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97화 사냥과 절도의 차이(3)
게데스 자작의 말에 의하면 아직 그레이트 쉘 양식은 계속 시도하고 있다고 한다.
그레이트 쉘의 알을 채취하여 부화장에서 3개월 동안 기르면 직경 5미터짜리 거대 조개로 성장한다.
그리고 성장한 그레이트 쉘을 벤티버 북쪽 해안의 갯벌로 옮겨 인위적으로 이물질을 계속 투입한다. 그럼 그레이트 쉘은 껍질 안으로 들어온 이물질을 분비물로 감싸서 단기간에 거대 진주를 만들어 낸다.
그레이트 쉘의 진주는 주로 거인국에 수출하는 편이다. 거인들은 덩치가 커서 일반 진주로는 치장하기가 힘들다. 크기가 큰 그레이트 쉘의 진주로만 거인에게 어울리는 장신구를 만들 수 있었다.
지름 30센티미터짜리 진주 하나가 3억 루소에 거래되고 있으니, 그야말로 황금 알을 낳는 거위나 다름없는 사업이었다.
하지만 3년 전부터 어인들이 그레이트 쉘을 멋대로 남획해 가고 있다고 한다.
어인들이 기르는 대포 해마에게는 그레이트 쉘이 영약과도 비슷하여 그레이트 쉘의 속살을 먹이면 대포 해마의 물대포 위력이 한층 상승한다.
그런 까닭에 대포 해마의 강화를 위해서 양식장을 습격해 그레이트 쉘을 강탈해 가고 있는 것이다.
오래전, 큰 바위 부족과 검은 노을 부족에게 약탈당하던 시절의 드래프트 영지가 떠오르는 건 착각일까?
당시의 드래프트 영지는 병력이 없어서 당하고 살았다 치더라도 하니온 왕국 시절에는 병력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루크는 국내 최대의 산업이 몰락하고 있는데도 가만히 있던 것이 이해가 안 되었다.
“재정의 3할이나 차치하는 산업인데 손 놓고 있었다는 게 납득이 안 가는군.”
“마냥 가만히 있진 않았습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았지요. 24시간 내내 해안 경비대를 돌려 보기도 하고, 다른 왕국에서 마법사를 불러다가 진압하려고도 해 봤습니다.”
게데스 자작은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바다 밑을 통해서 움직이는 작자들인지라 사전에 발견할 수가 없더군요. 밀물 때만 몰래 들어와서 그레이트 쉘만 쏙 빼 가니 막을 방도가 없습니다.”
“협상은 시도해 봤고?”
“물론 해 보았지요. 물물 교환으로 가져가는 거라면 납득할 테니 차라리 거래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더군요.”
“뭐라고 했지?”
“바다 생물에 네 것 내 것이 어디 있냐고 자기들은 약탈이 아니라 사냥을 한 거라며 코웃음 치더군요.”
상대는 물속에서 자유자재로 이동하고,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는 종족이다. 밤바다와 해저라는 조건이 합쳐지면 인간의 눈으로 그들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다.
경비선 수십 척을 띄워도 수면 아래로 지나가는 어인 한 명을 발견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었다.
양식장을 옮기면 어떨까 싶었는데 환경적인 요인 때문에 그마저도 힘들다고 한다.
그레이트 쉘을 양식할 수 있을 만큼 넓은 갯벌은 전 대륙을 통틀어도 하니온 공국의 북부 해안선밖에 없다.
결국 어인들과의 관계를 새로 정립하지 않는 이상 진주 양식 산업을 재개하는 건 요원하다고 봐야 했다.
매년 2,000~3,000억 루소에 달하는 이익을 안겨다 주는 사업을 인간이 되다만 어류들 때문에 포기할 순 없는 노릇이다.
루크는 해저 섬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을 우선순위 리스트의 최상단에 놓았다.
“조만간 양식장에 들러야겠군. 드골, 비공식 방문으로 일정을 짜 둬.”
“안 그래도 그리 말씀하실 줄 알고 일정표를 수정하고 있었습니다.”
드래프트 영지에선 영주가 저택 바깥으로 나가서 직접 현장을 둘러보는 게 일상화되어 있었다. 공왕이 되어서도 직접 행동에 나서는 성격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왕이 직접 나서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하니온의 귀족들은 루크의 결정에 당혹스러워했다.
“그런 건 아랫사람들에게 맡기시지요. 이젠 귀족이 아니라 왕이 되셨습니다. 왕이 사소한 일로 왕궁을 비우면 백성들이 혼란스러워합니다.”
“게데스 자작, 나한테 왕의 자세를 가르치려 드는 건가?”
“그것이 아니라 당연한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겁니다. 모름지기 왕은 몸이 무거워야 한다 했습니다. 공왕 전하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지금처럼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것은 삼가셔야 합니다.”
