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92화 무너져 가는 아성(3)
그랜드마스터.
루크가 언급한 짧은 단어에 장내가 크게 술렁거렸다.
이 자리에 있는 자들 가운데 그랜드마스터란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단어의 의미를 알고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루크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세게 얻어맞은 양 멍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뭐라고 했지? 그랜드마스터? 저 작자가 지금 본인 스스로 전설의 경지에 올랐다고 말한 거야?
그들의 생각이 가감 없이 얼굴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방금 뭔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내 귀가 이상한 거 맞지? 그렇다고 말해 주게.”
“그랜드마스터라니… 전설로만 존재하는 경지인 줄 알았건만.”
“그럴 리가 있나, 분명 잘못 말한 거겠지. ‘그래도 마스터의 경지에 머물러 있다’고 말하려다가 헛나온 것일 걸세.”
왕궁 의원들의 반응은 인간이 이해의 범주를 넘어선 현상과 마주했을 때 보이는 경악의 3단계와 완전히 일치했다.
첫 번째 단계에선 놀라고, 두 번째 단계에선 부정하며 세 번째 단계에선 체념한다.
지금의 반응은 두 번째 단계인 현실 부정이었다.
“루크 백작, 방금 뭐라고 했는지 다시 한번 들려주겠나?”
카이둔 국왕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역시 루크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루크가 잘못 말한 것이길 바라며 재차 질문을 던진 것이다.
거기에 대고 확인 사살을 하듯 루크는 아까와 똑같은 말투로 되풀이했다.
“그랜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루크의 모습에서 거짓말을 하는 기색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공식 석상에서 얼토당토않은 얘기를 할 사람은 아니니 정말로 그랜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것일 터. 마치 바란다면 직접 증명해 주겠다는 듯 당장이라도 검을 들게 해 달라고 할 기세였다.
이 이상 현실을 부정하는 건 스스로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었다.
카이둔 국왕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
‘내 왕국에서 그랜드마스터가 탄생하다니……. 저 힘만 있다면 대륙 정복도 꿈은 아닐 터이건만…….’
루크가 자신에게 충성을 다한다면 대륙 정복의 꿈에 현실성이 더해진다.
루크만 있다면 위험을 감수하며 데메그리 교와 손잡고 있을 이유가 없다. 루크를 선봉으로 삼아 거인국과 엘프의 숲, 나아가 대륙 북쪽의 신성 제국 및 여러 왕국까지 모두 점령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루크에게 충성을 바라는 건 바람에 불과했다.
만약에 루크가 신하의 위치에 남아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 위를 노린다면?
북방을 정복하기도 전에 겐크 왕국이 먼저 당할지도 모른다.
예전부터 왕궁의 명령 따윈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제멋대로 행동하던 루크다. 잠자코 신하 노릇을 하며 북방 정벌에 힘을 보태 주리란 보장은 없다.
생각이 많아지면 말수가 적어지는 법.
카이둔 국왕은 고민에 빠져 입을 굳게 다물고 침묵을 고수했다.
루크의 입장에서 보면 카이둔 국왕의 입을 다물게 하고, 적을 블린트 한 명으로 좁힌다는 목적을 어렵지 않게 달성한 셈이었다.
루크는 수 초간 카이둔 국왕으로부터 돌아오는 말이 없는 것을 확인하곤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러고는 팔짱을 끼며 기선을 제압한 자의 여유를 내비쳤다.
“전하의 반응을 보니 충분한 답변이 된 것 같군요. 다른 분들도 모두 납득하셨을 거라 여기겠습니다.”
대놓고 의기양양해하고 있는데도 그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이견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랜드마스터가 되었다면 모든 게 설명이 된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단독으로 라그나로스를 사냥해도 이상할 게 없고, 수련 때문에 하니온 왕국에 갔다는 주장도 완벽하게 입증한 셈이다.
오히려 무시해도 상관없는 타국의 백성들을 위해 수련 중임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검을 빼 든 것이니 그의 됨됨이를 칭찬해야 할 판국이다.
‘왜 루크가 허가도 없이 멋대로 하니온 왕국에 넘어갔는가?’란 의제는 루크가 그랜드마스터임을 밝히는 강수를 둠으로써 삽시간에 해결되었다.
