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
104화 말귀를 못 알아듣는 머리라면 필요 없겠지(1)
라이덴의 부대를 쓸어버린 후에 루크와 클로이는 다시금 대화의 장을 가졌다.
클로이의 태도는 라이덴의 부대와 싸우기 전에 비해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300명에 달하는 머메이드 전사들을 일거에 쓸어버린 자의 앞이니 행동이 조심스러워 질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그녀는 반성했다. 물자와 인력이 아까운 나머지 말도 안 되는 괴물을 적으로 돌릴 뻔하지 않았는가.
만약에 그녀의 성격이 조금만 더 드셌다면 손을 잡기는커녕 그의 심기를 건드려 머메이드 전사들과 똑같은 꼴을 당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물속임에도 불구하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일개 함선의 함장조차도 이토록 강력한데 전설의 경지에 올랐다는 공왕은 얼마 강한 걸까?
“공국의 공왕 전하는 당신보다 더 강하겠죠?”
궁금한 나머지 질문을 던졌는데 금발 청년과 함께 있던 하프 엘프가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풉! 아, 이런 실례.”
처음에는 왜 웃는지 몰랐다.
그런데 하프 엘프가 아닌 금발 청년도 웃음을 참느라 입꼬리에 힘을 주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 아닌가. 그런 후에야 다시 클로이와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하니온 공국의 공왕이야. 공왕 전하라 부르든 루크라 부르든 호칭은 그쪽의 판단에 맡기지.”
해저 섬을 탈환하면 용왕이 될 아줌마이기도 하고, 타 종족이기에 루크는 구태여 인간의 예법을 강조하진 않았다.
클로이는 순간적으로 이해력이 따라가지 못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침묵을 깬 것은 몇 초 후의 일이었다.
“아까 저랑 협상할 때 공왕 전하를 설득하니 마니 하지 않았어요?”
“가진 패를 숨겨 두는 건 협상의 기본 아닌가?”
“잠깐만요, 그러니까 당신이 루크 공왕 본인이라는 거죠?”
“그래.”
“이건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혹시 해저 섬으로 가는 중이었나요?”
아주 바보는 아닌가 보다.
얼마 전에 머메이드 전사 20명을 베어 버린 자가 공왕 장본인이고,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왕을 태운 공국의 선박이 인간들이 일반적으로 이용하지 않는 항로로 이동하고 있다.
해저 섬으로 갈 수 있는 기술을 수련 중이었다는 것, 선박의 항로 연장선에 아리아구 해역이 있는 것 등 여러 가지 요소를 조합하면 공왕은 처음부터 해저 섬의 머메이드들을 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결국 처음부터 머메이드들을 치러 가던 자들에게 전전긍긍하며 막 퍼 준 꼴이었다.
루크의 화술에 완전히 껌뻑 넘어가 버린 것이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제 와서 말을 바꿀 정도로 어리석진 않을 테지.”
“방금 그 전투를 보고 말을 바꾸긴 힘들죠. 충분히 지불할 가치가 있는 티켓이라는 걸 직접 보여 주셨으니까요. 그래도 좀 더 늦게 마주쳤다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긴 하네요.”
“늦으면 뭐 달라지는 거라도 있나 보지?”
“만약에 해저 섬 근처에서 만났다면 얘기가 달라졌겠죠. 처음부터 해저 섬이 목적이라는 걸 알아차렸을 테니까요. 보통 방법으로는 해저 섬에 들어갈 수 없거든요. 저흰 해저 섬에 들어갈 수단을 가지고 있고요. 그랬다면 협상 조건을 좀 더 개선할 수 있었겠죠. 뭐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요.”
“받을 거 다 받고 말을 바꾸진 않겠지?”
“그럴 리가요. 적으로 돌리면 어떻게 되는지 보고도 말을 바꿀 정도로 어리석진 않답니다.”
“서로 이해관계가 명확해진 것 같으니 다음 관계로 넘어가지. 해저 섬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은데 말이야.”