“납득이 안 되는군. 그러면 묻도록 하지. 장인이 혼을 담아 벼려 낸 명검을 방에 걸어 두기만 하든가?”
“전하는 검이 아니지 않으십니까.”
“아니, 검이 맞아. 국가의 적이 되는 자를 일도양단할 수 있도록 수년간 숫돌 위에 내 자신을 갈아 왔지. 자신을 용도에 맞게 쓸 줄 모르는 인간이 다른 사람을 알맞게 쓸 수 있을 것 같나?”
카인 국왕일 시절, 왕국의 사정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신하들의 보고밖에 없었다.
그 결과 어떻게 됐는가?
왕국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 정말로 그런 줄 알았다가 송두리째 속국으로 전락했다. 게다가 보고라며 입에 발린 말만 하던 것들은 등 뒤에서 자신을 찔렀고 말이다.
같은 과오를 되풀이할 정도로 루크는 어리숙하지 않다.
조심조심 다뤄지는 구중궁궐 속의 달걀이 될 바엔 지금처럼 명검을 자처하는 게 백배 낫다.
그렇게까지 말하자 게데스 자작을 비롯한 집행부의 귀족들은 규격 외의 천재에게 전통이라는 틀을 강요하는 것이 맞나 싶어 주장을 철회했다.
“전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전력을 다해 보조를 맞추는 것이 신하 된 자의 도리이겠지요.”
“알았으면 됐어.”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까지의 왕족들과 정반대이신지라 익숙하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최대한 빨리 적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만하면 얼추 다 정리된 것 같군. 자잘한 부분은 다음 정기 회의 때 논하도록 하지.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고.”
* * *
루크는 즉위한 이후에 한 달 동안은 왕궁에 머무르며 국정을 돌보았다.
큼직한 안건을 몇 개 정리하자면 국내의 아슈타르 교 사제를 가장하여 잠입한 데메그리 교 사제들에게 처벌을 내렸다.
그 과정에서 데메그리 교에 대한 정보를 좀 더 뽑아내려고 했는데, 체포된 자들의 대부분이 말단에 불과한지라 쓸 만한 정보는 없었다.
그래서 죄질이 나쁜 자들은 모두 사형에 처했고, 자질구레한 일만 하던 조무래기들에겐 무기 징역을 내렸다.
더불어 아슈타르 교 신전을 모두 허물고, 신전이 소유하고 있던 재산과 토지를 모두 몰수했다. 몰수한 재산을 모두 합치니 그 액수가 무려 수천억 루소에 달했다.
이는 1년 치 국가 예산에 필적하는 수치인지라 당장 써야 할 예산을 충당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아슈타르 교 사제들을 파견한 신성 제국에 피해 보상을 청구하였다.
사실상 데메그리 교 사제들을 파견하여 국가의 위기를 초래했으니 신성 제국에 책임을 묻는 게 맞다고 여겨 1년 치 국가 예산에 해당하는 금액을 보상으로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다.
아마 대답은 몇 달 후에나 도착할 것이다. 보상금을 받을 수 있을지, 신성 제국과의 관계 악화로 이어질지는 답장이 돌아온 후에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바쁜 한 달을 보낸 후에야 루크는 시간을 낼 수 있었다.
루크는 시간이 나자마자 왕궁 바깥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내일 그레이트 쉘 양식장에 들를 테니 준비해 둬.”
* * *
벤티버 북쪽 해안으로 가는 내내 호위 겸 안내역으로 따라온 바이스가 해저 섬의 현황에 대해 알려 주었다.
해저 섬은 인간의 왕국으로 치면 공작령 정도의 크기인 어인들의 왕국이다. 해저 섬의 어인은 물의 마법이 특기인 머메이드와 소리를 이용한 음공이 특기인 세이렌, 두 종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대로 세이렌이 용왕의 자리를 차지하고서 해저 섬을 다스려 왔다. 그런데 3년 전, 머메이드들이 반란을 일으켜 용왕을 죽이고 해저 섬을 차지했다고 한다.
그것에 반발하여 세이렌들이 들고 일어났고, 현재까지도 두 종족이 대립하며 싸우고 있다.
바이스의 설명을 듣던 도중 루크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대포 해마를 강화해서 상대측을 제압하려고 그레이트 쉘 양식장을 습격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되나?”
“정확히는 머메이드 쪽에서 양식장을 습격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나마 세이렌들은 선이라는 것을 구분할 줄 알고 있습니다.”
“용왕 자리도 빼앗는 놈들에게 그레이트 쉘은 약탈 축에도 못 들겠군.”
“저희가 볼 땐 도적 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만요. 저도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현장에 가담한 적이 있었는데 도저히 막아 낼 방도가 안 보이더군요. 그래도 전하께선 난관들을 해결하셨으니 저희가 놓친 부분을 발견하시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겉보기와 다르게 아첨이 능숙한걸?”
