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역대급 재능으로 환생-90화 (90/200)

# 90

90화 무너져 가는 아성(1)

겨울의 찬 공기가 먼지를 걷어 내며 밤하늘을 맑게 닦아 냈다. 별들은 사금을 뿌려 놓은 듯 알알이 박혀 있고, 보름달은 별들을 상대로 격을 매기려는 양 한껏 빛을 발하며 밤을 밝혔다.

자정을 막 넘긴 시간, 드래프트 영지 중심부에 위치한 어느 여관에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까마귀는 살짝 열려 있는 창문을 부리로 밀어젖히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까마귀의 난입을 감지했는지 어두컴컴한 방 안쪽에서 스텔라의 경고가 날아들었다.

“레이디의 방에 들어오는 건데 노크 정돈 하지 그래?”

까마귀가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중년 사내의 모습으로 변했다. 사내는 벽에 등을 기대고 그녀의 비아냥거림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양 용건부터 꺼냈다.

“잠입에 성공했는지부터 듣도록 하지.”

스텔라는 침입자를 제압하기 위해 꺼내 들었던 단검을 던지고 받길 반복하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아직이야. 얼마 뒤에 공채가 열린다더라고. 신청서는 넣어 뒀어.”

“반드시 합격해라. 밀정을 시작도 못 해서야 널 고용한 의미가 없으니까.”

“억지로라도 웃어 주기 힘든 농담인걸? 진심으로 탈락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방심하지 말라는 소리다.”

“일단 고용주의 전언이니 머릿속에 새겨 두긴 하겠어. 정기 보고는 어떻게 하면 돼?”

“보고할 필요 없다. 때가 되면 우리 쪽에서 연락하지. 연락이 있을 때까지 루크군 내부의 인물들, 특히 루크의 최측근인 제랄드를 공략해 두도록. 1년이 걸리든 10년이 걸리든 필요할 때가 되면 찾아오겠다.”

“20년 이상은 걸리지 않도록 바랄게. 10년까진 그럭저럭 기다릴 만한데 20년은 엘프한테도 부담되는 세월이거든.”

“주절거리지 마라. 다크 엘프의 마을을 재건하기 위한 자금이 필요할 텐데? 그게 10년이 걸리든 20년이 걸리든 넌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우리는 루크군의 내분을, 너는 돈을. 이보다 더 단순하고 명확한 관계는 없지. 자금을 원한다면 잠자코 기다리도록.”

중년 사내는 묵직한 목소리로 강하게 쏘아붙이고 도로 까마귀로 변하였다. 창틀에 올라서며 날개를 퍼덕이기 직전, 중년 사내가 추가로 주의 사항을 말했다.

“그리고 조만간 카이둔 국왕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철수 작업에 착수할 것이니 그리 알도록. 카이둔 국왕 측에서 연락을 넣어도 무시해라, 알겠나?”

“루크군의 내분이 목적이라고 하지 않았어? 카이둔 국왕과 관계를 끊으면 밀정을 심을 필요가 없지 않아?”

“훗날을 위해 포석을 깔아 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 우리 데메그리 교에겐 모든 이가 적이다. 그건 카이둔 국왕도 마찬가지지.”

카이둔 국왕과 데메그리 교는 어디까지나 서로 이용하기 위해 손을 잡았다.

일이 잘 풀렸다면 모를까 카이둔 국왕은 갈수록 수세에 몰리고 있다. 어쩌면 저 혼자 살기 위해 약속을 깨고 데메그리 교를 버릴지도 모른다.

때문에 데메그리 교 상층부에선 버려지기 전에 카이둔 국왕과의 관계를 정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스텔라를 밀정으로 심어 두는 것은 훗날 루크가 데메그리 교를 향해 검을 겨누었을 때를 위한 포석이었다.

스텔라는 어깨를 으쓱이며 의뢰인의 요청을 고스란히 접수했다.

