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107화 말귀를 못 알아듣는 머리라면 필요 없겠지(4)
소용돌이는 해저 섬 주변을 돔 형태로 에워싸듯 펼쳐져 있었다. 고로 물속을 부유하다가 소용돌이가 머무르고 있는 섬의 상층부에 닿으면 바다 몬스터의 영역으로 배출되고 만다.
소용돌이를 빠져나와 해저 섬 안으로 들어온 라샤는 하마터면 천장을 이루고 있는 소용돌이에 휘말릴 뻔했다.
“아차차! 웬디! 후진! 후진!”
공기막을 유지하고 있던 웬디가 주인의 외침에 깜짝 놀라며 전방으로 바람을 뿜어냈다. 탄산수처럼 작은 기포가 사정없이 피어오르며 간신히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만은 면했다.
발아래에는 수많은 하우스 산호가 펼쳐져 있었다. 하우스 산호가 내뿜는 빛은 양초의 불빛처럼 밝으면서도 은은한 맛이 있어서, 정면으로 직시해도 눈이 피곤하지 않았다.
라샤는 자신의 뺨을 팡팡 치며 정신을 가다듬고선 주변을 살폈다.
“어? 전하는? 전하는 어디 갔어?”
웬디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으나 공기막을 이루고 있는 아이가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주변을 살피던 차에 강한 폭발음이 연달아 들려왔다.
펑! 퍼벙! 퍼버벙!
소용돌이 방벽의 바깥에서 마법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바다 밑바닥에서 머메이드 전사들이 위를 향해 마법을 난사하고 있었고, 루크가 홀로 그들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머메이드들이 몰려올 때부터 불안하더라니 결국 방벽 바깥으로 튕겨 나갔나 보다.
여기까지 오면서 느낀 건데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 루크 전하에 대한 걱정인 것 같다. 아까 아몬 녀석이 그녀를 혀로 휘감아 내뱉은 후에 어떻게 됐던가? 그 뒤에 곧바로 루크의 검에 몸이 절단 났다.
그 짧은 순간에 내막을 파악하고선 아몬과 클로이에게 제재를 가한 것이다.
보면 볼수록 따르고 싶어지는 매력이 있다.
어디에나 있는 상관처럼 무조건 성과만 외치는 것도 아니고, 괜히 가족 같은 분위기를 만든답시고 필요 이상으로 부하의 사생활에 간섭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관계란 게 원래 저마다 기준선이 제각각 달라서 선을 지킨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데, 루크는 마치 개개인이 가진 기준선을 모두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능수능란하게 거리를 조절해 준다.
‘참 특이해. 다른 왕들은 체면 때문이라도 안전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데, 우리 왕은 어쩜 저리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지 몰라.’
개인적으로 외로움을 잘 타는 성격이긴 한데 이상하게도 루크에겐 호감이 생기지 않는다.
아마도 격의 차이를 느낀 것이겠지.
그를 보고 있노라면 봉황을 올려다보는 참새가 된 기분이 든다. 때문에 가슴 속에는 호감 대신 동경심이 자리 잡았다.
저 사람 밑에서라면 뭘 이루든 남들 이상의 금자탑을 세울 수 있을 것 같다.
대신 저 사람 밑에 남아 있으려면 최소한 1인분 이상의 몫은 해내야 한다. 여기서 1인분이란 루크가 해저 섬에 들어올 때까지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할 일을 찾아내어 이루는 것을 말한다.
첫날에 크나큰 실수를 범했음에도 더 잘할 수 있다며 자신의 잠재력에 기대를 걸어 준 사람이다. 더 이상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라샤는 제 나름대로 루크의 행동에 담긴 의미를 해석해 보았다.
‘전하라면 저쯤이야 투영검으로 단숨에 정리하실 수 있으셔. 그런데도 마법으로 응수하고 계신단 말이지. 일부러 시선을 끌고 계신 걸지도 몰라. 내가 적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말이야.’
현재 라샤의 위치는 해저 섬의 상층부 부근이다. 해저 섬에는 도로라는 개념이 없어서 모든 어인과 바다 생물이 자유로이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 어인들의 시선이 방벽 바깥에 있는 루크에게 쏠려 있기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진즉에 들켰을 것이다.
짐작하건대 루크는 당장 방벽 안으로 들어올 여건이 안 되니 일부러 요란스럽게 싸워서 라샤의 활동의 폭을 넓혀 주려는 것 같았다.
실제론 그저 건드리면 깨지는 달걀을 다루듯 머메이드 전사들을 생포하려고 마법을 쓰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간의 여행길 속에서 루크를 고평가하기 시작한 라샤에겐 뭐든 과대하게 해석이 될 따름이었다.