그러나 눈치 없는 왕궁 의원 한 명이 제 딴엔 견제랍시고 되지도 않는 딴지를 걸었다.
“수련을 떠났으면 수련만 하고 와야지 왜 남의 나라 사정에 개입하고 그러나? 수련은 핑계고 처음부터 하니온 왕국을 집어삼키려 한 거 아닌가?”
“크흠.”
“큼! 크흠!”
어느 왕궁 의원의 말에 곳곳에서 헛기침 소리가 새어 나왔다.
블린트도 왕궁 의원의 말을 듣고 검지로 관자놀이를 꾸욱 누르며 인상을 썼다.
루크가 기세등등해하는 걸 알면서도 괜히 참고 있는 게 아니다.
여기서 말을 꺼내면 더 불리해진다는 걸 알기 때문에 가만히 있던 것이다.
루크는 딴지를 건 왕궁 의원에게 시선을 두며 취조하듯 이름을 물었다.
“일단 물어두도록 하겠습니다. 이름과 작위가 어떻게 되십니까?”
제 딴엔 제동을 걸어 보겠답시고 나선 왕궁 의원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곤 얼떨떨해하였다.
“헥토 백작일세, 자네와 동급의 작위이지.”
“헥토 백작님, 방금 백작님의 발언은 귀족의 마음가짐과는 매우 거리가 멀어 보이는군요. 평소에 그따위 마음가짐으로 정사를 돌보고 있다는 걸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그따위? 지금 내게 그따위라는 수식을 붙인 건가?”
“수십만 명이 죽든 수백만 명이 죽든 외면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하는 작자에게 고운 말을 쓸 줄 알았습니까?”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타국의 일은 타국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
“이번 청문회의 의도가 의심되는군요. 제가 말없이 타국에서 활동한 이유 정도는 물을 수 있지요. 네, 그 정도야 당연히 물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에 면박을 주는 건 선을 넘은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청문회에 참석한 모두에게 묻겠습니다. 혹시 제게 면박을 주기 위해 청문회를 연 것입니까? 그런 거면 이 청문회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블린트가 소리 죽여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첫 번째 의제는 해결된 걸로 치고 그냥 넘어가려고 한 것이었다.
수련 중에 라그나로스의 부활을 듣고 직접 찾아가 사냥에 성공했다. 목숨 걸고 싸워서 수십만 명을 구해 낸 것이다.
루크의 행동을 부정하는 것은 공익을 실천한다는 왕궁 의원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스스로가 자신의 직책을 부정했는데 루크가 그 틈을 놓칠 리가 있겠는가.
헥토 백작의 발언을 빌미 삼아 루크가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왕궁 의원의 자질 부족을 거론하면 그들은 할 말이 없었다.
그리되면 이번 청문회에서 왕궁 의원들의 존재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게 되어 버린다. 헥토 백작 한 명 때문에 블린트 왕자파 전체가 피해를 보게 생겼다.
왕궁 의원이 싸질러 놓은 똥을 치우는 것은 온전히 블린트의 몫이었다.
“아무래도 헥토 백작이 안건에 열중한 나머지 혼자 멀리 나간 것 같군. 열정이 과해서 생각이 앞서나간 것 같으니 이해해 주게.”
“언제부터 왕궁에서 도를 넘은 무례에 관대해졌는지 모르겠군요. 아니면 블린트 왕자님과 개인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감싸고 드는 겁니까?”
“자네가 지금 굉장히 무례한 발언을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나?”
“직접 겪으니 어떠십니까? 억측으로 함부로 지껄인다는 게 이리도 무례한 행동입니다. 한데도 제겐 화를 내시고, 헥토 백작은 관대하게 대하시는군요. 어떤 차이가 있길래 그리 태도가 다른 것인지 설명해 주십시오.”
“그건…….”
루크의 페이스에 휘말린 블린트는 본래 역량을 제대로 발하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게다가 엘리나가 즉흥적으로 끼어들어 루크를 엄호해 주었다.
