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88화 붉은 구슬의 정체(1)
왕궁으로부터의 호출은 예견된 일이었다.
왕궁의 시선에서 보면 자국의 귀족이 예고도 없이 타국으로 넘어가 그 나라의 대소사에 관여한 셈이다.
법률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곤 하나, 고리타분한 관습에 절어 있는 자들의 입장에선 불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하니온 왕국을 집어삼키려 했던 카이둔 국왕은 남 좋은 일만 한 것이니 짜증이 나 있을 테고, 블린트 왕자파는 한 번 보류한 루크의 공왕 즉위가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기에 비상이 걸렸을 것이다.
루크가 하니온의 공왕이 되면 아레나 공왕이 되는 것보다 일이 훨씬 성가셔진다.
아레나보다 하니온의 영토가 훨씬 크다. 게다가 현재 아레나 공국의 귀족들은 카이둔 국왕이 직접 임명한 자뿐인데, 하니온에는 기존의 귀족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루크를 방해할 수가 없다.
그러니 적어도 루크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귀국하자마자 호출하는 강수를 둔 것이다.
루크는 옥쇄가 찍힌 두루마리를 전해 받으며 왕궁에서 파견한 이들에게 답변을 내놓았다.
“전하께 지정된 기간까지 상경하겠다고 전해 드려라.”
“루크 백작님께서 오시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저희는 일정이 바빠서 이만 올라가 볼 테니 대접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멀리 나가지 않도록 하지.”
“네, 그럼 물러나 보겠습니다.”
답변을 들은 기사들은 형식적인 예를 갖추며 바로 돌아갔다.
본래 왕궁에서 파견한 이들에겐 대접을 후하게 하고 돌려보내는 것이 관례이기에 파견을 나온 이들도 이를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기사들은 대접의 대 자조차 꺼내지 않고 돌아갔다. 대접을 받는 것보다 육안으로 확인한 것들을 카이둔 국왕에게 보고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처럼 말이다.
기사들이 보인 일련의 행동만 봐도 왕궁에서 바쁘게 물밑 작업을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루크를 뒤따라 하선한 러스트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못마땅해하였다.
“참 나,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국격을 높인 셈이니 빈말로라도 수고했다고 할 법한데 다짜고짜 죄인으로 취급하는군요.”
“예상했던 바야. 저쪽이 생각한 대로 움직여 주는 머저리란 걸 스스로 입증해 줬으니 오히려 기뻐해야지.”
“그리 신랄하게 말씀하시면 제가 할 말이 없지 않습니까. 그나저나 언제까지 오랍니까?”
“청문회는 열흘 후에 열린다는군. 쉴 생각 말고 바로 올라오란 거겠지.”
“안일하군요. 주변에서 통사정을 해도 쉬지 않는 사람한테는 씨알도 안 먹힐 계책인데 말입니다.”
“제발 쉬어 달라는 말을 참 우회해서 말하는군. 말솜씨가 많이 늘었어, 러스트.”
“하하하, 마탑 파수견 3년 차면 주문을 영창한다지 않습니까. 모두 말솜씨 좋은 주군 덕분이지요.”
말하는 것만 보면 어지간한 인간보다 더 인간 같다. 전신을 가리고 대화하면 누가 러스트를 두고 오크라고 생각할까.
마탑이 설립되고 도서관을 유치하면서 일반인들에게도 개방했는데, 현재까지 가장 많은 책을 대여한 자가 바로 러스트였다.
이전에 겐크 왕궁에서 열린 승전 기념 행사 때도 귀족 못지않은 예절과 기품을 선보인 것만 봐도 개인적으로 얼마나 공부를 많이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항해 중에 제랄드가 호들갑을 떤 것도 그렇고, 러스트가 능글맞게 쉬라고 권유하는 것도 그렇고, 왜 그리 사람을 쉬게 하지 못해서 안달인지 모르겠다.
노력이 곧 성과로 이어지진 않지만 성과를 내려면 노력이 필수인 건 어린아이라도 아는 일이다. 상업만 놓고 보더라도 고자본, 고투자, 고수익이 기본인 것처럼 높은 가치를 지닌 몸뚱이는 굴리면 굴릴수록 많은 성과를 얻기 마련이다.
대부호 상인들이 왜 자신의 집을 저당까지 잡히며 자금을 마련하여 계속 투자를 하겠는가. 묵혀 둬 봤자 손해란 걸 알기 때문이다.
정말 자신이 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몸을 사리지 않는다.
