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96화 사냥과 절도의 차이(2)
하니온 왕국이 공국으로 격하되면서 형식상으로는 겐크 왕국의 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하니온 공국의 귀족과 백성은 왕국이니 공국이니 하는 것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까지 미네르바와 외척, 아슈타르 교를 가장한 데메그리 교 사제들에게 얼마나 시달렸던가.
하니온의 3대 악이라 불리던 자들을 단방에 처리해 준 데다, 살아 있는 재앙이라 불리던 라그나로스까지 처리해 주었다. 사실상 이 나라가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건 루크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왕국에서 공국으로의 격하는 나라의 격이 1, 2단계 내려간 것에 불과하다. 대신 왕의 격은 10단계 이상 올라갔다.
탁월한 정치 능력과 그랜드마스터의 경지, 전쟁에서 보여 준 병력을 운용하는 능력까지. 나라를 다스리는 이가 최고인데 간판 따위 아무렴 어떠랴.
루크가 벤티버에 도착한 날, 하니온 공국의 모든 귀족이 수도에 모여서 그를 맞이해 주었다.
“처음 인사 올립니다. 북쪽 해안의 영지를 맡고 있는 보리스 백작이라고 합니다. 전하와 함께 새 나라를 이끌어 갈 기회를 얻게 되어 무척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리스 백작가는 지방 영주 중에서 가장 작위가 높고, 하니온에서 가장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해 온 명문가였다.
공작 작위와 후작 작위를 독점하고 있던 외척이 모두 죽으면서 보리스 백작이 남은 귀족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작위가 높은 자가 되었다.
현재 지방 영주의 구심점은 보리스 백작, 장로회의 구심점은 게데스 자작이었다.
루크는 그들과 함께 왕궁으로 들어가 한 명 한 명 인사를 나누었다.
기존의 하니온 왕국이 미네르바라는 불안 요소를 안고도 프라임 왕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지방 영주들의 힘이 컸다.
미네르바와 데메그리 교의 사제들에게 착취당하느라 영지를 제대로 다스릴 수 없었던 것이지, 조건만 갖추어지면 능히 태평성대를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실제로 직접 한 명씩 인사를 나눠 봤는데, 다들 새 나라에 대한 기대감과 능력을 선보일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첫날에는 대관식을 약식으로 치르고, 건국을 기념하는 연회를 열었다.
벤티버에 도착한 지 이틀째 되는 날.
루크는 본격적으로 교통정리에 나섰다.
가장 먼저 실시한 것은 작위와 직책의 정리였다. 중책을 꿰차고 있던 외척 세력이 전멸했기 때문에 대부분 직책이 공석이었다.
루크는 기존의 귀족들과 드래프트 영지에서 데려온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직책에 적합한 작위를 내리기로 했다.
“장로회는 집행부로 이름을 바꾸고, 40세 이상 연령 제한을 없애는 걸로 하지. 드골을 집행부의 총책임자로 임명하고 백작의 작위를 내리겠다.”
사전에 루크에게 미리 언질을 받았기에 드골은 침착하게 단상에 올라서 작위 수여식에 임했다.
지금이야 담담하게 작위를 받아들이고 있지만, 처음에 루크가 백작 작위를 준다고 말했을 때만 하더라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얼마나 거부했는지 모른다.
영지 업무만 보아 온 사람이 어떻게 일국의 행정을 담당하겠냐는 둥, 별 볼 일 없는 집사에게 갑자기 백작 작위를 주면 사람들의 흉을 본다는 둥. 작위가 부담스러운 나머지 차라리 작위 없이 직책만 줘도 괜찮다며 한사코 거부했다.
하지만 루크의 한마디가 드골의 생각을 바꿔 놓았다.
“헌신적인 것과 미련한 것을 착각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군.”
사람이 너무 헌신적이어도 좋게 보긴 힘들다. 합당한 노동에는 합당한 대가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 루크의 지론이었다. 망나니 시절부터 한 번도 눈을 돌리지 않고 변함없이 충성을 바쳐 온 드골이라면 백작 작위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루크의 말에 드골은 느낀 바가 있는 것인지 그제야 작위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기존 하니온의 장로들은 모두 드골의 밑에 집어넣었다.