루크에게 기대를 받고 있다고 해석한 라샤는 깊은 심호흡으로 멀미의 여파를 떨쳐 내며 해저 섬 아래로 내려갔다.
‘여긴 너무 눈에 띄어. 일단 엄폐물로 삼을 건물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야겠어. 그나저나 이제 어쩐다. 모처럼 전하께서 미끼가 되어 주셨으니 뭐라도 하긴 해야 할 텐데.’
해저 섬 안에서 혼자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차근차근 정리하자. 혼자 외딴곳에 떨어졌다고 해서 당황할 건 없다.
오히려 원래 가지고 있던 장기를 살릴 수 있는 조건이 아닌가.
원래 라샤는 은밀하게 움직이며 적장의 목만 추려 내던 암살 특화형 마나마스터다. 머메이드들의 수장인 스커필드란 자도 마나마스터이니 조건만 따라 주면 암살을 못 할 것도 없다.
스커필드를 제거하면 첫날의 실수를 기억 속에서 지울 수 있을까.
외톨이로 지내 온 시간이 긴 사람일수록 지난날의 기억을 오래 품고 있는 것처럼, 그녀 또한 이와 같은 부류였다.
한 번의 실수를 오랫동안 품고서 뜬금없이 인상을 찌푸리고, 한 번의 호투를 소장품처럼 두고두고 꺼내어 머릿속에서 떠올린다.
라샤는 아직도 첫날의 실수를 만회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웬디의 바람을 이용해 바다 밑바닥으로 내려간 라샤는 두 발을 바닥에 디뎠다. 확실히 물속에 떠 있는 것과 바닥에 서 있는 건 느낌부터가 다르다.
라샤의 특기는 두 발이 지면에 닿아 있을 때 진면목을 발휘한다.
‘어디 보자, 용궁의 위치가… 아무래도 저긴가 보네.’
용궁의 위치를 가늠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정글처럼 끝없이 펼쳐진 하우스 산호 중심부에 산호 가지를 이어 만든 커다란 궁전이 우뚝 솟아나 있었다.
목적지를 발견했으니 은밀하게 이동하는 일만 남았다.
그녀는 자세를 낮추며 발에 마나를 집중시켰다. 그리고 지면을 밀어내듯 강하게 박차며 몸에 추진력을 붙였다. 웬디도 뒤로 바람을 내뿜어 그녀의 등을 밀어 주면서 속도를 더해 주었다.
마나를 활용하면 신체 능력이 올라가긴 해도 그녀만큼 속도에 특화된 마나마스터는 흔치 않았다. 하프 엘프 특유의 이상적인 신체 비율과 바람의 정령, 다년간의 노하우가 축적된 이동법은 그녀에게 준마에도 뒤지지 않는 기동력을 안겨 주었다.
어인들의 시선이 방벽 바깥에 꽂혀 있는 틈을 타서 라샤는 순풍을 탄 것처럼 성큼성큼 용궁에 접근했다. 산호 가지를 엮어 만든 성벽에 바짝 붙으니 머메이드들이 부산을 떠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이렌들이 여기까지 인간들을 데리고 왔다고? 그럼 라이덴 님은 어떻게 된 것이냐? 인간의 나라 근방 해역으로 병력을 이끌고 가시지 않았느냐!”
“그… 정황상 전사하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돌아버리겠군. 이를 어찌할꼬, 스커필드 전하께 뭐라 말씀을 드려야 한단 말이냐. 분명 노발대발하실 텐데 누가 그분의 분노를 감당할꼬.”
“대신이라긴 뭐하지만 바알 님께서 해저 섬 안에 들어온 클로이를 사살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십니다. 클로이가 가지고 있던 오션 써클릿을 가져왔는데, 이걸 전해 드리면 조금은 화를 누그러뜨리지 않으시겠습니까?”
“후우, 그거야 전해 드려 봐야 알 일이지. 이젠 도망친 왕자만 찾아서 죽이면 되겠군. 아직 왕자의 목격담은 없었나?”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알겠다. 라이덴 님 건은 내 알아서 처리할 테니 침입한 인간들부터 신속히 정리하거라. 중요한 손님이 찾아올 예정이라서 모두 예민해져 있으니 더 이상 문제가 될 만한 일은 없었으면 좋겠구나.”
“네,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산호 가지 틈새로 얼마간 그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하지만 잡음이 섞여 있어서 들렸다 말았다 하길 반복했다. 어림짐작으로 가늠하건대 클로이는 머메이드들에게 붙잡혀 죽은 것 같다.
뭐, 루크를 적으로 돌린 시점에서 이미 예견된 결과이긴 하다.