누누이 말하지만 영혼에도 지방은 끼는 법이다.
루크는 부두에 준비되어 있던 말에 오르며 앞으로의 일정을 논했다.
“나도 금방 상경할 생각은 없어. 일주일쯤 있다가 올라갈까 해.”
“일주일? 그건 그거대로 영지에 너무 오래 머무르시는 거 아닙니까? 1초라도 늦으면 잡아먹을 기세로 달려들 텐데 말이죠.”
“파이를 타고 이동하면 이틀쯤 걸리겠지. 일주일 동안 그간 밀린 업무랑 청문회 대비를 하고 올라가도 늦지 않아.”
“파이를 탄다면야 시간은 문제가 없을 테지만 혼자 가시게 될 텐데 괜찮겠습니까? 또 혼자 떠난다고 하시면 제랄드 녀석 숨넘어갈지도 모릅니다.”
“그리되면 인공호흡은 네게 맡기지.”
러스트는 머릿속에서 상상해 버렸는지 소름 끼친다는 양 몸서리를 쳤다. 그러고는 익살스러운 손놀림으로 가슴에 십자가를 그리며 농담을 던졌다.
“전사의 마음가짐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일이군요. 전 그냥 명복이나 빌어 주렵니다.”
“무슨 얘기를 그리 즐겁게들 하고 계십니까?”
병사들을 챙긴다고 뒤늦게 선박에서 내린 제랄드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에 루크가 방금까지 나누던 대화의 연장선에 해당하는 말을 꺼냈다.
“입술의 부재로 2계급 특진, 미리 축하하지.”
러스트도 웃으면서 루크의 말을 거들었다.
“미안하네. 생리적으로 무리라서 말일세.”
언제나 그렇듯 드래프트 간부계의 마스코트인 제랄드를 놀려 대는 두 사람이었다.
이제 막 대화에 참여한 제랄드는 맥락을 알 수 없어 눈만 멀뚱멀뚱 끔뻑일 따름이었다.
* * *
루크는 시가지를 가득 메운 환영 인파를 가로질러 저택에 복귀했다.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던 드골과 집무관 일동이 엄숙하게 예를 갖추며 루크를 맞이해 주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백작님. 하니온 왕국에서의 활약을 들었습니다. 또 한 단계 위업을 쌓아 올리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 말도 돌아올 때마다 들으니 지겹군.”
“평범한 사람은 이렇게 지겹다는 말을 하는 것조차 불가능하지요. 그리고 왕궁에서 서신을 가져온 자들이 백작님을 뵈러 항구로 떠났는데, 만나 보셨습니까?”
“만났어. 대접은 됐다며 급하게 서신만 주고 가 버리더라고.”
“보름 전부터 여기서 백작님이 오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머무르면서 대접이란 대접은 다 받았지요.”
“그래? 보름 동안 대접받아 놓고도 그리 생색을 내던 거였나. 왕궁 기사단도 날이 갈수록 질이 떨어지는군.”
말에서 내리며 드골과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마당 한편에 쌓여 있는 짐 더미가 루크의 눈에 들어왔다. 저택 내에서 사용하는 일용품을 주문한 것치곤 상자를 두르고 있는 천이 꽤 고급스러웠다.
어떤 것은 비단에 싸여 있었고, 어떤 것은 비싼 향나무를 깎아 만든 상자였다.
하나같이 귀중품을 포장할 때나 쓰는 재료들이다.
루크는 마당에 쌓여 있는 상자를 지목하며 입을 뗐다.
“내가 없는 동안 과소비하는 습관이 생긴 건 아닐 테지?”
“허허허, 그럴 리가요. 전국 각지의 상인들이 보내온 선물입니다.”
“상인들이 공짜로 물건을 퍼 줄 린 없을 테고, 뭔가 바라는 게 있나 보군.”