“게데스 자작 외의 기존 장로들은 집행부의 각 부서 책임자로 임명하고 작위는 그대로 유지하겠다.”
기존의 모든 장로는 불만 없이 루크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보여 주지도 않았는데 작위 상승을 논하는 것은 염치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윗사람이 외척 대신 드골로 바뀌었을 뿐이고, 작위만 그대로인 거지 나라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중책을 맡았기에 앞으로도 능력을 증명할 기회는 많았다.
귀족들 다음은 기사들의 차례였다.
구 하니온 왕국에서 활동하던 기사 중에서 마나마스터는 3명이다.
바스타드 소드를 쓰는 괴력의 소유자 아캄프.
단검 두 자루를 주로 쓰는 암살 전문가 라샤.
활을 주로 쓰는 데다 기마술의 달인인 바이스.
세 명 다 마나마스터로서 예전부터 하니온 왕국에서 활동해 온 실력자들이었다. 원래는 마나마스터가 7명이었는데 세 명은 프라임 왕국과의 전쟁에서 죽었고, 한 명은 마물을 토벌하다가 4성급 마물에게 사망하면서 지금의 세 명이 남은 것이었다.
루크는 마나마스터들과 제랄드의 새로운 직책을 호명했다.
“전 국왕 직속 기마대 대장 바이스, 새로 창설할 공왕 직속 기마대의 대장으로 임명한다.”
“기마대 대장 바이스, 공왕 전하의 명을 받듭니다.”
바이스는 하니온 명문가 출신으로 20대 중반의 미청년이었다. 어릴 때부터 말을 다루는 솜씨에 일가견이 있어서 마치 말과 한 몸이 된 것처럼 자유자재로 기마를 다룬다고 한다.
게다가 엘프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미남인지라 하니온에서 가장 러브 레터를 많이 받는 기사이기도 했다.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매년 그의 생일 때마다 국내외에서 수많은 귀족가의 부인들과 영애들이 선물을 보내오는 탓에 대형 창고를 몇 개씩 빌린다고 한다.
중성적인 외견과 다르게 제법 강단 있는 성격인지라, 미네르바가 수없이 곁에 두려고 수작을 부렸는데도 한 번도 넘어가지 않은 자이기도 했다.
“전 중앙군 대장 아캄프, 그대는 그대로 중앙군의 대장 자리를 맡도록.”
“중앙군 대장 아캄프, 미천한 몸을 높이 사 주신 것을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전하를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아캄프의 경우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을 몸소 실천한 평민 출신의 기사였다. 선천적으로 기골이 타고났는데, 가진 재능에 안주하지 않고 출세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피나는 노력을 하여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온 자였다.
엄하고 출세욕이 강해서 부하들 사이에선 호랑이 상관이라고 평가받고 있었다. 사람 자체는 성과주의자이긴 한데 밑바탕에 군대식 생각이 자리 잡고 있어서 충성심에 있어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전 국왕 직속 기동대 대장 라샤, 새로 창설할 공왕 직속 정보국의 국장으로 임명한다.”
“기동대보단 제 취향이겠네요. 조용히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편이거든요.”
라샤는 30대 초반의 여성이었는데, 특이하게도 하니온 왕국 출신이 아닌 엘프의 숲 출신이었다. 인간과 하이 엘프 사이에서 태어난 하프 엘프이며 프라임 왕국과의 전쟁 때 용병으로서 전쟁에 참여했다가 큰 공을 세워 기사 작위를 받았다고 한다.
본바탕이 떠돌이 용병이었던지라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성격이었다.
직책의 변경을 받아들이는 그녀의 태도를 두고 아캄프가 눈살을 찌푸리며 주의를 주었다.
“라샤, 공왕 전하의 앞이다. 여기 오기 전부터 계속 격식을 갖추라고 말하지 않았나?”
“참 나, 오늘 같은 날까지 잔소리를 해야겠어?”
