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89화 붉은 구슬의 정체(2)
다크 엘프를 호출하란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드골이 바깥에 대기하던 시종을 시내로 보냈다.
몇 시간 후 다크 엘프 한 명이 저택에 방문했다.
정으로 깎아 낸 듯한 조각 같은 미모에 뾰족한 귀, 머리카락은 백발인데도 불구하고 나이가 들어 보인다기보다 퇴폐미가 느껴졌다. 피부색도 인간과 다르게 보랏빛을 띠고 있는데 괴이하기보다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엘프는 미의 여신인 라크샤 여신을 섬기고 있고, 라크샤 여신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종족이다. 아름다운 외모는 기본이며 평균 수명은 200년에 달한다.
수명이 인간의 2배인 만큼 성장하는 속도는 2배로 느리기 때문에 엘프의 나이를 감안할 땐 겉으로 보이는 나이에 2배를 곱하여 계산한다.
이번에 저택을 방문한 다크 엘프의 겉모습은 20대 초반의 여성으로 보였다. 그러니 실제 나이는 40대인 셈이다.
그녀는 루크의 집무실에 들어서며 예를 갖추었다.
“스텔라라고 합니다. 명성이 자자하신 루크 백작님을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전에 귀족가에서 일한 적이 있나 보지?”
“저… 혹시 귀족가에서의 근무 경력이 있어야 되나요?”
“그건 아니고, 행동에 각이 잡혀 있는 게 의외여서 물어본 거야.”
“용병 시절에 귀족들의 의뢰를 수행한 적이 많았거든요. 업무 수행 차 예법을 익혀 뒀어요.”
“입단 신청서를 보니 국경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닌 것 같더군. 다크 엘프는 방랑벽이 있다던데, 굳이 내 군대에 들어오는 이유를 들어 볼까?”
“사회적 편견이죠. 정착하고 살아가는 다크 엘프도 많답니다. 저도 방랑에 지쳐 정착하려는 부류 중에 하나고요. 이왕 정착할 거 실력에 걸맞은 대우를 해 주는 곳에 정착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니겠어요? 게다가 여기선 종족이 다르다고 차별하는 풍습도 없는 것 같고요.”
정론이었다.
상급 정령사는 단순히 무력으로 따지면 마나유저 상급, 마법사론 5서클쯤 된다. 어딜 가도 대우받을 수 있는 실력이긴 하나 다크 엘프라는 점 때문에 제대로 대접을 받긴 힘들다.
다크 엘프란 종족이 엘프의 숲에서 쫓겨난 것은 호전적이고 제멋대로인 성향 때문이다.
채식을 고집하는 하이 엘프들과 다르게 육식을 고집하고, 금욕을 추구하는 라크샤 여신의 규율과 맞지 않게 보석을 좋아하는 탓에 끝내 추방당하고 말았다.
엘프의 숲에서 쫓겨난 떠돌이 종족이란 인식 때문에 다크 엘프는 인간 사회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루크는 스텔라의 첫인상을 매우 좋게 평가하였다.
“의욕 없는 것보단 훨씬 낫군.”
“받아들여 주시는 건가요?”
“그건 아직 확신할 수 없지. 조만간 공채가 있을 테니 거기서 실력을 입증하도록 해. 네 말대로 여긴 종족이 다르고 해서 감점하는 일은 없으니까 정말로 실력이 있다면 합격할 수 있을 테지.”
“공채 일정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사전에 알았다면 수고를 아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혹시 이를 알려 주시려고 부르신 건가요?”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려고 불렀다는 것은 핑계이고, 진짜 용건은 붉은 구슬에 대해 알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본래 목적에 따라 루크는 품에서 붉은 구슬을 꺼내어 손바닥에 올렸다.
“사실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지. 이게 뭔지 알아보겠어?”
“음, 정령석이네요.”
“정령석이라면?”
“하긴 정령을 직접 다루는 사람이 아니면 볼 일이 없는 물건이긴 하죠. 말 그대로 정령이 담겨 있는 물건이에요. 정령이 인간계에서 죽으면 정령석이 되어 동면 상태에 들어가죠. 정령석에 마나를 부여하면 자동으로 정령과 계약이 체결되어 자연 친화력이 없는 사람도 정령을 다룰 수 있게 돼요.”