“드래프트 영지에 상인 길드를 입점하고 싶다는군요. 하니온 왕국의 소식이 날아든 날부터 사방에서 선물과 투자 문의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드래프트 영지에 상인 길드를 유치하려는 자는 없었다. 루크 백작가에서 자체적으로 대규모 유통 라인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고, 이너프 산맥 때문에 드래프트 영지의 안팎을 오가려면 배보다 배꼽이 더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니온 왕국이 공국화 될 것이란 소문과 루크가 차기 공왕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루크가 공왕이 되더라도 원래 그의 영지였던 드래프트 영지의 통치권은 여전히 그에게 남아 있다. 즉, 드래프트 영지도 하니온 공국의 영토로 편입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리상으로 바다를 두고 떨어져 있는데, 행정상으로는 같은 나라에 속하는 땅인 셈이다. 그것이 무엇을 말하느냐. 바로 관세가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드래프트 영지와 하니온 공국만 오가도 막대한 이득을 남길 수 있으니 상인들이 군침을 흘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상인 길드를 유치하려면 해당 영지의 관청에서 허가해야 한다. 그런 까닭에 너도나도 유치권을 따내고자 앞다퉈 선물을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보내온 선물을 현금화하면 못해도 수십억 루소에 달하는 금액이라 하니, 현재 상인들 사이에서 드래프트 영지가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분명 상인들의 눈에는 황금 알을 낳는 거위로 보일 것이다.
“땅에 떨어진 돈을 마다할 필요는 없겠지. 선물 중에서 현금화할 수 있는 건 해서 예산에 편입시켜 둬.”
“안 그래도 그리 말씀하실 줄 알고 분류해 뒀습니다. 상인 길드 유치는 어떻게 하실는지요?”
“조만간 상인들을 모아다가 유치권을 경매해야겠군. 로비를 하든지 말든지 자유롭게 놔두되 네 선에서 그치도록 해 둬. 알아서 돈을 바친다는데 뜯을 수 있는 만큼 뜯어먹어야지.”
현재 드래프트 영지의 경제력은 겐크 왕국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최근에는 아레나 공국에 각종 물자를 팔아서 막대한 흑자를 남기고 있었다. 로메우의 뒤를 이어 아레나 공국의 공왕이 된 레들리는 아직도 로메우가 싸지른 똥을 치우느라 허덕이는 중이다.
레들리 공작령도 원랜 드래프트 영지 못지않은 경제력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아레나 공국의 예산을 충당하느라 파산 직전에 몰려 있다고 한다.
카이둔 국왕이 심어 둔 귀족들 중에 제대로 된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아래로 가야 할 돈이 중간에 새고 있으니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세금이 증발할 수밖에…….
이래서 세상일이란 타이밍을 잘 맞춰야 하는 법이다.
당장 권리를 행사하느냐 잠시 보류하느냐에 따라 누구는 있던 돈도 없어지고, 누구는 가만히 있어도 돈이 들어오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니 말이다.
루크는 저택에 귀환하자마자 옷만 갈아입고 곧바로 집무실에 들어앉았다. 그러고는 드골을 불러다가 영지의 근황을 물었다.
“부재중에 있었던 일부터 보고받도록 하지.”
“특별히 보고할 만한 일은 없습니다. 곡식 수확량이 전년 대비 1할가량 늘었고, 영지민들을 대상으로 마물 대비 안전 교육을 실시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추가로 마물이 목격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마물이라고 하니 생각났는데, 아무래도 정보 부대의 정원을 2배로 늘리는 게 좋을 것 같아.”
“예산이야 남아도니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만, 따로 알아봐야 할 사안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찾아야 할 녀석들이 있어서 말이야.”
데메그리 교의 본단은 겐크 왕국 내부에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겐크 왕국과 충돌하면 카이둔 국왕이 궁여지책으로 대놓고 마물을 활용할지도 모르니 사전에 데메그리 교 본단의 위치를 알아내야 여러모로 계책을 짜기 편해진다.
돈은 넘쳐 나고, 수많은 인재가 루크 밑에서 일하고 싶어 하니 인원을 꾸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대화를 나누던 중 드골이 떠오른 게 있는 듯 말을 꺼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다크 엘프 한 명이 저택에 찾아왔었습니다. 상급 정령사인데 군에 넣어 달라고 요청하더군요. 실력은 확실한데 출신이 불분명해서 백작님께 보고한 후에 답변을 주겠다고 말해 뒀습니다.”
드골은 주먹으로 손바닥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아직 시내의 여관에서 머무르고 있던 것 같던데 어떻게 할까요?”
다크 엘프라면 엘프들의 영토라 불리는 엘프의 숲에서 추방당한 종족이다.
대부분의 다크 엘프가 용병 일을 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상급 정령사라는 말에 루크는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붉은 구슬 하나를 꺼냈다. 라그나로스가 죽고 나서 떨어뜨린 구슬이다. 안 그래도 구슬의 정체를 알고 싶었는데 마침 잘됐다.
루크는 다크 엘프가 어떤 이인지 직접 눈으로 확인할 겸 저택으로 부르고자 마음먹었다.
“저택으로 부르도록 해. 직접 보고 판단하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