“신중하기도 하셔라. 뭐, 나야 고용된 몸이니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겠지. 카이둔 국왕 쪽 연락은 모두 무시할게.”

“추후 때가 되면 연락하겠다. 그때까지 확실히 자리를 잡아 두도록.”

말을 마치자마자 까마귀 한 마리가 밤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열린 창문 틈을 통해 빠져나가는 까마귀를 보던 스텔라가 긴 숨을 내쉬었다.

중년 사내가 데메그리 교 사제라는 건 스텔라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의뢰를 받아들인 것은 돈 때문이었다. 이미 선금으로 상당한 액수를 받았다. 몇 년이 걸리든 의뢰를 달성하기만 하면 선금의 몇 배나 되는 거금이 들어온다.

그녀의 목표는 다크 엘프를 위한 마을을 만드는 것이다. 고향이 없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모든 것을 잃은 후에 등을 비빌 수 있는 땅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크다. 특히 200년씩이나 살아야 하는 종족이기에 더더욱 고향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마을을 만들려면 막대한 돈이 필요하다. 정직하게 벌어선 절대로 모을 수 없는 자금이 필요한 만큼 상대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스텔라는 손장난을 치듯 단검을 던지고 받길 반복하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제랄드라… 쉰내 나는 아저씨 한 명 공략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지.”

* * *

청문회 예정일까지 사흘이 남은 시점에서 루크는 골디브로 떠날 채비를 갖추었다. 파이를 타고 이동할 것이기에 루크 혼자 떠나기로 하였다.

반발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귀족 혼자서 덩그러니 상경하면 남들 보기에 안 좋다며 하다못해 비행 부대라도 데려가란 간언이 빗발쳤다.

하지만 루크의 대답이 간부들의 말문을 막았다.

“사소한 일에 일일이 수행원을 대동할 필요는 없지, 안 그래?”

왕궁의 청문회를 두고 사소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간부들로선 국왕의 부름을 사소한 일로 치부하는 루크의 대담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실제로도 루크는 국왕의 부름을 사소한 일로 치부할 정도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루크의 말에 간부들은 더 해 봤자 입만 아프겠다 싶어서 결정을 존중하기로 했다.

* * *

“손이 시려! 발이 시려!”

파이가 이너프 산맥을 넘으며 근본 없는 편곡이 가미된 노래를 불렀다. 창천 앵무야 원래 더 높은 고도에서도 끄떡없는 몸뚱이를 지니고 있으니 어디든 시릴 일이 없었다.

그보다 루크에게 들이닥치는 맞바람의 압박감과 추위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너프 산맥의 봉우리마다 쌓여 있는 만년설이 북풍에 휘말려 싸라기눈이 섞인 강풍이 몸을 두드렸다.

로브 위로 서리가 내려앉기 시작했고, 방한 대책이 무색할 정도의 냉기가 옷 안으로 스며들었다.

물론 마법으로 보온을 꾀하면 금세 해결될 일이다. 하지만 루크는 마법 대신 더 편하고 효과가 좋은 수단을 취하고자 하였다.

루크는 주머니 안쪽에 넣어 둔 붉은 정령석에 소량의 마나를 불어 넣었다. 그러자 주머니 안쪽에서 따스한 기운이 퍼지며 꼬마 라그나로스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이번에는 무슨 일로… 우워어어어! 이게 뭐야!”

바깥 상황을 모르고 고개를 내밀었다가 강풍에 고스란히 노출된 라그나로스였다. 라그나로스의 머리에서 피어오르던 화염이 맞바람을 맞은 생머리처럼 마구 흐트러졌다.

라그나로스의 목소리가 들렸는지 파이가 좋아하며 별칭을 불러 댔다.

“꼬마! 꼬마!”

리트리버 강아지가 흉악하게(?) 꼬리를 흔들며 귀찮아하는 고양이에게 일단 안기고 보듯, 파이는 라그나로스가 마음에 들었는지 소환되기만 하면 좋아했다.