“그쪽이 타고 온 선박이 상당히 먼 곳까지 흘러갔으니 따라잡을 겸 이동하면서 얘기하도록 하죠.”
* * *
루크와 라샤는 세이렌들과 함께 바닷속을 헤엄치며 자세한 사정을 들었다.
원래 해저 섬엔 세이렌들만 살고 있었다고 한다. 해저 섬의 특산품 중 하나인 오션 마린을 캐어 다른 어인들의 나라나 인간들에게 가져가서 물물 교환을 하는 방식으로 명맥을 이어 왔다.
그런데 백여 년 전, 머메이드들이 바다의 신이라 불리는 모비딕의 심기를 건드린 탓에 나라가 멸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기반을 잃은 머메이드들은 살 곳을 찾아 떠돌기 시작했고, 유랑민처럼 수십 년 동안 떠돌다가 세이렌들의 해저 섬에 도착했다.
당시의 해저 섬의 용왕이자 클로이의 오빠였던 칼제론 용왕은 머메이드들을 불쌍히 여겨 해저 섬에 정착하는 것을 허락했고, 그 뒤로 세이렌과 머메이드들은 서로 협력하며 해저 섬을 발전시켜 왔다.
한데 3년 전에 갑자기 머메이드들의 수장인 스커필드가 반란을 일으켜 칼제론 용왕을 죽이고 왕좌를 빼앗았다고 한다.
클로이마저도 죽이려던 것을 용궁 호위대가 목숨을 바쳐 겨우 해저 섬 바깥으로 빼내었다. 클로이의 도주와 함께 수많은 세이렌들이 노예로 전락했으며, 그나마 클로이와 함께 빠져나온 400명의 세이렌들이 저항군을 형성하여 지금까지 대항하고 있다고 한다.
가만히 듣고 있던 루크는 클로이의 말을 간단하게 요약하여 한마디로 정리했다.
“받아 줬더니 뒤통수를 쳤다, 이 말이군.”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렇게 되겠죠.”
“이야기는 고맙지만 자세한 사항이란 건 적의 병력 규모와 스커필드란 자의 경지를 말하는 거였다만.”
“안 그래도 말하려던 참이었어요. 기본적으로 머메이드 전사로 뽑히려면 3서클 이상 되어야 해요. 3서클 수준의 전사들을 3급 전사, 그 이상으로 올라갈수록 2급, 1급으로 숫자가 작아지죠.”
“라이덴이라는 자는 5서클이니 1급이었겠군.”
“그렇죠. 제 기억이 맞다면 3급 전사가 1,500명, 2급 전사가 300명, 1급 전사가 10명이었을 거예요.”
“스커필드란 자는?”
“그 사람은 전사로 치면 특급이겠죠. 마법사는 아닌데 트라이던트에 마나 스피어를 부여해서 사용하는 마나유저거든요.”
클로이는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우리 세이렌들은 선천적으로 전방에 서기보단 후방에서 아리아로 지원해 주는 게 특기예요. 그런데 전방에 서서 싸워 주던 머메이드들이 적으로 돌아섰으니 상대가 될 리 없죠.”
어인들의 군대 체계는 인간의 군대 체계완 성향이 많이 달랐다.
인간의 군대는 마나가 없는 자들도 군대에 받아들여 일반 병사들을 밑바탕에 깔아 두고, 그 위에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자들을 지휘관 위치에 둔다.
반면에 어인들은 마나를 가진 자들만 전사로 인정하여 군대에 받아들인다. 전원 정예병이고,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자들의 비율이 인간에 비해 월등히 높다.
어인 중에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자의 비율은 인간 대비 약 10배가 높다고 한다.
머메이드들은 이를 두고 어인이 우월하기 때문에 마나의 혜택을 받고 있는 거라 여기며 어인 우월주의를 과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강함은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다.
3~5서클급 마법사가 몇 명이 있든, 마나마스터가 몇 명이 있든 루크 앞에선 다를 게 없었다.
