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100화 무조건 따르는 게 정신 건강에 좋아(2)
루크 일행은 그대로 배를 타고 벤티버 북쪽 해안으로 되돌아갔다. 루크는 복귀하자마자 터너를 구속하라고 명하였고, 원래 일정대로 양식장의 시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시설 자체는 크게 흠잡을 곳이 없었다.
중간에 횡령의 흔적이 몇몇 보였는데 전부 미네르바 정권 때 이루어진 것이고, 횡령한 자들은 루크가 공왕 즉위 건 때문에 잠깐 겐크 왕궁에 들렀을 때 게데스 자작이 손수 전부 쳐 냈다고 한다.
횡령을 한 자들이 빠지면서 생긴 인력만 보충하는 것 외엔 달리 손볼 곳이 없었다.
일정을 마치고 왕궁으로 돌아가는 길, 바이스가 시찰 때문에 잠시 흐름이 끊겼던 머메이드 건을 다시 끄집어냈다.
“이번 걸로 놈들이 그레이트 쉘 습격을 그만둘 것 같진 않습니다.”
“소문대로 어인 우월주의자들이라면 보복성 습격을 재개하겠지.”
“정말로 해저 섬에 직접 가실 생각이십니까?”
“지금 단계에서 당장 찾아가는 건 무리겠지. 좀 더 제대로 된 접근 방법을 찾아보고, 그 뒤에 생각하자고.”
“이번 일로 반대하는 게 무의미하다는 걸 톡톡히 깨달았습니다. 전하께서 그리 판단하셨다면 전력으로 보조하는 것이 최선이겠지요.”
“바람직한 자세군. 자기 역할을 안다는 건 중요하지.”
“체지방 좀 쌓으려다가 목 위에 있는 걸 날려 버리는 것보단 나으니 말이죠.”
게다가 터너의 증언으로 인해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양식장을 습격하는 건만 해결하면 된다고 여겼는데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사항이 추가되었다.
머메이드가 고대의 4대 정령왕, 그중에서도 물의 정령왕이던 아쿠아의 봉인석을 손에 넣었다고 한다.
아쿠아에 대한 정보는 문헌상으로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오래전 고대인들에 의해 봉인되었다는 기록만 있지 아쿠아가 어느 정도의 파급력을 가지고 있는지, 또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머메이드들은 내전을 끝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 후에는 아쿠아의 힘을 이용하여 그간 악연으로 남아 있던 하니온 공국으로 눈길을 돌릴 게 분명하다.
특히 이번에 전사들이 약탈하다가 붙잡혀서 죽지 않았는가. 그것에 대해 사과하기는커녕 적반하장으로 핏대를 세우고도 남을 작자들이었다.
적이 움직인 후에 대응하는 건 성미에 맞지 않는다.
사전에 놈들의 습격을 저지하면서 겸사겸사 아쿠아를 손에 넣는 게 좋을 듯하다.
루크는 왕궁으로 돌아가며 아쿠아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을 법한 존재를 떠올렸다.
‘라그 녀석이라면 같은 고대 정령왕이니 알고 있을지도.’
* * *
루크는 왕궁에 복귀한 후 곧바로 침실로 직행했다.
소금기에 절어 푸석푸석해진 몸을 씻어 내고선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고선 붉은 정령석을 꺼내어 소량의 마나를 불어 넣었다.
정령석이 빛을 발하며 화염이 솟구치더니 손바닥 사이즈의 라그나로스가 소환되었다. 라그나로스를 보자마자 새장 안에 있던 파이가 날개를 퍼덕이며 생난리를 쳤다.
“쪼끄매! 쪼끄매!”
“주인아! 마나 더 내놔! 오늘이야말로 통닭 한 마리 굽고 만다!”
“라그 좋아! 라그 좋아!”
“난 너 싫어, 인마!”
침대 옆 서랍장 위에서 펄펄 뛰며 파이와 실랑이를 벌이는 라그나로스였다.
루크는 검지로 라그나로스의 머리를 꾸욱 눌러 진정시켰다.
“그만하고 얘기 좀 하자. 같은 고대 정령왕 중에 아쿠아라고 알아?”
“아쿠아? 걔는 왜?”