“오라버니는 평소에 헥토 백작과 자주 식사 자리를 가지셨죠. 개인적으로 공과 사를 구분할 줄 모르는 사람이 국가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하는 의문이 드네요.”
헥토 백작 때문에 블린트까지 자질을 의심받을 위기에 처했다.
이러다 숨겨 둔 패를 꺼내 들기도 전에 결판이 나게 생겼다.
차라리 혼자였다면 무난하게 준비한 패를 꺼내 들 수 있었을 것이다. 왕궁 내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마구잡이로 의원들을 포섭한 것이 악영향을 미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블린트는 헥토 백작의 똥을 치우다가 자기까지 똥물에 잠기겠다 싶어서 빠르게 손절하는 쪽을 택했다.
“방금 건 내 잘못인 걸 인정하지. 헥토 백작, 루크 백작에게 사과하게.”
“하지만 왕자님…….”
“자네 때문에 계속 의제와 상관없는 얘길 하고 있단 걸 알고 있긴 하나?”
“크윽. 미안하네, 루크 백작. 방금 내 발언을 철회하겠네.”
“나 역시 사과하지. 추후 헥토 백작에게 따로 징계를 내릴 테니 그걸로 마무리하고 다음 의제로 넘어가 줬으면 좋겠군.”
루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헥토 백작의 발언이 불러온 논란이 일단락되었다.
겨우겨우 넘어가긴 했어도 주도권을 완전히 루크에게 빼앗겼다.
이대로 가다간 영락없이 루크가 하니온 공국의 공왕이 될 것이다.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루크의 압박 속에서 블린트는 절실하게 숨 돌릴 시간을 원했다.
“아바마마, 첫 번째 의제가 일단락되기도 했고 분위기도 어수선하니 이번 청문회를 여기서 마감하고 다시 날을 잡는 게 어떻겠습니까?”
카이둔 국왕도 루크가 그랜드마스터라는 사실 때문에 아직까지 혼란스러워하고 있던 터라 태세를 정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때문에 블린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음, 일국의 공왕으로 임명하느냐 마느냐를 논하는 일이니 충분한 논의를 거친 후에 결정하는 것이 옳을 테지. 이번 청문회를 1차 청문회로 정정하고 추후에 2차 청문회 날짜를 다시 지정할 테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다.”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할 만하다고 여겼는데 청문회가 진행되는 내내 루크에게 휘둘리기만 했다.
1차 청문회가 마감되면서 참석한 이들이 삼삼오오 무리 지어 대회의장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루크와 엘리나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깃들어 있는 반면,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뭐라도 씹은 양 하나같이 미간에 빗금이 그어져 있었다.
블린트는 추종자들과 함께 대회의장에서 나오자마자 긴급하게 지시를 내렸다.
“헥토 백작에게 병을 핑계로 고향에 내려가라고 해 둬. 그리고 다시는 왕궁 안으로 들어올 생각은 하지 말라고 전해 두도록.”
“그건 너무 과한 처사가 아니온지…….”
“도움은 되지 못할망정 발목만 잡는데 계속 안고 가란 소리더냐?”
“아, 아닙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헥토 백작에겐 있는 그대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루크가 워낙에 초장부터 강수를 둔 탓에 준비해 온 패의 대부분이 쓸모없게 되었다.
하지만 블린트도 보통은 아닌지라 가지고 있는 패가 전부 무용지물이 되었을 때를 대비한 보험을 들어 두었다. 루크의 공왕 즉위 권리는 ‘주인 없는 땅’이 발생했을 때만 사용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니온 왕가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여 있는 자를 발견한다면 그를 후계자로 내세워 루크의 권리를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다.
블린트는 몇 년이 걸리든 루크를 막아설 기세로 결의를 다졌다.
“지금까지 짜 온 모든 계획을 취소하고 장기전으로 간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 테니 반드시 하니온 왕가의 후계자를 찾아내도록.”
루크의 공왕 즉위를 막기 위한 은밀한 대화가 오가는 가운데 대회의장 정문의 처마 밑에서 검은 깃털의 앵무새 한 마리가 하품했다.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를 지닌 앵무새는 처마 밑의 버려진 제비 집을 차지하고선 낮말은 새가,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격언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