“좀 더 대단한 전력을 갖추고 있을 줄 알았는데 별거 없군.”
1,000명이 넘는 3서클 마법사와 300명에 달하는 4서클 마법사, 5서클 마법사 10명, 게다가 마나마스터 한 명까지.
어지간한 백작령 다섯 개와 맞먹는 전력을 두고서 누가 별거 없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루크의 말투 속에 오만함이란 하나도 섞여 있지 않았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한 것에 불과하다.
클로이도 루크의 무력을 직접 목격했기에 일언반구의 이견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루크 일행은 일주일 동안 이동한 끝에 아리아구 해역에 도착했다.
출전 초기에 라이덴의 부대가 습격해 온 것 외엔 별다른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다.
클로이가 스커필드란 자는 다혈질에 성급한 성격의 소유자라 했으니, 지금껏 대응이 없는 것은 아직 동생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한 걸로 추정되었다.
이동하는 동안 공기막을 이용한 수련을 계속해 두었다. 공기막 사용에 익숙해질수록 라샤의 표정이 밝아지는 게 느껴졌다. 첫날 작게나마 전투에 일조했다는 것이 그녀의 어깨에 올라가 있던 짐을 덜어 준 모양이었다.
아리아구 해역에 도착할 즈음엔 루크와 라샤 둘 다 공기막을 이용한 수중 전투 및 수중 이동에 매우 익숙해져 있었다.
아리아구 해역에서 루크는 선장에게 대기 장소를 지시해 두었다.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아리아구 해역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도록 해. 만약을 대비해서 세이렌들에게 호위를 부탁해 뒀어.”
“알겠습니다. 얼마쯤 걸릴 것 같습니까?”
“그건 해저 섬에 내려가 보면 알겠지. 남아 있는 식량은 어떻게 돼?”
“아직 한 달 치가 남아 있습니다. 모자라면 세이렌 분들께 부탁해서 물고기라도 낚아 먹도록 하죠.”
“한 달까진 걸리지 않을 거야.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부표를 띄워 놓고 퇴각해.”
“네, 건투를 빌겠습니다.”
“어이. 준비해, 라샤.”
공기막을 두르고서 바다에 뛰어드니 클로이와 소수의 세이렌이 기다리고 있었다.
해저로 들어가기에 앞서 클로이가 주의 사항을 알려 주었다.
“이 밑에 거대한 소용돌이가 해저 섬을 감싸듯이 휘몰아치고 있죠. 게다가 소용돌이까지 가는 길에 바다 몬스터가 우글거리고 있어요. 특정 루트로 이동하지 않으면 바다 몬스터들을 상대해야 하니 잘 따라오세요.”
“해저 섬을 지키는 천연 요새인 셈이군.”
“정확히는 바다 몬스터만 천연 요새 역할을 맡고 있다고 봐야죠. 소용돌이는 마법진을 설치해서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거든요. 아무튼 바다 몬스터를 피해서 내려가도록 하죠. 루크 공왕의 실력은 알고 있지만 굳이 싸워도 되지 않을 상대랑 싸우면서 힘을 빼서 좋은 건 없죠. 안 그래요?”
“좋은 말을 하는걸? 헛수고만큼 최악인 것도 없지.”
“그럼 출발하죠.”
클로이와 세이렌들이 앞장을 서고, 그 뒤를 따라 루크와 라샤가 웬디의 바람을 이용해 아래로 내려갔다.
일반적인 바다라면 햇빛이 수면 근처에 드니까 밝으며 아래로 내려갈수록 어두워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근방의 해역들은 발광 해파리가 다수 서식하는 곳인지라 해저로 갈수록 오히려 더 물 밖보다 밝았다.
발광 해파리들은 버드나무 잎처럼 촉수를 늘어뜨린 채로 유유자적 해류를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바다 밑을 환히 밝혔다.