“어인들과 엮였는데 놈들이 아쿠아 봉인석을 손에 넣었다고 하더라고. 봉인을 풀어서 이용하려던 모양인데 아쿠아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말이지.”
“그래? 이용할 상대를 잘못 고른 것 같군.”
“정령왕치곤 약한가 보지?”
“아니, 전혀. 순간적인 파괴력만큼은 고대 정령왕 중에서 가장 강할걸? 근데 워낙에 성격이 온순해서 전투 자체를 별로 안 좋아해. 옛날에도 괜히 자기 때문에 싸움 나는 게 싫어서 해저로 고대인들을 불러다가 본인 입으로 봉인해 달라고 했었는데, 뭘.”
하지만 터너의 증언에 따르면 해저 섬의 용왕 스커필드는 확실하게 아쿠아를 이용할 방법을 찾아냈다고 했다.
100퍼센트 확실하게 이용할 방법이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아쿠아 본인이 원치 않더라도 강제로 전투를 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거니까.
잠자코 생각에 잠겨 있던 중 루크는 문득 라그나로스의 말 중에서 한 가지 놓친 부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이, 방금 뭐라고 했어?”
“응? 아쿠아가 스스로 봉인됐다고 했지.”
“그거 말고, 그 전에.”
“해저로 고대인들을 불렀다고 했던가.”
“그래, 그거. 지금 지칭하고 있는 고대인들은 고대의 인간들을 말하는 거 아냐?”
“맞아, 그게 왜?”
“고대인들은 해저에 갈 방법을 알고 있었다는 게 되잖아.”
“난 또 뭐라고. 바람의 정령을 다룰 수 있으면 소량의 마나로도 물속에서 숨 쉬는 거랑 이동하는 거 전부 해결할 수 있어.”
“바람의 정령이라…….”
정령을 다룰 줄 아는 정령사라면 한 명을 알고 있다.
비교적 최근에 루크군에 입대하여 군의 훈련과 기사 양성소의 교육 과정을 동시에 소화하고 있는 다크 엘프다.
주로 대지의 정령을 다루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바람의 정령도 다룰 줄 아는지 모르겠다.
밑져야 본전이라고 하니 한번 물어나 봐야겠다.
* * *
현재 스텔라는 제랄드의 직속 부대에서 십인장으로 복무하고 있으며 벤티버 외곽의 기사 양성소에서 수련생으로서 주 20시간씩 교육을 받고 있다고 한다.
마침 제랄드가 왕궁에 들렀기에 그에게 스텔라의 능력을 물었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네 밑에서 복무 중인 스텔라에 대해 물어볼 게 있어서 말이야.”
“공적인 질문입니까? 사적인 질문입니까?”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사적으로도 아는 게 많나 보군.”
“커흠! 최근에 고민 상담 차원에서 대화를 나눈 적이 몇 번 있어서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별건 아니고 바람의 정령을 다룰 줄 아는가 싶어서.”
“예전에 대지 속성의 재능밖에 없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속성의 정령은 하급 정령조차 부르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그거 아쉽군.”
“바람의 정령을 쓸 줄 아는 자가 필요하십니까?”
“해저 섬에 가는 데 필요한데 정령사가 어디 흔한 인재여야 말이지.”
본궁 1층 복도에 서서 대화를 나누던 중.
모퉁이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급 정령도 괜찮다면 제가 다룰 줄 알아요.”
모퉁이 너머에서 걸어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라샤였다. 금발인 단발을 단정하게 꽁지머리로 묶어 뒤로 내고 양쪽 옆머리를 늘어뜨린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으며, 에메랄드빛 눈과 고양이 같은 눈매, 175센티미터쯤 되는 장신을 자랑하는 마나마스터였다.
특징적인 부분이라면 역시 엘프 특유의 뾰족한 귀라고 할 수 있었다.
하프 엘프이기에 하이 엘프보다는 귀가 짧고, 인간보다는 귀가 길다.
라샤는 정자세로 예를 갖춘 후 재차 입을 열었다.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지나가다 보니까 들려서요.”
“어차피 국정 회의에서 논의하려던 부분이니 상관없어. 그보다 바람의 정령을 다룰 줄 안다고 들은 것 같은데?”
