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103화 비싼 건 비싼 이유가 있다(3)
클로이는 황당해하고 있었다. 머메이드는 세이렌과 하니온 공국에 있어 공공의 적이니 긍정적으로 생각할 줄 알았다.
그래, 대가를 요구할 순 있다. 급한 건 저쪽이 아니라 이쪽이니까. 그런데 이리 대놓고 요구할 줄은 몰랐다.
당황스럽긴 해도 이대로 물러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세이렌의 힘만으론 머메이드를 몰아낼 수 없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하니온 공국이 가세해 준다면 얘기가 다르다. 라그나로스를 쓰러뜨린 루크 공왕과 함께한다면 머메이드들을 몰아내는 건 어렵지 않을 터.
하니온 공국 사람들이 물속에서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추고 있단 걸 확인했으니 반드시 손을 잡아야 한다.
클로이는 세이렌 측에서 제시할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을 내걸었다.
“공국의 도움을 받아서 해저 섬을 탈환하면 향후 5년간 오션 마린을 반값에 제공하도록 하죠. 그쪽으로서도 기사와 마법사를 양산할 기회이니 이만하면 얼추 타산이 맞지 않나요?”
해저 섬의 주요 수출품인 오션 마린은 크기에 따라 적게는 100만 루소, 많게는 10억 루소까지 값어치가 나간다.
반값이면 아예 마진을 남기지 않고 원가로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마나 영약과 다를 바 없는 물건이니 대량으로 공급받는다면 그만큼 기사와 마법사 양산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
향후 5년간 독점 계약을 맺는 것만으로도 수천억 루소에 달하는 경제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셈이다.
파격적인 조건임에도 돌아오는 반응이 영 시원치 않았다.
“그걸로는 전하를 설득하기 어려울 것 같다만?”
“5년 동안 마진 없이 독점 제공하겠다는 건데 그게 모자란다고요? 저희가 그쪽에 제공할 수 있는 건 오션 마린밖에 없어요. 해저 섬에서 생산되는 것 중에 인간이 유용하게 사용할 만한 물건이 그것밖에 없다고요.”
“딴 데 가서 알아보지그래?”
“10년, 10년 동안 마진 없이 제공한다는 조건은 어때요?”
“받고 형제의 연을 맺을 것을 제안하지.”
“조약을 맺자는 건가요?”
“조약이 유효한 동안 하니온의 상선을 호위하는 호위대를 파견할 것. 그리고 하니온에서 군사적 협력을 요청하면 최대한 응할 것. 오션 마린 10년 제공에 조약까지 맺는 거면 손을 잡겠어.”
“저희가 호구로 보이나요?”
“아무리 봐도 그쪽의 상황은 공왕 전하께서 직접 나서야만 해결될 것 같군. 후사가 없으신 공왕 전하를 해저로 내려보내는 건데 우리가 안게 될 리스크는 안 보이나 보지?”
“아무리 그래도…….”
클로이가 말꼬리를 흐렸다.
갑판에 기대어 있는 금발 청년의 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
한 나라의 왕에게 직접 전장에 나서 달라고 하는 것이니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맞긴 하다.
그렇다 해도 조약의 조건이 너무 불리하다.
하니온의 수출 루트를 보호하려면 대규모 인력을 파견해야 한다.
오션 마린을 10년 동안 독점으로 계약하는 것만 해도 1조가 넘는 경제 효과를 누릴 텐데, 거기에 필요한 인건비 부분까지 해저 섬에 떠맡기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뿐만 아니라 하니온 공국에서 요구할 때마다 세이렌 전사들을 파견해야 하니 이보다 더한 불평등 조약이 있을까 싶었다.
당장 수락하기에는 조건의 규모가 너무 컸다.
측근들과 상의를 해보고 다시 대화를 시도하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중 수면 아래에서 세이렌 한 명이 급하게 올라와선 문제가 발생했음을 알렸다.
“클로이 님, 큰일 났습니다! 전방에서 머메이드 전사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설마 본거지의 위치가 발각된 건가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라이덴이 직접 300명의 머메이드 전사들을 데려오는데, 확신이 있으니 저만한 병력을 끌고 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큭, 하니온 공국 근처라면 저들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봐요! 머메이드 전사들이 몰려오고 있어요! 협상은 나중에 재개하기로 하고 일단 다가오는 적들부터 상대하는 게 어때요? 같이 협공을 가하면 해볼 만할지도 몰라요!”
하니온 공국의 공왕까지는 아니더라도 금발 청년 또한 상당한 실력자로 추정된다. 머메이드 전사 20명을 홀로 상대할 수준의 실력이니 세이렌들이 가세하면 머메이드 전사 300명은 어찌어찌 감당할 수 있을 터.
