로 넘어와 루크에게 협조하였다.
고압적인 성격의 카이둔 국왕이 과연 그란데 백작을 가만히 놔둘까?
그란데 백작이 뭐라 한들 적당한 구실을 갖다 붙여 처리할 것이다.
그러니 그란데 백작에겐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하나 제랄드에 이어 그란데 백작도 루크에게 종이 한 장만큼 모자랐다는 평가를 받았다.
루크는 그란데 백작에게도 엄지와 검지를 벌리며 오답이라 말하였다.
“이번에도 방향은 맞았는데 너무 멀리 나가셨군요. 제가 그란데 백작님께 가담을 강요하는 게 아닙니다. 아마 그란데 백작님이 제발 함께하게 해 달라고 말하게 되겠지요.”
“응? 대체 뭘 숨기고 있고 있길래 그리 자신만만하게 말하나? 그렇게까지 뜸을 들이니 현기증이 날 지경이구먼.”
그란데 백작의 재촉에 루크가 미리 준비해 둔 서류를 넘겼다. 레이아가 네드 주교에게서 얻어 낸 서류이자 겐크 왕국을 삼킬 수 있는 황금 열쇠였다.
서류에는 카이둔 국왕이 데메그리 교 사제들과 협력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고, 옥쇄가 찍혀 있었다.
서류의 내용을 본 그란데 백작은 대로하며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콰앙!
“일국의 국왕이라는 자가 오물보다도 못한 이들과 손을 잡아? 마물 소동을 일으킨 것도, 라그나로스의 봉인을 푼 것도 전부 카이둔 국왕의 수작이란 것이지 않은가!”
전쟁에 미친 왕이라 할지라도 승리하기만 한다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지름길을 걷는 셈이니, 끝까지 신하가 된 자의 도리를 다하고자 마음먹었다. 그래도 나태한 왕보다는 야심을 가진 왕이 낫다고 생각하며 끝까지 지켜보고자 했다.
하지만 아무리 야심에 미쳐 있어도 건드려선 안 되는 부분이 있는 법이다. 데메그리 교와 손을 잡은 것은 카이둔 국왕이 둘 수 있는 수 중에서 최악이었다.
충성의 맹세도 상대가 사람일 때나 유효한 것이다. 누구도 개돼지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고 싶어 하진 않는다.
그란데 백작은 한 치의 오차 없이 루크가 예언한 대로 말하였다.
“자네에게 협조하겠네. 아니, 자네가 말려도 가담할 테니 그리 알게.”
“모두 상황이 파악된 듯하니 계획을 짜 봅시다. 이 문서는 황금 열쇠이긴 해도 함부로 열쇠 구멍에 꽂아 넣었다간 큰코다치기 십상이지요. 확실하게 계산하고 사용해야 합니다.”
“그 부분은 나도 동의하네. 유리를 세공하듯 섬세한 작업이 필요할 테지. 자칫 잘못 사용했다간 대륙 열강들이 개입할 여지를 제공하게 될 테니 말일세.”
만약 이 문서가 세간에 공표된다면 그란데 백작 외에도 수많은 귀족이 맹세를 파기하고, 겐크 왕가로부터 등을 돌릴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 사이에서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힐 것이며 인간의 나라 중에서 최강국이라 불리고 있는 신성 제국의 군대가 들이닥칠 것이 분명했다.
그 말인즉슨 문서를 공표하기만 해도 카이둔 국왕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역사가 증명해 왔듯 타국의 군대가 개입하여 정권이 교체되면 간섭이 이어진다.
신성 제국을 비롯한 타국의 군대가 개입하는 것은 루크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니 좀 더 효과적으로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루크는 테이블 위에 있던 문서를 그란데 백작 앞쪽으로 밀었다.
“이 문서는 그란데 백작님이 가지고 있으십시오.”
“내가? 힘들게 얻었을 텐데, 자네가 쓰지 그러나?”
“전 문서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만 풍길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카이둔 국왕을 압박하기엔 충분하겠지요. 그란데 백작님껜 물밑 작업을 맡기겠습니다. 이 문서를 가지고 중립인 겐크의 지방 영주들을 포섭해 주십시오.”
타국의 개입을 막으려면 그 전에 속전속결로 끝내야 한다.
문서를 공표한 직후 삽시간에 승부를 보려면 그에 준하는 사전 작업이 필요한 법이다.
그란데 백작이라면 동기가 확실하니 배신할 염려가 없고, 지방 영주 가운데선 명문가에 마당발이니 물밑 작업을 맡을 자로선 적격이라 할 수 있었다. 조금 건조하게 말하자면, 레이아가 드래프트 영지에 있으니 함부로 루크를 배신할 수 없는 처지이고 말이다.
뭐, 어디까지나 감정을 빼고 실리만 놓고 봤을 때의 이야기일 뿐이다. 실제로 레이아를 볼모로 사용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란데 백작은 문서가 가진 무게를 알고 있기에 결의에 찬 표정으로 문서를 손에 쥐었다.