“하급 정령이라면요.”
“잘됐군. 해저 섬에 갈 예정인데 따라오도록 해.”
“엥? 해저 섬이요?”
“가기 싫나 보지?”
“아뇨, 그건 아닌데 하급 정령으로는 두 사람 분량의 공기막이 한계라서요. 저와 전하 둘이서만 해저 섬에 가는 건가요?”
“둘이면 충분해. 많이 간다고 달라질 건 없을 테니까.”
“으음.”
썩 내키지 않는지 라샤는 검지로 턱을 쓸어내리며 고민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공왕이 달랑 기사 한 명만 데리고 적지로 가는 것이니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 봤자 기우에 불과할 텐데 말이다.
신분만 보면 공왕과 기사 한 명이다만 경지로 따지면 그랜드마스터와 마나마스터다.
움직이는 국가급 전력인데 반인반어들이 무슨 대수이랴.
그녀는 뒤늦게 루크의 시선을 느끼곤 손사래를 쳤다.
“아, 오해는 마세요. 같이 가는 게 부담스러워서 그런 게 아니라 너무 위험해서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돼서요.”
“내 생각엔 네가 걱정하는 사태는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만에 하나란 게 있으니까요. 전 상관없는데 혹시라도 제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갑자기 공기막이 사라져서 해저 섬의 수압에 압사당하실 수도 있어요.”
“반대로 말하면 네가 실수하지 않으면 무사하다는 거군.”
“어떻게든 데리고 갈 거란 뜻이죠?”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음, 명령이라면 어쩔 수 없죠. 대신 며칠만 시간을 주실 수 있나요? 바람의 정령을 써 본 지 오래돼서 감각을 되찾을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일정은 다음 국정 회의 때 정할 예정이니까 다음 주까진 시간이 있어. 그때까지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해.”
“네, 실망하시지 않게 최선을 다해 볼게요.”
입으로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하고 있는데 표정은 영 자신이 없어 보였다. 구속당하는 것 없이 자유분방하게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인지라 한 치의 실수도 없어야 하는 임무가 많이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인사를 올리며 물러날 때도 움직임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게 벌써부터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감정이 그대로 겉으로 튀어나오는 걸로 봐선 라샤는 그다지 거짓말에 능숙한 엘프는 아닌 것 같았다.
라샤가 물러난 후 루크는 제랄드에게 세 마나마스터의 인상에 대해 물었다.
“제랄드, 네가 보기에 하니온의 마나마스터들은 어때?”
“저보다 전하의 평가가 훨씬 정확하실 겁니다.”
“하니온 공국에 온 이후부터 많이 조심스러워졌군.”
“입은 불화의 근원이라지요. 더 많은 책임을 짊어지게 되었으니 행동거지도 더더욱 조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말해 봐.”
“일단 바이스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저와 비슷한 성격인 것 같더군요.”
“그 부분은 이미 겪어 봐서 알아, 나머지 둘은?”
“라샤는 기복이 있다는 것만 빼면 좋은 인재이지요. 아캄프도 공적 욕심만 조절할 줄 알게 되면 쓸 만한 인재가 될 겁니다. 둘 다 전하의 밑에서 기량을 만개할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정령사도 확보했겠다, 이젠 해저섬으로 떠날 일만 남았다.
루크는 제랄드에게 부재중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할 것을 지시하며 떠날 채비를 했다.
* * *
라샤는 루크로부터 직접 동행을 명령받은 후부터 개인 수련에 들어갔다. 매일매일 벤티버 북쪽 해안까지 가서 직접 하급 바람의 정령을 소환해 두 사람 분량의 공기막을 치는 연습을 했다.
수련을 돕는 상대로는 바이스를 택했다. 바이스라면 입이 무거워서 남몰래 수행하는 걸 남에게 알리고 다닐 사람도 아니고, 기사의 표본과도 같은 사람인지라 공왕의 안전을 위한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바이스는 개인 수련 시작부터 천금 같은 조언을 해 주었다.
“절대 눈 밖에 날 행동을 하지 마. 무조건 따르는 게 정신 건강에 좋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그냥 같이 가 봐. 가 보면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