반대로 라그나로스는 꼬마라 불릴 때마다 발끈하며 열을 냈다.

“야, 이 새대가리야! 꼬마라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말하면 기억을 하라고!”

“땅콩 불꽃! 땅콩 불꽃!”

“야, 인마! 어후, 머리야. 어이, 주인아, 빨리 시킬 일이나 말해. 후딱 끝내 버리고 다시 자련다.”

“이틀 동안 비행할 일이 생겼어. 그동안 열기로 내 몸을 감싸 줘.”

“이틀? 이틀 동안 계속 소환되어 있으라고?”

“방금 그렇게 말한 걸로 아는데 말이지.”

“정령도 편두통으로 죽을 수 있는지 시험해 보려는 거지? 이틀 동안 쟤가 놀리는 거 들으면서 있으라니 너무한 거 아니냐.”

“좋아서 저러는 건데 그러려니 하지 그래?”

“라그 좋아! 라그 최고!”

파이는 평소에는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나 좋아하지 개인적으로 따로 취향을 드러낸 적은 없는데, 이상하게도 라그나로스랑 레이아는 좋아한다.

둘 다 공통점이 있다면 레이아는 은발, 라그나로스는 화염 덕에 머리카락이 반짝인다는 점 정도일까. 하지만 따지자면 또 이상한 게 반짝이는 걸 좋아한다고 보기엔 보석 같은 것엔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워낙에 의식의 흐름대로 노는 녀석이니 취향을 파악하려고 고찰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라그나로스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짚으며 두통을 호소했다.

“네 녀석한테 좋다는 소리 듣고 싶지 않아. 차라리 안 좋아해도 좋으니 말을 걸지 마.”

“라그! 따끈따끈!”

“말을 하면 좀 들어!”

발끈하면서도 주인의 명에 따라 루크의 몸에 열기로 막을 형성해 주는 라그나로스였다. 열기의 막이 바람의 압박까지 막아 주어서 쾌적한 비행 환경을 조성해 주었다.

몸에 닿는 바람은 멎었지만, 다른 의미에서 바람 잘 날 없는 사이인 파이와 라그나로스 덕에 루크는 비행 내내 지루할 틈이 없었다.

* * *

겐크 왕궁에선 루크의 움직임을 주시하기 위해 중부 지방의 영주들에게 엄명을 내려두었다.

루크가 그란데 백작령을 지나 중부 지방에 들어서면 각 영주들의 저택에서 하룻밤씩 머무르게 될 테니, 그때 알아낼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취하여 은밀히 보고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런 보고가 없더니 청문회를 하루 앞둔 날, 중부 지방의 귀족들로부터 황당한 보고가 올라왔다.

“올 기미가 안 보입니다. 하도 이상해서 그란데 백작령까지 사람을 보냈는데, 거길 지나간 적도 없다고 합니다.”

카이둔 국왕은 루크가 온다는 소식이 없는 것을 불안하게 여겼다.

루크씩이나 되는 자가 날짜를 착각할 리 없다. 즉, 아예 출발을 하지 않았거나, 눈에 띄지 않는 길로 이동하고 있거나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명확한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는 이상, 카이둔 국왕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루크가 보여 준 모든 행위는 기이하고 신속하면서도 항상 크나큰 이득을 결과로 낳았으니 말이다.

신중을 기하고 있는 카이둔 국왕과 달리 그를 따르는 왕궁 의원들은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내뱉기 바빴다.

“멋대로 타국의 일에 개입한 것도 모자라 왕궁에서 호출했는데 출발조차 하지 않았다니요. 역사상 이리도 무례한 자는 또 없을 겁니다. 당일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으면 엄벌에 처해야 합니다.”

