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역대급 재능으로 환생-94화 (94/200)

# 94

94화 무너져 가는 아성(5)

카이둔 국왕은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루크가 그랜드마스터의 경지란 것만으로도 아직 혼란스러운데 숨겨 두었던 데메그리 교의 근거지까지 들켜 버렸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어떻게 그곳을 알아냈지?

청문회에 참가하기 전에 미리 드래프트 영지의 비행 부대에 수색하라는 명령을 내려 놓은 게 틀림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지금 이 시점에 근거지를 찾아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루크가 보여 주고 있는 일련의 행동들 속에서 카이둔 국왕은 심히 불안해하고 있었다.

‘설마 국내에 데메그리 교와 내통 중인 자가 있단 걸 알아차린 건가?’

아직 겐크 왕국에서는 한 번도 데메그리 교의 활동 흔적이 발견된 적이 없다. 그런데도 루크는 남몰래 비행 부대를 투입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바로 루크가 겐크 왕국 내에 있는 데메그리 교의 존재 여부를 사전에 눈치챘다는 것이다.

좀 더 비관적으로 보면 이미 자신과 데메그리 교의 관계까지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만약에 그렇다면 일이 심각해진다.

정말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국내의 누군가가 내통 중인 것까지만 알고서 움직이고 있는 건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본인에게 대놓고 물을 수도 없으니 카이둔 국왕으로선 강한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루크가 제출한 자료에 표기된 데메그리 교의 근거지 위치는 실제로 데메그리 교의 사제들이 숨어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카이둔 국왕은 모른 척 시침을 떼며 정보의 신뢰성에 의문을 던졌다.

“루크 백작, 국내에서 데메그리 교의 신전이 발견되었다고 했는데, 확실한 정보인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제출한 것이기에 루크로선 켕길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니온 왕국에서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수색을 펼쳐서 얻어 낸 결과입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정보이지요.”

데메그리 교의 존재가 확실해지면서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카이둔 국왕에겐 비보일지 몰라도, 블린트 왕자파에겐 낭보였다.

블린트 왕자파는 카이둔 국왕과 데메그리 교의 관계를 모르고 있다. 때문에 루크의 공왕 즉위를 연장시킬 좋은 건수가 생겼다고 여겨 적극적으로 토벌을 외쳤다.

“사람으로 괴물을 만드는 극악무도한 자들을 가만히 놔두어선 안 됩니다! 당장 토벌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우릴 눈뜬장님으로 생각하지 않고서야 어딜 감히 겐크 왕국의 영토에 자리를 잡는단 말입니까! 신속히 제압하여 왕가의 위엄을 세워야 합니다!”

카이둔 국왕으로선 왕궁 의원들의 속없는 외침이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이걸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고, 요구대로 토벌을 하자니 기껏 갖춘 마물을 생산하는 라인이 전부 무너져 버린다.

남몰래 시설을 갖춘다고 그동안 얼마나 고생한 줄 아는가? 국고의 일부를 몰래 빼돌린 것부터 시작해서 미네랄 산맥에 사람이 들어서지 못하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그간의 노력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게 생겼는데 카이둔 국왕은 모른 척 입을 꾹 다물고 있어야 한다. 남의 속도 모르고 우렁차게 토벌을 외치고 있는 신하들이 이리도 밉상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증오스러운 작자는 역시 루크 백작이었다.

놈의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치명타로 작용하고 있다. 데메그리 교와의 관계를 알고서 이런 짓을 하는 건지, 모르고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으니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다.

‘상황 참 짜증 나게 돌아가는군. 토벌을 안 할 순 없고……. 어차피 손해를 볼 거라면 손실을 최대한 줄이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나.’

토벌을 택해도, 택하지 않아도 손해를 본다. 후자 쪽은 데메그리 교와의 관계를 의심받을 테니 아예 택할 생각조차하면 안 된다.

차라리 토벌대를 파견하되, 뒤로 몰래 데메그리 교에 연락을 취하여 토벌대가 도착하기 전에 철수하라고 전하는 게 가장 나을 듯하다.

토벌은 토벌대로 실시하고, 전력은 전력대로 유지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런데 기껏 머리를 짜내어 상책을 생각해 냈더니 루크가 다 된 밥에 재를 뿌렸다.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 했으니, 제가 창천 앵무를 타고 먼저 소탕 작전에 가담하겠습니다.”

루크에게 창천 앵무라는 최고의 탈것이 있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창천 앵무를 타고 가면 한나절 만에 도착하리라. 현재 데메그리 교의 본진에는 그랜드마스터를 막을 만한 수단이 없다.