“그래서 마법사들도 모른다고 한 거였군.”
“참고로 계약자가 있는 상태에서 죽은 정령은 기존 계약자의 마나로만 부활시킬 수 있어요. 그러니 정령석을 양산해 달라는 부탁은 하지 말아 주세요.”
“그런 사람이 많나 보지?”
“엄청 많죠. 정령석을 양산해서 정령사 부대를 만들고 싶어 하는 귀족은 차고 넘치니까요. 안 된다고 말해 줘도 못 알아먹는 머저리들이 많죠.”
정령사 입장에선 어릴 때부터 길러 온 개를 죽이면 안 되겠냐고 제안하는 격이다.
제삼자에겐 병기의 일종으로 보일지 몰라도, 당사자에겐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루크도 한순간 정령석을 양산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러나 실천이 불가능한 이론이라는 사실과 정령사에게 선을 넘는 행위라는 걸 알고선 미련 없이 생각을 버렸다.
“미리 말해 줘서 고맙군. 이런 사정을 몰랐더라면 나도 정령사 부대 창설을 고려하고 있었겠지.”
“별말씀을. 혹시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되나요?”
“얼마든지.”
“듣자 하니 여기선 오크들도 기사 작위를 받을 수 있다는데, 저도 노릴 수 있을까요?”
“물론이다. 4년 동안 기사 양성소의 과정을 수료했을 때 이야기지만 말이야. 직업 군인으로 복무하면서도 교육을 받을 수 있으니 생각 있으면 공채에 합격한 후 직속상관에게 문의하도록 해.”
“4년 뒤에 기사로서 인사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러길 바라지.”
기사 작위는 이미 따 놓은 당상이라는 양 자신감을 내비치며 물러나는 스텔라였다.
자신만만해할 만하다. 상급 정령사이니 실력에 있어선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기사 양성소에선 기사도 시험과 여섯 종류의 군사학, 그리고 무엇보다 인성이 합격의 주된 요인이기에 실력만 있다 해서 무조건 합격하는 건 아니었다.
스텔라가 물러난 후 루크는 손바닥 위에서 구슬을 좌우로 데굴데굴 굴렸다.
“이제야 구슬의 정체를 알았군. 라그나로스의 정령석이었던 건가.”
곁에서 말없이 서류를 정리하던 드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그나로스를 죽이고 얻은 물건이었습니까?”
놀라는 게 당연했다. 아까 스텔라가 말하지 않았는가. 거위가 알을 깨고 나와 처음 본 자를 어미로 인식하듯, 정령석도 처음으로 마나를 불어 넣은 자에게 귀속되어 그를 주인으로 섬긴다.
쉽게 말하자면 라그나로스를 부릴 수 있게 된 셈이다.
안 그래도 인간 같지 않은 무력을 지닌 데다 파이라는 불세출의 탈 것을 지닌 루크다.
게다가 라그나로스까지 더해진다?
그야말로 일인 군단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구색을 갖추게 되는 격이다.
루크는 새장 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파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려 깨웠다.
“어이, 일어나.”
“졸려! 졸려!”
“영원히 자고 싶은 거면 도와줄 수 있는데 말이지.”
“기상! 기상!”
“어디 가시려고 그러십니까?”
“이너프 산맥. 저택에서 라그나로스를 소환할 순 없잖아?”
“저녁에 기사분들과 오즈 학장님, 그란데 백작님까지 참석하여 귀환 축하 연회를 열기로 했으니 그 전에 돌아오십시오.”
“그러지.”
“아! 창문 말고 1층 정문으로…….”
루크가 창문을 통해서 나가려 하기에 드골이 황급히 말리려 했으나 벌써 루크와 파이는 창문 바깥으로 나간 후였다.
파이의 날갯짓에서 파생된 바람이 정원수를 크게 흔들며 삭정이가 부러져 우수수 떨어졌다.
정원수가 흔들리는 소리와 제발 창문에서 뛰어내리지 말라는 드골의 외침에 저택 안의 사람들은 그제야 루크가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 * *
파이를 타고 이너프 산맥으로 날아간 루크는 나무가 없는 황량한 장소를 골라 착륙하였다.
라그나로스를 소환하자고 산불을 낼 순 없으니 적합한 장소를 고른 것이었다.