“중대한 사안이니 신중을 기하여 움직이겠네. 아마 원하는 만큼 포섭하려면 시간이 걸릴 걸세. 그 부분은 감안해 주게.”
“물론입니다. 속도보단 은밀함에 치중해서 움직여 주십시오.”
“그리고…….”
“달리 또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
“만약 거사에 성공하면 엘리나 왕녀님의 처우는 어떻게 할지 궁금해서 말일세.”
법률상 데메그리 교와 결탁한 자는 계급을 막론하고 종교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에 처한다. 판결의 영향력은 결탁한 당사자에서만 그치지 않고 친족에게까지 미친다.
가족도 데메그리 교와 연관되어 있다면 당연히 사형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신성 제국으로 이송되어 십수 년 이상 수도원에서 살아야 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엘리나는 겐크 왕국의 현실을 직시하고 개혁을 꾀한 몇 안 되는 사람이었으며 개인적으로도 루크와 친분이 있다.
그란데 백작으로선 상당한 시간 동안 그녀의 세력에 있었기에 마냥 모른 척하기가 힘들어 민감한 사안인 걸 알면서도 입을 연 것이었다.
그에 대한 루크의 대답은 단호했다.
“능력이 있다면 살아남을 것이고, 없다면 풍파에 휩쓸려 묻히겠지요.”
그녀와는 어디까지나 공적인 협력 관계에 불과하다.
그녀의 감정이 어떻든 공과 사는 확실하게 구분해야 한다.
남의 동정을 받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수준이라면, 애초에 그녀가 부르짖던 개혁이란 목표는 능력 없는 자의 허세였던 셈이다.
살아남기 위해선 그녀 혼자만의 힘으로 허세만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수밖에 없다.
지극히 루크다운 대답이었으며, 다른 이의 위에 서는 자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덕목이었다.
그란데 백작은 사족이었음을 시인하며 문서를 고이 접어 품에 넣었다.
“우문이었군. 구분해야 할 건 해야겠지. 돌아가면 바로 작업에 착수하겠네.”
* * *
이후에 루크는 게데스 자작에게 공왕 즉위 때까지 해야 할 일을 지시하곤 드래프트 영지로 출발했다.
마트리에 상주하던 선박들을 모두 파이넨으로 불러들였고, 1만 대군과 함께 파이넨으로 이동하여 선박에 탑승했다.
항해하는 몇 달 동안 평범한 여행자처럼 돌아다니면서 생긴 습관 때문에 여러 사건이 발생했다.
한 번은 로브에 얼룩이 묻어 여행할 때처럼 갑판에 올라가 직접 로브를 빨고 있는데 제랄드가 기겁하며 달려왔다.
“백작님! 백작님쯤 되시는 분이 직접 빨래를 하시다뇨! 얼른 이리 주십시오. 너희는 대체 뭘 하고 있었느냐! 백작님께서 직접 손에 물을 묻힐 때까지 가만히 있다니, 정신이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호들갑 떨긴. 얼룩 좀 생겨서 문지른 것뿐이야.”
“아무리 그래도 직접 하실 일이 있고 아닌 일이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병사들에게 들었는데 방 정리까지 직접 하셨다지요?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서운한 게 있으시면 말로 해 주십시오.”
“여행 중에 습관이 되어서 말이야.”
“안 되겠습니다. 다시 귀족다운 습관이 몸에 배도록 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드래프트 영지에 도착할 때까지 뭐든 직접 하시는 건 금지입니다. 병사들에게 돌아가면서 시중을 전담하게 할 테니 그리 아십시오.”
“그러라고 키운 병사들이 아닐 텐데?”
“뭐라고 말씀하시든 이것만큼은 양보 못 합니다. 자꾸 속상하게 하시면 갑판을 뜯어다가 가마를 만들어 드릴 겁니다.”
그날 밤 제랄드가 병사들을 모아 놓고 호되게 몇 마디를 했는지 귀국할 때까지 루크가 뭐만 하려고 하면 병사들이 득달같이 달려와 시중을 들었다.
여행 중에는 어떤 일이든 혼자서 해결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오니 귀족이 얼마나 대접받고 사는 계층인지 뼈저리게 실감했다.
더불어 대부분 귀족이 왜 머리가 굳고 나태해지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일 덕에 돌아가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선박은 드래프트 영지에 다다라 있었다.
하니온 왕국에서의 일화가 드래프트 영지에 전해졌는지 항구에 루크를 축하하기 위한 환영 인파가 모여 있었다.
영지민들의 환호성 속에서 하선했는데 옷에 왕가의 문양을 수놓은 무리가 다가왔다. 그들은 루크가 귀국하기만을 줄곧 대기하고 있었는지 막 하선한 루크에게 대뜸 왕명을 전달했다.
“루크 백작님, 국왕 전하께서 이번 사건의 해명을 듣고자 하십니다. 지정된 날짜까지 왕궁에 와 주십시오. 이는 왕명이니 불참은 전하의 뜻을 거역하는 걸로 간주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