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91화 무너져 가는 아성(2)
엘리나는 제3 별궁 안의 왕족용 침실에서 1시간 동안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앞머리의 중간이 갈라진 것이 자꾸만 신경 쓰인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머리를 우로 쓸어 보고, 좌로 쓸어 보고 반복하다가 결국 엉망이 되어 궁녀에게 다시 세팅을 부탁하는 이상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왕녀라 불리는 이에겐 다소 경망스러울지도 모르나, 첫사랑에 빠진 사람에겐 지극히 평범한 모습이었다.
앞머리를 기껏 다시 정리했으나 이번에는 의상이 마음에 걸렸다.
엘리나는 거울 앞에서 의상의 뒷부분을 확인하다가 눈꼬리를 추켜올렸다.
“시이네, 다른 의상 가져와.”
“이번에 재단사가 새로 만든 옷인데 마음에 안 드세요?”
“등이 보이잖아.”
“아, 죄송합니다! 제 잘못이에요. 뒤에서 보고 있었는데도 신경 쓰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됐어, 시이네야 늘 봐서 익숙하니까 그럴 수도 있지. 저번에 내궁 회의에 참석할 때 입었던 정장 드레스로 가져와 줘.”
“네.”
시이네라 불린 전속 궁녀가 진땀을 뻘뻘 흘리며 옷을 가지러 나갔다.
엘리나는 홀로 방 안에 남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시스루의 스톨 아래로 등에 있는 화상 자국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수많은 암살 시도에 시달려 왔던 그녀다. 지금껏 등에 입은 화상 흉터를 부끄럽게 여긴 적은 없다. 역경을 넘어왔다는 증거이자, 유토피아 건설에 대한 열망, 그리고 초심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자극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심가가 아닌 한 명의 여자로 돌아설 때마다 등 뒤의 흉터가 신경 쓰였다.
루크가 흉터 같은 것에 연연할 사람도 아니고 실제로 눈앞에서 대놓고 보여 준 적도 있긴 한데, 그래도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부끄러운 짓을 한 셈이다. 지울 수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흑역사란 녀석은 잉크 자국과도 같아서 지우려고 문댈수록 넓게 번졌다.
엘리나는 스톨을 벗어 화장대 의자에 걸쳐 두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더불어 턱을 괸 채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왕비의 자식이었다면 조금은 달랐을까.”
과거에 그녀에게 닥친 십수 번의 암살 시도는 모두 범인을 밝혀내지 못하고 수사가 종료되었다. 하지만 모두 쉬쉬할 뿐이지 누가 범인인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범인은 다름 아닌 왕비였다. 몇 년 전에 그녀가 병으로 세상을 뜬 후부터 엘리나에게 가해지던 암살 시도가 멈춘 것이 그 증거였다.
사실 제1 계승권자였던 나탈리와 제2 계승권자인 블린트 왕자는 왕비의 자식들인 반면 엘리나는 후궁의 자식이다.
왕비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카이둔 국왕의 총애를 받던 후궁과 후궁의 자식 모두를 잡아먹을 듯 미워했다.
엘리나가 가장 죽음에 근접한 사건은 화염에 휩싸인 별궁 안에 갇혔을 때였다. 화염에 가로막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연기 속에서 죽어 가고 있을 무렵, 그녀의 어머니가 직접 그녀를 구하러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왔다.
기사들은 왕비의 명령으로 일부러 화재가 발생하는 시간에 일제히 왕궁 바깥으로 순찰을 나갔고, 그나마 왕궁 안에 남아 있던 이들은 제 몸을 아끼느라 누구도 그녀를 구하러 나서지 않았다.
그 와중에 유일하게 그녀의 어머니만이 아무런 보호 장비 없이 불길 속에 뛰어들어 그녀를 구해 냈다.
무너지는 불기둥에 부딪혀 어깨가 뭉개지고, 철심이 다리를 꿰뚫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몸으로 엘리나를 구한 것이다.
그때의 여파로 그녀는 걷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카이둔 국왕은 줄곧 왕비의 행동을 방치한 것도 모자라 더 이상 귀찮은 잡음이 들리게 하지 말라며 후궁을 멀리 떨어진 요양지로 보내는 것으로 화재 사건을 마무리했다.