철수고 나발이고 말을 전하기도 전에 전멸해 버릴 것이다.

그간 만들어 둔 마물과 5성급 마물을 생산할 수 있는 연구 자료를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루크의 출전만큼은 기필코 막아야 했다.

카이둔 국왕은 아랫입술을 자근자근 씹으며 고민에 잠겼다. 지금 이 순간 루크의 출전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긴 했다.

루크의 공왕 즉위를 인정하는 것.

그것뿐이다.

그리하면 루크는 하니온 공국의 사람으로 분류되고, 겐크 왕국의 귀족으로서 데메그리 교 소탕에 참가해야 할 의무를 짊어지지 않아도 된다.

물론 루크가 원한다면 토벌에 참가할 수 있긴 하나, 카이둔 국왕에게 타국 사람의 군사적 활동을 거부할 권리가 있기 때문에 합법적으로 루크를 막을 수 있다.

솔직히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니다.

자기 손으로 직접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 주는 격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여태껏 막대한 금액을 투자하여 키워 온 마물의 생산 라인이 무너진다. 마나마스터 이상의 존재라 불리는 5성급 마물 연구를 이제 와서 포기할 순 없다.

카이둔 국왕은 입술을 잘근거리는 것을 멈추고선 입을 열었다.

“루크 백작, 그대에게 부여한 주인 없는 땅의 공왕이 될 권리를 인정하지. 지금 이 순간부터 하니온 왕국을 하니온 공국이라 루크 백작을 루크 공왕이라 칭하겠다. 루크 공왕, 정식 대관식은 추후에 날을 정하여 실시할 터이니 지금 즉시 하니온 공국으로 넘어가 불안정한 민심을 안정시키게.”

카이둔 국왕의 깜짝 선언 앞에서 왕궁 의원들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누가 봐도 공왕 즉위를 인정한다는 말이 나올 흐름은 아니었다.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카이둔 국왕의 발언을 이상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새롭게 시간을 끌기 위한 작전을 짜 온 블린트는 당혹감에 물든 표정으로 황급히 이의를 제기했다.

“그 의제에 해당하는 논의는 추후에 다시 하기로 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데 어찌하여 갑자기 공왕 즉위를 허가하시는 겁니까?”

카이둔 국왕은 정치판에서 굴러먹은 햇수가 한두 해가 아니기에 그럴듯한 변명을 내놓았다.

“무슨 일만 생기면 루크 백작에게 의존하는 거야말로 왕가의 위엄을 떨어뜨리는 일이지. 아니면 국내의 인재만으로는 소탕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은 겐가?”

“그건 아닙니다만…….”

“데메그리 교 토벌이란 과제에 당면한 이 시기에 더 이상 공왕 자리로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이 얘기는 여기서 마무리하는 걸로 하고, 모든 의원은 데메그리 교 토벌에 집중하도록.”

블린트를 비롯한 왕궁 의원들은 카이둔 국왕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미 루크는 하니온 왕국에서 영웅이라 불리고 있다.

게다가 겐크 왕국에서까지 루크가 데메그리 교 토벌에 성공한다면, 겐크 왕국의 백성들마저도 그를 영웅으로 부르며 찬사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평가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루크의 활약이 쌓여 갈수록 겐크 왕궁의 위엄이 묻힐 수도 있다.

겐크 왕궁의 입지가 흔들리도록 놔둘 바엔 차라리 공왕 즉위를 인정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찝찝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즉위를 인정하는 거라서 딱히 이득을 봤다는 기분이 안 든다.

큰 손해, 작은 손해 중에 작은 손해를 택한 기분이다.

루크의 공왕 즉위가 확정된 순간, 블린트는 쥐고 있던 서류를 우악스럽게 구겼다.

서류에는 이번 청문회, 그리고 긴급회의 때 쓰기 위해 준비한 온갖 자료가 기입되어 있었다.

서류의 양과 중요한 부분에 그은 밑줄 및 요약 메모 등등.

그가 얼마나 꼼꼼하게 준비해 왔는지 방증하는 흔적들이다.

밤잠을 쪼개어 작전을 준비해 왔건만 그 어느 것 하나 쓰지 못했다.

전부 안이하기 짝이 없는 귀족들 때문이다.

그들은 모른다. 블린트가 뒤에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왕이 되기 위해서 피를 토하는 노력을 하고 있는데도 알아주는 이가 없다. 왕자니까 대접받고 살겠거니, 귀찮은 일은 전부 아랫사람들에게 시키고 있겠거니 하고 어림짐작으로 왕자의 신분을 부러워하며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

같은 세력이라 불리는 왕궁 의원들조차 블린트가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로서 마음 편히 지내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다.