“나라고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나 보지? 잔소리하게 만드는 게 누군데?”
“생긴 건 무뚝뚝한데 왜 저리 조잘거리는가 몰라.”
“공왕 전하 앞이야. 오늘만큼은 히스테리를 부리지 않아 줬으면 한다만?”
“누가 히스테리를 부렸다는 거야?”
루크의 앞이라는 사실을 잊었는지 서로 언성을 높이며 주거니 받거니 투닥거리는 라샤와 아캄프였다.
보다 못한 바이스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며 중재에 나섰다.
“자자, 공왕 전하의 앞입니다. 오늘만큼은 싸우지 말자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아캄프 경도 말이 심했고, 라샤 경도 사전에 격식을 갖추기로 약속했으니 끝까지 지켜 주십시오.”
“쳇, 바이스의 얼굴을 봐서 봐주는 줄 알아라, 반쪽 엘프 노처녀야.”
“흥, 누가 할 소린데? 근육 트레이닝만 하지 말고 뇌도 트레이닝 하시지?”
단상 아래에 있던 게데스 자작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루크에게 사과의 말을 전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싸우는 게 아니라 저들 나름대로의 대화 방식이니 이해해 주십시오. 행사가 끝나면 다시 한번 주의를 주겠습니다.”
귀족들이 모두 그러려니 하면서 쳐다보는 걸로 봐선 일상적인 일인 것 같았다. 그리고 라샤와 아캄프가 말다툼을 시작하면 바이스가 중간에서 중재하는 역할을 도맡고 있나 보다.
자주 싸우면 오히려 사이가 좋은 거라는 말도 있으니 마냥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 듯했다.
“가식 떠는 것보단 낫지. 다들 솔직해서 좋군.”
“관대하게 봐 주시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마지막은 제랄드의 차례였다.
제랄드의 경지는 여전히 마나유저 중급에 머물러 있다. 세 명의 마나마스터에 비하면 초라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옛날부터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 왔고, 부족한 무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용병술과 병법을 익히는 데 매진해 왔다.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제랄드의 능력은 중책을 맡겨도 능히 소화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평가하고 있다.
루크는 제랄드에게 시선을 보내며 그의 새로운 직책을 입에 담았다.
“전 드래프트 영지 지휘관 제랄드, 수도 방위군 대장 및 공국 총사령관에 임명한다.”
제랄드는 군인의 표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절도가 넘치는 동작으로 단상에 올라서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 앞으로도 항상 전하의 검으로서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
제랄드에 관해선 말할 것도 없었다. 항상 충성스러운 기사의 모습을 일관하고 있고, 앞으로도 늘 같은 모습을 보여 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제일 처음 루크의 야망을 알아차리고 그때부터 준비해 왔으니 큰물에서 지금까지 그것을 아낌없이 발휘해 줄 거라 기대하고 있다.
이걸로 왕궁 내부의 작위 및 직책의 정리는 끝났다.
이다음으로 시급히 해결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재정 문제였다.
미네르바의 사치벽과 외척, 데메그리 교의 횡령 때문에 국고가 완전히 바닥나 있었다. 농업에서 나오는 수익만으로 국고를 채우려면 5, 6년은 걸릴 것이다.
루크는 하니온 왕국의 특산품을 떠올리곤 그와 관련된 질문을 던졌다.
“하니온 왕국 때부터 진주 양식 산업이 주된 수입원인 걸로 아는데 최근 3년분의 장부를 보니 진주를 수출한 내역이 없더군. 그간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보지?”
하니온 북부 해안에선 그레이트 쉘이라는 거대 조개를 양식하여 얻은 진주를 수출하는 산업이 발달해 있었다.
주로 수출하는 곳은 거인국이고, 가격이 비싸서 하니온 재정의 3할을 담당하는 주 수입원이기도 했다.
재정의 3할을 담당하는 산업이 3년 전부터 아예 거래한 내역이 없어서 장부에 공란만 남아 있다.
그 이유에 대해 물으니 게데스 자작으로부터 심상치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 진주 사업은 해저 섬의 어인들 때문에 몇 년 전부터 중단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