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93화 무너져 가는 아성(4)
1차 청문회가 끝난 다음 날, 제3 별궁에 귀족들의 방문 요청이 쇄도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루크가 엘리나를 밀어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표면상으로는 엘리나가 그랜드마스터인 수하를 데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전설에 따르면 그랜드마스터 앞에선 군대의 규모는 의미를 잃는다고 했다.
전설 속에서나 존재하던 막강한 실력자가 엘리나 왕녀파에 속해 있으니, 엘리나가 국왕이 되는 것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1차 청문회가 끝나자마자 헥토 백작이 병을 핑계로 휴직계를 내고선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다. 병은 핑계일 뿐, 블린트에게 버림받았다는 것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일련의 과정에서 블린트 왕자를 따르던 귀족들은 경각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블린트 왕자는 우리를 지켜 줄 힘이 없다! 살려면 엘리나 왕녀에게 붙어야 한다!’
멍청하게 대놓고 이리 말하는 이는 없었으나 모두가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대세인 엘리나에게 줄을 서기 위해서 그녀의 눈에 들고자 너도나도 알현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니까 방문 요청이 20건이나 들어왔다고 하네요. 기네스 백작, 코아 백작, 즈베시치 자작… 몇 년 전만 해도 절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던 사람들이죠. 이제 와서 꼬리 흔드는 걸 보고 있으면 정말 사람인지 개인지 모르겠다니까요.”
그러는 엘리나도 아침 댓바람부터 루크가 머무르고 있는 귀족용 숙소에 들어와 있었다.
뻔뻔하다느니, 귀찮다느니 해도, 말하는 내내 입꼬리가 씰룩거리고 있었다.
정치란 원래 긴 시간 동안 지긋지긋하게 헛물만 켜다가 한순간에 판을 뒤집는 분야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올 때까지 몇 년을 기다렸던가.
그녀가 보내 온 인내의 시간을 감안하면 입꼬리가 왈츠를 춘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방문 요청은 모두 거절할 생각이에요. 어중이떠중이를 데리고 있어 봤자 발목만 붙잡힐 테니까요. 그 부분은 1차 청문회에서 오라버니가 직접 증명했죠. 그래도 그 작자들이 머리 낮추는 꼴을 보고 있는 게 마냥 기분 나쁘지만은 않네요.”
루크는 그녀가 자랑을 하든 말든 별 관심 없었다. 어차피 조만간 부수고 다시 조립할 왕국이다. 차기 국왕이 등극하기 전에 점령해 버릴 텐데 계승권자들의 알력 다툼 따위 알게 뭔가.
그녀가 계속 루크를 마음에 두고 있어 봤자 그녀만 힘들어질 뿐이다.
이 이상 희망을 주는 건 너무 잔인하기에 루크는 이쯤에서 선을 그어 주고자 입을 열었다.
“왕녀님, 관계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녀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나 보다. 재정립 얘기를 꺼냈는데도 놀라기보다는 ‘올 게 왔구나’ 하는 태도로 받아들였다.
“후우, 재정립 말이죠. 그럴 때가 되긴 했죠. 한 가지만 확실해 두죠. 공왕이 된 후엔 국왕을 노릴 건가요?”
대놓고 말하지 않았다 뿐이지 겐크 왕국을 점령할 것이냐는 뜻을 담은 질문이었다.
위험한 질문이기에 루크도 신중을 기하여 대답했다.
“어떤 답을 기대하고 던진 질문이십니까?”
“명확하게 대답해 주시지 않네요.”
“여긴 겐크 왕궁 안이고, 저는 아직 겐크 왕국의 귀족입니다.”
“모범 답안이긴 해도 제 입장에선 섭섭하네요. 전 아직도 아군이 아닌 건가요?”
그녀의 재량과 인품은 루크도 인정하는 바이다. 지금 루크의 행정관은 드골인데, 그는 나이도 있고 지역을 관리하는 것만도 벅찼다. 미래를 위해 왕국 하나를 관장할 능력 있는 행정관이 필요하긴 하다.
능력만 놓고 보면 가장 적합한 인물 1순위는 단연 블린트다.
그러나 그는 루크의 밑에 들어올 성격이 아닐뿐더러, 겐크 왕국을 차지한 자가 해당 왕국의 왕족을 중용하는 것은 여러모로 모양새가 좋지 않다.
2순위는 엘리나인데 그녀 역시 왕족이다 보니 중용하기엔 모양새가 좋지 않다.