루크는 지면에 발을 딛자마자 파이에게 저리 가란 손짓을 하였다.
“멀리 떨어져 있어. 불장난하다가 꼬리털에 붙어도 난 모른다.”
“꼬리털은 소중해! 빠지면 인기 없어!”
“물러나기나 해.”
파이가 조그마한 모습으로 변하여 멀찍이 떨어진 바위 위에 자리를 잡았다.
분명 붉은 구슬에 마나를 불어 넣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스텔라가 언급한 대로 라그나로스 정령석에 마나를 불어 넣자 정령석이 마나를 흡수하며 붉은빛을 발했다. 더불어 구슬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온도 자체는 손난로 수준에 불과했으나 열이 발생하는 현상 자체가 라그나로스의 소환을 암시하는 것이기에 루크는 구슬을 바닥에 놓고 뒤로 물러났다.
잠시 기다리자 구슬 표면에서 화염이 피어오르더니 라그나로스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크크크, 이제야 소환하는구나.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다.”
정령석이 되기 전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지 소환되자마자 루크를 알아보는 라그나로스였다.
성격이 그대로인 것과 기억이 남아 있는 것까진 크게 문제가 안 된다. 그보다는 라그나로스의 덩치가 문제였다.
루크는 벤티버에서 싸웠을 때처럼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덩치를 기대하고 소환했는데, 막상 보니 손바닥에 올려도 될 법한 햄스터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라그나로스가 내뿜는 열기도 손난로 수준에 불과했다.
루크는 라그나로스를 손가락으로 집어 자신의 손바닥에 올렸다. 그리고 검지로 라그나로스의 머리를 꾹꾹 누르며 실망감을 드러냈다.
“보물 상자인 줄 알고 열었는데 쓰레기통이었다는 결말인가 보군.”
“쓰레기통이라니! 마나를 조금만 불어 넣었으니 몸이 쪼그마한 거지! 입김 한 번 불어 넣고 풍선이 작다고 투덜거리는 거랑 뭐가 달라?”
“불어 넣은 마나 양에 비해서 덩치랑 열기가 달라지는 거였군. 그런 건 빨리 말해.”
“말할 틈이나 주고 그러든가. 어쨌든 계약을 맺게 됐으니 네가 죽을 때까지 어울려 주도록 하지. 감사히 여기거라.”
“쪼꼬매! 쪼꼬매!”
언제 날아왔는지 파이가 루크의 어깨 위에 앉으며 라그나로스에게 작다는 말을 연발했다.
라그나로스는 꼬맹이 취급에 발끈하여 루크의 손바닥 위에서 펄펄 뛰었다.
“누가 누구보고 조그맣대? 확 구워 먹어 버릴까 보다!”
“꼬맹이! 꼬맹이!”
“혼이 나야 정신을 차릴 모양인가 보구나. 오냐, 내 당장 통닭으로 만들어 주마!”
라그나로스가 숨을 한껏 들이마시더니 화염을 내뿜었다. 하지만 쥐꼬리만 한 마나로 불을 내뿜어 봐야 얼마나 되겠는가.
화르륵!
열심히 불을 내뿜고 있긴 한데 불꽃의 크기가 기껏해야 촛불밖에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온도가 낮아서 겉모양만 불길이다뿐이지 손난로의 연장선에 불과했다.
파이는 루크의 손바닥 위에 내려앉으며 라그나로스의 머리를 쪼았다.
쿡쿡! 쿡쿡!
“따끈! 따끈!”
“후욱! 후욱! 으으, 힘이 안 나잖아! 주인아! 마나를 다오!”
“육포! 육포!”
“이것아! 네 간식 구워 주는 용도로 내뿜고 있는 게 아냐! 야, 주인 놈아! 이놈의 새 자식 좀 어떻게 해 봐! 아얏, 머리 쪼지 말래도!”
지금의 라그나로스를 두고 누가 파괴의 화신이라고 생각할까.
차를 다시 데울 때나 머그잔에 옆에 두면 딱일 것 같다. 실제로 시도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나저나 루크는 마나를 얼마나 불어 넣어야 원래 크기가 될지 실험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는 나중에 하기로 했다. 지금은 손바닥 위에서 노니는 불덩이와 앵무새의 재롱을 감상하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