협상도 일단 목숨이 붙어 있어야 할 수 있다.
머메이드 전사들이 세이렌만 공격하고 떠날 린 없을 테니 금발 청년도 어쩔 수 없이 전투에 가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클로이는 당연히 협공하는 걸로 알고서 움직이려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 돌아왔다.
“아무래도 그쪽 손님인 것 같군. 우린 돌아가도록 하지.”
“잠시만요, 제가 방금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뭐라고요?”
“지금까지의 대화 중 어디에 손을 잡자고 확정 짓는 부분이 있었지?”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요! 당장 저들을 막지 못하면 우리 모두 죽어요!”
“해저 섬 탈환도 우리 도움이 필요하고, 지금 당장 몰려오는 전사들을 막는 것도 우리 도움이 필요하다라……. 할 줄 아는 게 있긴 한 건지 궁금해지는군.”
“살고 싶으면 그쪽이 내거는 조건을 모두 받아들이라는 거군요. 협박으로 들리는 건 착각일까요?”
“능력은 없고, 손해 보기는 싫고,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군. 그냥 없었던 걸로 하지. 생판 남의 투정을 들어 주는 취미는 없어서 말이야.”
금발 청년의 선장에게 손짓하자 선장이 대번에 배의 방향을 돌렸다. 중형 선박의 뱃머리가 방향을 달리하면서 유턴을 실시했다.
클로이로선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현재 본거지에 남아 있는 병력만으로 라이덴과 300명의 전사들을 뿌리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머메이드들은 아리아 파훼법에 통달해 있어서 아리아를 이용한 전투는 효율이 떨어진다. 그래서 무조건 머릿수로 압도해야 하는데 지금 본거지에 남아 있는 병력은 고작 200명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본거지에는 어린 세이렌들이 숨어 있었다. 당장에 적을 섬멸하지 못한다면 머메이드들의 트라이던트가 어린 세이렌들에게까지 닿으리라.
처음부터 클로이에겐 선택권이 없었던 셈이다.
클로이는 눈앞에서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는 비싼 동아줄을 힘껏 움켜쥐기로 마음먹었다.
“받아들이겠어요! 그쪽이 내건 조건을 받아들일 테니 손을 잡도록 해요!”
* * *
갑판 위에 있던 루크는 클로이의 대답을 듣고 곧바로 난간에 발을 올렸다. 그러고는 소란을 듣고 선실에서 빠져나온 라샤에게 지시를 내렸다.
“머메이드 전사 300명이 오고 있다는군, 웬디 불러.”
“저도 가세할게요.”
“내 공격이 끝난 후에 살아남은 놈들만 정리하도록 해. 괜히 의욕만 앞세웠다가 공격에 휘말리지 말고.”
“네.”
라샤가 웬디를 소환하여 루크에게 공기막을 둘러 주었다. 선실에 있는 동안 다시는 실수하는 일이 없겠다고 다짐이라도 했는지 이전과는 표정이 남달랐다.
주인의 부름에 응하여 소환된 웬디가 루크의 몸 주변을 따라 얇은 공기 막을 둘러 주었다. 동시에 루크가 딛고 있던 난간을 힘껏 박차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첨벙!
저 멀리서 머메이드 전사 300명이 참치 떼라도 되는 양 무리를 이루며 빠르게 접근해 오고 있었다. 그들은 대포 해마를 몰면서 사기를 끌어 올리듯 함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
단순히 사기 증진을 위해 내지르는 함성이 아니다. 세이렌의 아리아에 대응하기 위해 일부러 미리 함성을 내지르며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루크는 물속에서 웬디의 바람을 이용해 위치를 유지하며 클로이와 마주 보았다.
“기껏 손을 잡게 됐는데 얼굴 좀 펴지 그래? 비싼 티켓은 돈값을 하기 마련이야.”
“바가지 쓴 게 아니라면 좋을 텐데 말이죠.”
“다른 사람들은 없어서 못 사는 티켓이기도 하지.”
“그 말이 사실이길 바라겠어요. 잡설은 이만해 두고 라이덴의 병사들부터 상대하도록 하죠.”
“유명한 녀석인가?”
“현 머메이들의 수장인 스커필드의 동생이에요. 게다가 무려 5서클의 경지에 올라 있는 마법사죠. 버거운 상대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협공에 들어가죠. 먼저 저희가 시선을 끌 테니까…….”
“그럴 필요 없어.”
“무슨 의미죠?”
중년 특유의 팔자 주름이 더욱 선명하게 파였다. 그녀의 인내심 저장고가 한계에 이르렀음을 알려 주는 징후였다. 양보해 줄 거 다 양보했는데 왜 아직도 비협조적이냐고 묻는 듯했다.