어머니께서 지금은 아레나 공국의 프레이머 지방에서 지내고 계신다고는 하는데, 찾아뵙고 싶어도 왕녀란 위치를 지켜야 하다 보니 몇 년간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간간이 전해 오는 편지만으로 어머니의 근황을 확인하고 있을 따름이다.
생각에 잠겨 있던 차에 시이네가 다른 옷을 가지고 방에 들어왔다.
“헥, 헥. 가져왔어요, 왕녀님. 바로 갈아입는 거 도와드릴게요.”
“응, 부탁해. 아 참, 그리고 루크 백작에게 나한테 들르라고 전했어?”
“전해 드리긴 했는데……. 으음, 뭐라고 말씀드려야 될지 모르겠네요.”
“뭐라고 대답했길래 그래?”
“청문회 답변은 따로 준비해 왔으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된다고 하셨어요.”
“하아,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고 부르는 건데 꼭 업무 선상에 놓고 본다니까.”
실제로 엘리나는 루크에게 제공하려고 그간의 왕궁 내부 정보와 청문회의 예상 질문을 정리해 놓았다.
청문회가 결정된 날부터 며칠 동안 엘리나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기에 시이네는 그녀를 안쓰럽게 여겼다.
“왕녀님이 이렇게 고생하시는데 조금은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괜찮아.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건데, 뭘. 잘못이 있다면 매력이 모자란 내 잘못이지.”
“아휴, 그럴 리가 있나요. 겐크 왕국 안에서 왕녀님만 한 분이 또 어디 있겠어요? 계급이면 계급, 외모면 외모, 능력이면 능력, 전부 갖추고 계신걸요.”
“다 합쳐도 그 사람한테는 한참 모자란다는 게 문제지.”
현 상황에서 그나마 루크보다 앞서는 건 계급밖에 없다. 그마저도 루크가 공왕이 되면 위치가 뒤바뀌고 만다.
국왕이 아닌 왕족은 귀족보단 높아도 공왕보단 낮다.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전에도 능력의 차이가 워낙에 큰 탓에 겨우 동등한 위치에서 대하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지금의 루크는 턱을 한참 치켜들어야 겨우 보이는 위치까지 올라가 버렸다.
입장이란 언제나 상대적이다.
다른 사람들이 절벽 위의 꽃으로 여기는 그녀지만 루크 앞에선 절벽 위를 쳐다보는 사람에 불과하다.
엘리나는 시이네의 도움을 받아 코르셋을 꽉 조이며 옷을 갈아입었다. 환복 후에 거울 앞에서 한 바퀴 돌아 문제가 없단 것을 확인하곤 기합이 팍 들어간 표정을 지었다.
“오지 않는다면 이쪽에서 가 줘야지.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잖아?”
계급이 특권이 아닌 책임감의 상징으로 작용하는 사회,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게 아닌 내일의 행복에 미리 미소를 짓는 세상으로 개혁하는 것이 그녀의 꿈이다.
함께 걷는 자가 비상한 능력을 가진 데다 목숨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반려자라면, 설사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 가시밭길이라 할지라도 웃으며 걸을 수 있을 터.
루크와 함께 같은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가시밭길을 걷고자 하는 그녀가 유일하게 바랄 수 있는 행복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내궁 안의 대회의장에선 청문회 준비가 한창이었다.
루크는 외궁에 위치한 숙소에서 빠져나와 내궁으로 이동했다.
이번 청문회에선 ‘왕궁에 보고 없이 타국의 정치판에 개입한 것에 대한 해명’과 ‘공왕 즉위의 권리를 이번에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주제를 다룰 예정이었다.
루크는 이미 예상 질문과 답변은 모두 준비해 두었다.
어제 엘리나가 숙소에 불쑥 찾아와서 우연을 가장하여 놓고 간 자료도 있으니 이만하면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루크 백작님, 소지품 검사에 협조 부탁드립니다.”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이에게 무기의 소지 여부를 검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 절차는 절차이니 소지품 검사에 협조했다.
형식적인 절차를 마치고 대회의장에 들어가자 사방팔방에서 시선이 쏟아졌다.
아침 일찍부터 대회의장에 와 있던 왕궁 의원들이 견제 차원에서 눈에 힘을 주고 있었다.
웬만하면 느지막이 입장하는 블린트 왕자도 벌써 상석에 앉아 있었다. 블린트 왕자의 착석은 허례허식은 안중에도 없을 정도로 루크를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루크의 자리는 블린트의 바로 옆이었다.