루크는 그녀에게 현실을 인식시켜 주기 위해 돌려 말하기를 그만두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세상은 왕가를 무너뜨린 이에게 충성하는 왕족을 좋게 보지 않을 겁니다.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얕보지 마세요. 제가 언제 그딴 거 신경 써 가며 일했었나요? 20년 넘게 비난을 들으며 살아왔어요. 함부로 제 한계를 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하긴, 몰래 왕궁 바깥으로 나가서 일개 귀족과 같은 방을 썼다고 규탄받을 때도 당당히 행동하던 사람이다. ‘내가 하고 싶어서 그런 건데 너희가 어쩔 건데?’라고 당당히 루크와의 가짜 관계를 진짜인 양 당당히 밝혔다.
세상이 어떤 눈으로 보든 제 갈 길만 간다. 정말이지 황소고집이 따로 없다.
하지만 후에 그녀를 중용하기 위해선 한 가지 더 넘어야 할 산이 있다.
루크는 겐크 왕국을 칠 때 ‘카이둔 국왕과 데메그리 교의 관계’를 명분으로 사용할 건데, 그러면 친족인 엘리나도 처벌 대상에 포함되고 만다.
루크는 턱을 매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지금 수면 아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시는 듯하니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니온 왕국의 마물과 라그나로스까지 전부 카이둔 국왕 전하께서 벌이신 일입니다.”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엘리나는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땡그란 눈을 몇 번이고 깜빡인 후에야 말을 더듬으며 재차 확인에 나섰다.
“자, 잠시만요.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아바마마께서 뭘 하셨다고요?”
“데메그리 교와 손을 잡고 하니온 왕국을 정복하려고 했지요. 라그나로스가 깨어났는데 우연히 그랜드마스터가 나타나서 아무런 피해 없이 끝날 리가 있겠습니까? 사전에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맞춤식 대응이 가능했던 겁니다.
“아아, 머리야. 아바마마께서 데메그리 교와……. 아무리 정복에 목매고 있다지만 금기인지 아닌지 구분할 줄은 알고 계실 거라 생각했는데…….”
“알고 계시겠지만 데메그리 교와 연관된 자는 가족까지 처벌 대상으로 포함되지요.”
“잠시만요. 숨 좀 고를게요. 쓰읍, 하아~ 좋아요. 이제 왜 절 멀리하려고 했는지 이해가 되네요. 처벌 대상이 될 사람에게 정을 줘서 좋을 건 없죠. 이해했어요, 전부 이해했어요.”
정신적인 충격이 큰지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같은 말을 반복하는 엘리나였다.
루크는 그녀에게 살아날 길을 제시했다.
“왕녀님께서 목숨을 보존하고 나중에 세간의 비난도 피하면서 행정관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합니다. 다만 쉬운 길은 아니지요.”
“유배를 면하려면 뭐든 해야죠. 뭘 하면 되나요?”
“볼모로 다른 나라에 잡혀갔다가 돌아오십시오. 유일한 해결책은 그것뿐입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해결책 또한 거칠었다.
볼모는 국가 간의 조약을 지키기 위한 담보이다. 국가 간의 조약이 유지되고 있는 한 신성 제국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볼모를 건드릴 수 없다. 원래라면 형벌이나 다름없는 처지가 오히려 그녀를 지켜 주는 보호막이 되는 셈이다.
다만 타국에서 아는 이 한 명 없이 갇혀 지내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유배를 떠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조치였다.
어차피 똑같은 유배라면 조약 기간이 끝남과 동시에 일선에 복귀할 수 있는 볼모 쪽이 백배 낫다.
엘리나는 자신의 팔자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혹시 제가 여태까지 왕족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몇 번이나 되는지 아세요?”
“있긴 합니까?”
“단 한 번도 없어요.”
진심이 묻어 나오는 한마디였다.
왕궁이 그녀를 가두는 새장이 되어 여태껏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날갯짓 한번 못 해 봤다.
차라리 왕족이 아니었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그리 생각한 것인지 그녀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이쯤 되면 평생 고통받는 팔자로 태어난 게 아닐까 싶어요.”
“볼모 생활이 끝난다면 모든 걸 보상받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땐…….”
루크가 볼모로 생활한 후에 그녀에게 주어질 직책을 말하려던 순간.
엘리나의 검지가 루크의 입술에 닿았다.