세이렌들은 원래부터 철저한 성격이 아니었던 것인지 용궁의 구조 자체가 보안에 특화된 형태는 아니었다. 헤엄이 기본적인 이동 방법이다 보니 성벽이란 게 그냥 시골의 이웃집 울타리와 같은 개념이라서, 성벽에 많은 공을 들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헤엄으로도 능히 넘나들 수 있으니 용궁 출입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라샤는 경비가 허술한 곳을 찾기 위해 자세를 더욱 낮추고 성벽을 따라 이동했다. 루크를 제압하기 위해서 경비대의 일부가 빠져나간 모양인지 경비가 삼엄한 편은 아니었다.
경비병이 없는 틈새를 찾아내어 성벽을 넘으려던 순간.
라샤의 눈에 위에서 헤엄쳐 내려오는 일련의 무리가 비쳤다.
머메이드 무리라면 별 생각 없이 몸을 낮추고 지나가길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무리는 머메이드가 아니었다.
검은 로브를 두른 인간들이 실드와 에어볼의 조합을 구사하며 용궁 안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중요한 손님이라는 게 저 인간들을 말하는 거였어?’
어인 우월주의에 찌들어 있는 머메이드들의 성향을 감안하면 인간을 ‘중요한 손님’이라고 칭하는 건 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다.
수상한 냄새가 풀풀 풍긴다.
가만 생각해 보면 의심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머메이드들의 수준을 직접 체감해 보니 도저히 아쿠아 봉인석을 풀 기술력이 있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아쿠아 봉인석의 입수부터 봉인을 해제하는 계획까지.
전부 인간이 뒤에서 개입하고 있었다면?
구 하니온 왕국 시절, 라그나로스의 봉인을 푼 게 누구인지 생각하면 남몰래 아쿠아의 봉인을 풀려는 자들의 정체를 쉬이 예상할 수 있었다.
‘참 나, 저 자식들은 어디에나 있네. 머메이드들하고는 언제 손을 잡았데.’
어찌 된 게 파도 파도 괴담만 줄줄이 튀어나온다.
머메이드들의 반란은 3년 전에 일어났으니 그때부터 데메그리 교가 개입했다고 보긴 어렵고, 최근 들어 머메이드들에게 접근했다고 보는 게 맞다. 라그나로스 계획이 실패한 직후에 말이다.
하면 라그나로스 계획을 저지한 루크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서 아쿠아 계획을 획책했을 것이고, 아쿠아의 봉인이 풀리면 가장 먼저 하니온 공국에 손을 쓸 게 분명하다.
즉, 루크의 예측은 정확하게 맞아 든 셈이다. 루크가 생각했던 것과는 과정이 다소 다르긴 해도 결과만 놓고 보면 마찬가지였다.
라샤는 가죽 벨트의 홀더에 끼워 둔 두 자루의 단검을 양손에 쥐었다.
‘어차피 표적이 하나냐 둘이냐 차이일 뿐이야. 여기서 쫄면 투 핸드란 이름이 울지.’
그녀는 단검끼리 맞물려 날을 갈 듯 몇 번 마찰시키고선 단숨에 성벽을 넘었다.
* * *
한편 스커필드는 방문이 예정되어 있던 데메그리 교 사제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인간과 손을 잡는 건 그의 어인 우월주의에 반하는 행동이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성공한다면 육지를 물바다로 만들어 어인의 영역을 넓힐 수 있을 테니까.
그래도 인간과 마주할 때마다 본능적으로 피어오르는 거부감이 그를 예민하게 만들었다.
그는 껄끄러운 표정으로 데메그리 교 사제들을 맞이하며 용건부터 불쑥 꺼냈다.
“아쿠아의 봉인을 푸는 데 필요한 준비를 모두 갖추고 왔겠지?”
데메그리 교 사제들은 스커필드의 태도에 익숙한지 개의치 않으며 그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물론이지요. 봉인을 푸는 것만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합니다.”
“푸는 것만으로는 안 되지. 그대들이 약속한 건 아쿠아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게 해 준다는 거 아녔나?”
“그러려면 오션 써클릿에 박혀 있는 아쿠아의 눈물이 필요합니다. 그 물건은 전하께서 확보하기로 했을 텐데요?”
누군에게나 뭘 해도 되는 날, 혹은 뭘 해도 안 되는 날이 있기 마련이다.
스커필드는 오늘이 뭘 해도 되는 날이라 여기고 있었다. 때마침 데메그리 교 사제들의 방문 일에 맞춰 오션 써클릿이 손에 들어왔으니 말이다.
그의 손에는 클로이의 피가 묻어 있는 오션 써클릿이 들려 있었다.
“물건이라면 준비해 뒀다. 어서 아쿠아를 내 손에 안겨 주거라. 그러면 약속대로 하니온 공국은 물론이고 신성 제국이라는 곳까지 모두 물바다로 만들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