공작과 후작을 생략하고 백작이 왕족 바로 다음 자리에 배치된 셈이다.
겐크 왕국의 공작들은 북방 국경에 머물러 있고, 왕궁 의원 중에서 후작은 왕궁 의회장뿐인데 그는 회의 내내 단상 위의 왕좌 옆에 서 있는다. 그러니 위에서부터 세면 블린트 다음이 바로 루크가 되는 것이다.
루크는 귀족들을 지나쳐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착석과 동시에 블린트가 말을 걸어왔다.
“아레나 공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로 처음 보는군. 그간 잘 지냈나?”
“제가 어떻게 지냈는지 이미 알아보셨을 것 같습니다만.”
“소문은 믿을 만한 게 못 돼서 말이지. 정말 라그나로스를 혼자서 사냥한 건지 아닌지만 말해 주게.”
“혼자서 사냥했다고 말하면 믿으실 겁니까?”
“아마도? 경쟁 관계에 놓여 있긴 해도 한 명의 남자로서 자네를 존경하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자네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소문이 모든 것을 대변하고 있으니 굳이 제가 직접 입을 뗄 이유가 없지요.”
“내겐 달갑지 않은 소식이군. 아무쪼록 살살 해 주게.”
“포기하시면 편해집니다.”
“하하하, 내 입장상 그럴 수도 없단 걸 알지 않는가. 이거 이번에도 만만찮겠군.”
처음 대면했을 때도 느꼈지만 역시 왕궁 내에서 가장 성가신 사람은 블린트다. 만약 그가 왕자가 아닌 현장에서 직접 움직일 수 있는 위치에 있었거나, 상당한 수준의 무력을 갖추었다면 굉장히 위협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금 아쉬운 점도 있다. 어쩔 수 없이 대립해야 하는 위치만 아니었다면 포섭하고 싶은 인물 1순위인데 말이다.
하필이면 왕자인 탓에 겐크 왕국을 손에 넣는다는 목표와 그의 포섭이 공존할 수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잠시 기다리니 대회의장 입구 쪽에서 국왕의 입장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국왕 전하께서 들어오고 계십니다!”
외침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카이둔 국왕이 환관들을 대동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대회의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기립하여 예를 갖췄고, 카이둔 국왕이 단상에 올라 왕좌에 앉으면서 청문회가 시작되었다.
카이둔 국왕은 루크를 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증명하듯 공격적인 어투를 구사했다.
“루크 백작, 근 몇 달간 자네가 보인 행보에 대해 물을 것이 있다네. 듣기론 경지를 끌어 올리기 위해 이너프 산맥에 들어갔다고 공표했다지. 그랬던 자네가 어째서 하니온 왕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는지 설명해 보게. 납득할 수 있는 대답이 아니라면 대외 활동 규정 위반으로 작위 강등의 조치를 취할 걸세.”
목소리에 짜증이 다분히 섞여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자기가 영웅이라고 찬사를 받고 있어야 하는데, 루크가 날름 가로채어 그 소리를 듣고 있으니 배알이 꼴릴 수밖에.
루크는 진실과 거짓을 적정 비율로 섞어서 답변을 내놓았다.
“폐관 수련을 위해 이너프 산맥에 들어간 것은 사실입니다. 그 과정에서 하니온 왕국에 수련에 적합한 환경이 있다는 것을 듣고 그리로 넘어갔지요.”
“수련 때문에 넘어갔다는 것을 증명할 증거는?”
예상한 대로 카이둔 국왕은 질문 공세를 펼치며 루크를 압박했다.
역시 카이둔 국왕 쪽의 행동을 예측하는 건 쉽다. 이번에는 블린트가 준비한 패가 훨씬 성가실 것으로 추측된다.
엘리나가 준비한 자료에 따르면 몇 가지 보이지 않는 지표들이 있는데, 일부러 패를 숨기기 위해서 기밀을 유지해 온 듯하다.
일단 적을 하나로 좁히기 위해서라도 카이둔 국왕의 입을 다물게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증거를 요구하는 카이둔 국왕 앞에서 루크는 초장부터 세게 나갔다. 이어지는 루크의 발언에 카이둔 국왕을 비롯한 장내의 모든 이가 크게 동요했다.
“그랜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랐습니다. 이만하면 답변이 되었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