그 사이를 유영하며 지나가고 있노라니 빛을 발하는 대형 민들레꽃씨 사이를 걷는 듯하여 기분이 묘했다.
발광 해파리 무리 사이마다 바다 몬스터들의 실루엣이 비쳤다. 가시가 돋친 거대한 상어의 실루엣이 보이기도 했고, 대형 선박만 한 크기의 오징어 실루엣이 비치기도 했다.
하나같이 대형 사이즈인 것이 육지의 몬스터와는 다른 차별성을 띠었다.
싸워야 한다면 싸울 순 있겠으나 상당히 요란한 전투를 벌여야 쓰러뜨릴 수 있을 듯하다.
해저라는 환경과 바다 몬스터들의 실루엣이 강한 압박으로 다가왔다.
멋모르고 그냥 왔다간 바다 몬스터들을 일일이 상대하면서 내려가야 했을 것이다.
“여기 서식하는 바다 몬스터들은 저마다 자기 구역이 있어요. 구역의 틈새를 찾아서 내려가는 게 중요하죠. 저희도 오랫동안 들락거린 경험자가 아니면 가끔씩 바다 몬스터에게 당하는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해요.”
클로이가 데려온 소수의 세이렌들 모두 바다 몬스터들의 영역을 구분할 수 있는 자들이라고 한다. 혹시라도 클로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 미리 조치를 취해 둔 것이었다.
루크가 있으니 무슨 일이야 있을까 하면서도 보험을 들어 둬서 나쁠 건 없었다.
세이렌들은 마치 길이 보이기라도 하는 양 손쉽게 바다 몬스터들의 구역 사이를 찾아 매끄럽게 이동하며 루크와 라샤를 해저로 이끌었다.
바다 몬스터들의 구역을 빠져나오니 환한 빛을 발하고 있는 바닷속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바다 밑바닥에 집채만 한 크기의 산호들이 줄지어 자라나 있고, 그 사이를 수많은 어인들이 오가며 생활하고 있었다.
아직은 어인들이 개미처럼 작게 보이는 먼 위치인지라 이쪽에선 저쪽을 쉬이 들여다볼 수 있어도, 해저 섬에선 루크 일행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다.
해저 섬 주변에는 다수의 소용돌이가 울타리처럼 자리 잡고 있어서 통상적인 수단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클로이는 해저 섬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해저 협곡 안으로 헤엄쳐 들어갔다. 그러고는 협곡 안에서 입술에 검지를 대며 침묵을 유지할 것을 권했다.
“지금부터 소용돌이를 넘나들 수 있는 생물과 협상을 할 거에요. 인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무례한 소리를 해도 최대한 참아 주세요.”
“바닷속 생물들은 죄다 인간을 싫어하나 보군.”
“어인 우월주의에 찌든 자들이 열심히 활동한 결과물이죠. 막무가내식 소문에 선동된 자들이 한둘이 아니거든요. 안타까운 현실이죠.”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 씁쓸한 미소를 짓는 클로이였다.
그녀는 헛기침하며 목을 가다듬고선 해저 협곡 안에 있는 누군가를 불렀다.
“아몬! 아몬! 저예요! 클로이!”
그녀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며 협곡 아래로 전달되었다.
메아리 소리가 사라질 즈음, 협곡 안에서 대량의 기포가 뽀글뽀글 올라왔다. 그런가 싶더니 협곡 전체를 가로지르는 기다란 실루엣이 일렁이면서 위로 올라왔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뱀이었다.
몸길이가 장장 20미터에 달하는 대형 사이즈에 해저의 터줏대감이라 불리는 존재.
바다 이무기였다.
바다 이무기는 기다란 혀를 날름거리며 가느다란 세로 동공으로 방문객들을 훑어보았다. 처음에는 클로이를 훑어보는가 싶더니 이내 곧 루크와 라샤에게 시선을 두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클로이, 잘못 본 거라고 생각하고 싶구나. 지금 내 앞에 뭍의 생물들을 데려온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