“하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걸 두고 아첨이라고 하진 않지요.”
보기에는 콧대가 높은 귀족가의 도련님처럼 생겼는데 겉모습과는 다르게 소탈한 성격이었다. 갑자기 왕이 바뀌었는데도 흔들리는 기색이 없었고, 오래전부터 루크를 섬긴 것처럼 우직하기 그지없었다.
루크는 외견과 일치하지 않는 바이스의 성격 뒤에 많은 일이 있었을 거라 짐작하였다.
“외모 때문에 고생이 많았겠군.”
“뭐, 없다고 할 순 없지요. 처음에는 미네르바 대비에게 봉사해서 출세했다느니, 변태 귀족의 동성 애인이니 온갖 소리를 다 들었습니다. 하지만 발끈한다고 알아주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결국 실력으로 증명하는 수밖에 없더군요.”
“불편하긴 해도 그게 정론이지.”
“개인적으로 전하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 가문은 외척 때문에 몰락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죠. 아마 전하께서 정리해 주시지 않았다면 직접 봉기를 일으켰을지도 모릅니다.”
지방 영주들 못지않게 마나마스터들도 이전 정권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전 정권에 대한 반감이 그대로 루크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치환되어 작금의 충성심이 된 게 아닐까 싶다.
루크로선 솔개를 잡았더니 물고기까지 딸려 온 격이다.
“그런데 아캄프와 라샤는 얼굴만 마주치면 서로 물어뜯으려고 안달이던데, 왜 그런 거지? 정작 말하는 걸 들어 보면 진심으로 싫어하는 것 같진 않던데.”
“음, 두 사람은 꽤 복잡한 관계입니다. 예전에 사귀다가 헤어진 전적이 있어서 말이죠.”
“모든 의문이 단번에 해결되는 대답이군.”
“이게 좀 정치적인 문제가 얽혀서 당사자들 의사랑 관계없이 헤어진 거라 귀족분들도 안쓰럽게 여기고 있지요. 그냥 그러려니 하고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공과 사는 잘 구분하고 있으니까요.”
“공과 사만 구분하면 손댈 필요가 없지. 그렇게 말하는 바이스 넌 어때? 듣자 하니 국내외 가리지 않고 인기가 많다더군.”
“자랑은 아니지만 과분할 정도로 높이 평가해 주시는 여성분이 많긴 합니다. 근데 너무 많으니 오히려 고르기가 힘들더군요.”
“그런 걸 두고 배부른 소리라 한다지.”
“전하께서도 마음만 먹으시면 얼마든지 고르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맞아, 그래서 급하게 고르지 않는 것도 있지.”
“하하하,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은 격이군요. 성에 차는 분이 있길 바라겠습니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이동하다 보니 어느덧 그레이트 쉘 양식장에 도착했다. 시설은 예전에 라그나로스가 소환되었던 곳에서 1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한때 국가 재정을 담당하던 곳답게 시설의 규모가 상당히 컸다. 해안선을 따라서 부화장과 어린 그레이트 쉘 사육장, 가두리 양식을 위한 설비와 관리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소형 선박 십수 척까지.
어지간한 마탑은 저리 가라 할 정도의 기술력과 자금이 투입되어 있는 시설이었다.
한데 미리 연락을 받고 대기하고 있어야 할 양식장 소장이 보이지 않았다.
병사를 시켜 사람을 불러오게 하려던 찰나, 선박이 정박해 있는 선착장에서 머리가 반쯤 벗겨진 배불뚝이 사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헐레벌떡 달려왔다.
“미, 미리 마중 나오지 못해 죄송합니다, 전하!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서 이런 꼴로 인사드리게 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공왕을 맞이한답시고 차려입은 것 같은데 정장은 바닷물에 젖어 있었으며 몸 전체가 모래투성이였다.
긴급히 현장에 달려갔다가 루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도로 빠져나온 느낌이 강했다.
루크는 소장의 몰골에서 긴급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을 읽어 내곤 설명을 요구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말해 봐.”
소장이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분한 심정을 토로했다.
“또 놈들입니다! 놈들이 또 그동안 키운 그레이트 쉘을 파먹고 도망갔습니다!”
놈들은 밀물이 들어올 때만 갯벌에 들어와 그레이트 쉘의 속살을 대포 해마에게 먹이고 도망간다 했다.
해안선의 수위로 보건대 밀물이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말인즉, 아직 멀리 도망가진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침 잘됐다.
적의 정보를 뽑아내려면 적에게 직접 묻는 게 가장 빠른 길이 아니겠는가.
루크는 검집에서 보랏빛을 띠고 있는 검을 빼 들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안 그래도 무전취식범들의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잘됐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