그에 루크가 검을 빼 들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벌써 잊었나 보지? 비싼 티켓은 비싼 이유가 있는 법이야.”
루크의 머리 위로 투영검이 생성되었다. 그리고 팔을 앞으로 뻗자, 투영검이 발리스타에 장전되어 있던 작살처럼 맹렬하게 물속을 헤집으며 쏘아져 나갔다.
검이 지나간 자리에 강한 물보라가 발생하면서 검의 위력을 적들에게 예고하였다.
한편 투영검을 목격한 머메이드 전사들은 함성을 지르는 것마저도 잊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머메이드식으로 말하자면 검의 형태를 띤 고래가 돌격해 오는 듯한 광경이었다. 척 보기에도 웃어넘길 수 없는 공격이 날아오고 있는데 어느 누가 냉정을 유지하랴.
그나마 라이덴만이 일군의 대장이랍시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전사들을 다그쳤다.
“뭘 움츠리고 있느냐! 저길 봐라! 예상대로 세이렌 녀석들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인간들과 손을 잡지 않았느냐! 하등 종족의 공격 따윈 단숨에 부숴 버리고 세이렌 녀석들에게 손잡을 대상을 잘못 골랐다는 걸 알려 주자꾸나!”
라이덴이 투영검에 대해 알고 있을 리 없었다. 그저 인간의 기술 중 하나이겠거니 하고 여기며 능히 상쇄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도 그럴 만한 게 기껏해야 하등 종족의 공격이다. 해저 섬의 머메이드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자신보다 인간이 뛰어날 리 없다.
하물며 300명의 전사가 고작 인간 한 명의 기술을 상쇄하지 못하겠는가.
라이덴은 오션 마린이 박혀 있는 트라이던트를 투영검에 겨누며 먼저 공격을 실시했다.
“아쿠아 스파이럴!”
트라이던트 끄트머리에서 마나가 배열되더니 라이덴이 지정한 장소에 소용돌이가 생성되었다. 마나의 조각이 자글자글하게 섞여 있는 소용돌이인지라 한번 빠지면 상어도 갈가리 찢어 버릴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5서클 물 속성 마법 중에서도 최고의 위력을 지닌 마법이니 날아오고 있는 검 따윈 형체도 없이 상쇄해 버릴 것이다.
라이덴이 본보기를 보이자 머메이드 전사들도 냉정을 되찾으며 마법을 시전했다.
“라이덴 님의 말씀대로다! 인간의 공격에 위축된 놈들은 당장 반성해라!”
“겉보기에만 요란하지 위력은 별거 없을 테지. 워터볼!”
“워터볼!”
전사들은 최소한 3서클 수준의 물 속성 마법사인 것인지 일제히 워터볼을 시전하였다. 더하여 그들이 타고 있는 대포 해마도 물대포를 쏘며 투영검 저지에 나섰다.
물속에서 시전된 물 속성 마법들은 바닷물과 동화되어 자연스럽게 위장술을 휘감은 꼴이 되었고, 오로지 라이덴의 아쿠아 스파이럴만이 소용돌이 형태로서 발현되어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겉만 요란한 기술일 거란 머메이드들의 기대는 금세 산산이 부서졌다.
투영검은 머메이드들의 공격을 비웃듯 아쿠아 스파이럴을 찢으며 관통했고, 워터볼과 물대포 따윈 간에 기별도 안 간다는 듯 가볍게 무시하며 압도적인 전력 차를 선보였다.
아쿠아 스파이럴이 소멸된 것을 목견한 라이덴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라이덴은 정배에 걸었다가 뒤통수라도 맞은 사람처럼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건 좀 아니잖…….”
쩌적!
투영검이 횡을 그리며 그물로 물고기를 쓸어 담듯 머메이드 전사들을 한 궤적에 담아냈다. 투영검에 걸리는 족족 머메이드 전사들이 소 잡는 칼에 찍힌 닭처럼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나마 투영검의 궤적 끄트머리에 있어서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진 자들도 있긴 했으나 그들에겐 두 자루의 단검을 쥔 하프 엘프가 접근하고 있었다.
라샤가 잔챙이를 정리하는 작업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하면서 라이덴의 부대가 전멸했다.
방금까지 홈에서 원정팀을 맞이하는 것처럼 야유에 가까운 함성을 내지르던 자들은 졸지에 불귀의 객이 되어 물고기 밥으로 화했다.
한때 머메이드 전사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잔해들만 한껏 부유하는 가운데 루크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아직도 바가지라고 생각하나?”
클로이는 붕어라도 된 것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아무래도 터무니없는 자와 한배를 타게 된 것 같다.
더불어 비싸다고 생각했던 대가가 갑자기 합리적인 가격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왜 비싼 티켓은 비싼 값을 한다고 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