“아직 왕궁에서 정식으로 허가를 내리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루크 백작이 공왕의 자리에 오를 예정이란 소문이 돌고 있더군요. 본인이 멋대로 떠들고 다니는 게 분명합니다. 벌써부터 왕인 양 행세하고 있는 것만 봐도 처벌할 이유론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이 나라의 엘리트라 불리는 작자들의 실태다.

가진 능력이라곤 어떻게든 남의 행동에 꼬투리를 잡아 끌어내리는 것밖에 없다.

평소에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는데 자신들의 능력을 아득히 상회하는 능력자가 나타나니 여지없이 밑천이 드러나고 있었다.

카이둔 국왕이 괜히 데메그리 교와 손을 잡은 것이 아니다. 이미 거인국과의 전쟁에서 국내 귀족들의 밑천은 드러난 지 오래였고, 그나마 쓸 만한 패라고 여긴 루크는 왕의 장기짝이 되기보단 적수로서 자리를 잡았다.

왕궁 내의 인물 가운데 카이둔 국왕과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사람은 아들인 블린트 왕자밖에 없었다.

“블린트, 네 생각은 어떠하느냐?”

“아마 제시간에 맞춰서 올 겁니다. 분명 합당한 명분을 갖춰서 청문회에 참가할 테지요.”

“지방 영주들은 그를 보지 못했다더군. 만약에 은밀히 움직이고 있는 거라면 그에 준하는 이유가 있겠지.”

“얼마 전에 폐관 수련을 핑계로 자취를 감춘 전적이 있으니, 이번에도 예상하기 힘든 이유로 움직이고 있을 겁니다.”

“흠, 다시 한번 전령을 파견해라. 드래프트 영지에 루크 백작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다시 확인하거라.”

결국 카이둔 국왕은 루크의 의도를 추측하지 못한 채 회의를 마무리했다.

회의가 끝난 후, 왕궁 의원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루크의 움직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카이둔 국왕, 블린트와 달리 왕궁 의원들은 현 상황을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전하도 그렇고 왕자님도 그렇고 두 분 다 걱정이 과하시구먼. 저번에도 공왕 자리에 오르지 못하도록 틀어막았으니 이번에도 똑같이 즉위를 막으면 될 일이거늘, 그렇지 않나?”

“라그나로스를 단독으로 쓰러뜨렸다는 소문을 듣고 신중해지신 것 같네. 소문이란 게 원래 과장되기 마련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텐데.”

“내 말이 그 말일세.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혼자서 라그나로스를 어떻게 쓰러뜨리겠나? 분명 비슷한 걸 제압해 놓고 소문을 부풀려서 낸 거겠지.”

왕궁 의원들 중에서 소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이는 없었다.

소문이란 건 전달될 때마다 불어나기 마련이다.

허풍에도 정도가 있지 어디 단독으로 라그나로스를 쓰러뜨렸다는 거짓부렁을 씨불이고 다닌단 말인가.

속 편한 웃음소리를 깔아뭉개듯 왕궁 정원을 걷고 있던 의원들의 머리 위에 거대한 새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동시에 강한 바람이 왕궁 의원들의 몸을 떠밀었다.

난데없는 바람에 엉덩방아를 찧은 왕궁 의원들이 꼬리뼈에 강한 충격을 느끼며 신경질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욕지거리를 포함하여 그 어떤 말도 내뱉지 못했다.

하늘에서 황소만 한 몸집의 새가 날개를 퍼덕이며 내려오고 있었기에.

검은 깃털과 푸른 눈이 인상적인 거조는 정원 한가운데에 정확히 착지하며 도착을 알렸다.

“도착! 도착!”

이어서 거조의 등 위에서 준수한 외모의 금발 청년이 뛰어내렸다.

금발 청년, 루크는 넘어진 왕궁 의원들을 내려다보며 머리끝까지 오만에 절어 있는 자들을 신랄하게 비꼬았다.

“안에 들어가서 전해 주십시오. 라그나로스 비슷한 걸 제압한 사람이 도착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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