블린트는 보는 이만 없으면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체 뭐가 문제지?

이만큼씩이나 노력하고 있는데, 왜 결과가 따라오지 않지?

마치 단체로 해야 하는 과제인데 혼자서만 100점을 맞기 위해 허우적거리는 느낌이다. 나라가 점점 수렁에 빠지고 있건만 주위 사람들은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이게 나라가 맞긴 한가? 고위층이 깊이 생각하길 포기하고 편한 길만 찾고 있는 게 과연 정상일까?

다른 이들이 누구를 데메그리 교 토벌의 대장으로 선정할 것인지 논하는 가운데 블린트는 고개를 푹 숙였다.

패배감에 치를 떨고 있는 블린트의 모습은 옆에서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는 루크의 모습과 대비되어 더더욱 초라하게 비쳤다.

* * *

폭풍과도 같던 긴급회의가 끝난 직후, 카이둔 국왕은 재빨리 개인 집무실로 복귀하였다.

원치 않게 루크의 공왕 즉위를 바로 인정하는 꼴이 되긴 했어도 대신 최악의 사태만은 면했다.

루크가 취임하기 위해 하니온 공국으로 떠났으니 당장 미네랄 산맥에 있는 본거지가 공격당할 일은 없다.

이제 왕궁에서 파견한 토벌대가 미네랄 산맥에 도착하기 전에 철수 명령을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

카이둔 국왕은 집무실에 놓인 책장을 옆으로 밀었다. 그러자 벽에 박혀 있는 비밀 금고가 나타났다.

다이얼을 돌려 금고 문을 열었다. 금고 안에는 각종 기밀 자료와 왕가의 보물, 수정구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중에서 수정구를 꺼내어 책상에 올렸다.

그는 마나를 다룰 줄 모르기 때문에 수정구를 사용하려면 마나석의 힘을 빌려야 했다. 책상 서랍에서 마나석을 꺼내어 수정구에 가져다 대었다.

즈즈즈즉!

마나석의 마나가 수정구에 흡수되며 안에 뿌연 안개가 생성되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미네랄 산맥에 있는 데메그리 교의 본거지에 있는 수정구와 연결되어야 하는데 계속 안개만 머무르고 있다. 이것은 연결되어 있는 수정구가 부서졌을 때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설마 벌써 루크가 손을 쓴 건가?

그러고도 남을 작자다.

데메그리 교의 본거지를 알아내고도 시간이 걸리는 보고를 택한 것은 시선을 돌리기 위한 것이고, 사실은 따로 병력을 파견하여 이미 소탕에 착수했을 가능성도 있다.

제발 아니길.

그것만은 아니길!

카이둔 국왕은 식은땀을 흘리며 긴급히 개인 호위 기사를 불렀다. 그의 개인 호위 기사는 데메그리 교와의 관계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측근이었다.

“당장 미네랄 산맥으로 가서 시먼과 본거지가 무사한지 확인해 보고 오거라. 만약에 무사하다면 조만간 토벌대를 파견한다고 알려 두고.”

왕궁에서 그리핀을 탄 기사 한 명이 시급히 왕궁을 빠져나가 미네랄 산맥으로 향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났을 때.

미네랄 산맥에 다녀온 기사가 자신이 본 것을 있는 그대로 전하였다.

“어, 없었습니다.”

“뭐?”

“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마물도, 사제들도, 연구 자료도 전부 사라졌습니다.”

“벌써 당했단 말이냐?”

“그, 그게 아니라… 스스로 철수할 것 같습니다. 오래전부터 조금씩 철수 작업을 진행해 온 것 같은 흔적이…….”

콰앙!

카이둔 국왕이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손톱이 살갗에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분이 차올라 부르르 떨었다.

기사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자명했다.

데메그리 교에서 더 이상 카이둔 국왕에게 이용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병기용으로 쓸 마물 생산에 얼마나 많은 자금을 투자했는데! 5성급 마물을 연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지원을 해 줬는데!

감히, 감히……!

카이둔 국왕은 이를 뿌득 갈며 눈에 핏발을 세웠다.

“빌어먹을 것들! 감히 먹고 튀어? 이교도 개자식들을 믿는 게 아니었어!”

외침의 여운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허탈감이 몰려왔다.

마물의 병기화에 모든 걸 다 쏟아부었건만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

이제 어쩐단 말인가.

내 꿈은, 앞으로 내 왕국은… 대체 어쩐단 말인가.

카이둔 국왕은 사기꾼에서 전 재산을 털린 사람의 심정을 느끼며 실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흐느적거리며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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