그녀는 천천히 검지를 떼며 싱긋 웃었다.
“이후의 말은 그때 가서 듣겠어요. 기대감을 안고 떠나면 힘든 볼모 생활도 버틸 수 있을 것 같거든요.”
힘들 때 웃는 것이 일류라면 그녀는 틀림없는 일류다.
계절은 겨울인데 그녀의 얼굴에만 봄이 찾아온 듯 산뜻함이 감돌았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네요. 아쉽지만 공왕 즉위를 지원하는 건 여기까지만 하겠어요. 일부러 볼모가 되려면 준비할 게 많거든요.”
“건투를 빌겠습니다.”
“백작도요. 전 이만 가 볼게요.”
“멀리 나가지 않겠습니다.”
“후후, 끝까지 백작답네요. 그래서 좋은 거지만요.”
엘리나가 방에서 나가자 은방울꽃의 향만이 남아 방금까지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음을 상기시켰다.
엘리나와 교차하듯 창문을 통해 파이가 들어왔다.
“간식! 간식!”
1차 청문회에서 헥토 백작이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으니 블린트 왕자파는 작전의 변경을 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떻게 움직일지 알아보기 위해서 사전에 파이를 배치해 두었다.
루크는 파이의 부리가 닿을 듯 말 듯한 위치에서 육포를 흔들며 말했다.
“보고부터 해.”
“시간 끌기! 질질 끌기!”
“시간 끌면서 후계자를 찾는다고 했나 보군.”
“정답! 정답!”
파이랑 대화하다 보면 실시간으로 눈치가 일취월장하는 게 느껴진다. 언제 한번 레이아가 파이를 살아 있는 ‘눈치 감별기’라고 평한 적이 있다.
파이의 보고에 따르면 헥토 백작의 실책으로 준비해 둔 패가 전부 무용지물이 되었고, 계속 시간을 끌며 루크가 권리를 행사할 조건을 뭉개기 위해 하니온 왕국의 왕위 계승권자를 찾아 나섰다고 한다.
권리를 행사하는 데 있어 블린트 왕자파의 숨겨진 패가 유일한 변수였는데, 더 이상 숨기고 있는 패가 없다고 하니 거리낄 게 없었다.
시간 끌기 작전?
조잡한 작전을 성공하게 놔둘 정도로 루크는 관대하지 않다.
오늘 아침, 속전속결로 루크의 공왕 즉위를 확정시킬 수단이 도착했다.
이곳에 오기 전, 비행 부대와 정찰 부대를 데메그리 교의 근거지를 수색하는 일에 투입시켰다.
이번 임무는 레이아의 비행 훈련을 겸한 임무였는데, 그녀는 첫 임무에서 곧바로 성과를 올렸다. 수색에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데메그리 교의 근거지로 추정되는 장소를 찾아낸 것이다.
6서클의 범용성과 삼색 제비의 기동력이 합쳐지면서 만들어 낸 성과였다.
루크는 품에서 레이아가 보내온 쪽지를 꺼내어 다시금 내용을 확인하였다. 쪽지에는 이리 적혀 있었다.
[데메그리 교의 근거지로 추정되는 장소를 찾았어요. 서부 지방의 미네랄 산맥이에요. 자세한 위치는 동봉한 지도에 표기해 뒀어요.]
이 지도는 카이둔 국왕을 조급하게 만들 것이다. 더불어 루크가 싫다고 해도 저쪽에서 먼저 제발 공왕이 되어 달라고 빌게 해 줄 협상 재료이기도 하다.
벌써부터 어리둥절해하는 블린트 왕자의 표정이 눈에 선하다.
목적이 같았던 카이둔 국왕이 두 팔을 걷고 루크를 공왕으로 만들지 못해 안달인 모습을 보게 될 테니까.
* * *
같은 날 오후, 카이둔 국왕의 명령하에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다음 청문회는 한 달 후쯤이나 될 거라 여겨 자택에서 대기하고 있던 왕궁 의원들은 부랴부랴 왕궁으로 달려왔다. 별궁에서 시간을 끌기 위한 작전을 세우던 블린트도 영문도 모른 채 소집에 응했다.
하루 만에 다시 대회의장에 모인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루크의 공왕 즉위 건이 까마득히 작게 느껴질 법한 대사건이었다.
사전에 미리 의제를 전해 들은 의회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긴급회의를 소집한 이유를 알렸다.
“국내에서 데메그리 교의 근거지가 발견됐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