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109화 생선이 위협한다고 발톱을 거두는 고양이는 없다(2)
머메이드들의 수장에 대해선 클로이와 한 편일 적에 미리 들어 두었다.
지금 이쪽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고함을 치고 있는 자가 딱 들었던 대로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방벽 너머에서 화통을 삶아 먹은 듯 열을 내고 있는 자가 바로 스커필드이리라.
안 그래도 한 번쯤은 얼굴을 봐 두고 싶었는데 저쪽에서 알아서 찾아와 주었다.
성격이 급한 자라 하였으니 도발하기도 쉬울 터.
저쪽이 제 성질을 못 이겨 방벽을 열고 튀어나오려는 틈을 타서 블링크로 난입할 작정이었다.
도발하면 또 루크 아니겠나.
루크는 검 끝을 까딱이며 스커필드의 화를 돋웠다.
“머메이드들은 잘 짖는 녀석일수록 대우받는다지? 짖는 소리가 일품인 걸 보니 네 녀석이 수장이겠군.”
까딱이는 검의 움직임에 비아냥거림까지 더해지자 스커필드의 꼬리지느러미가 빳빳하게 올라갔다.
“뭐가 어째? 방벽을 열어라! 내 당장 네놈의 머리가슴, 배에 친히 바람구멍을 내 주겠다!”
스커필드의 호통에 머메이드들이 부랴부랴 방벽을 열 준비에 나섰다.
단순한 녀석들은 이래서 좋다.
살짝살짝 건드려 주면 알아서 덤벼들어 주니 이 얼마나 편한가.
방벽이 열리면 바로 난입하기 위해 루크는 블링크 시전을 위한 마나 배열을 미리 마쳐 두었다.
그런데 스커필드의 후방에서 다수의 머메이드들이 청새치에 쫓기는 생선 떼처럼 바쁘게 헤엄쳐 왔다.
“스커필드 전하! 안 됩니다! 놈에게 기회를 주지 마십시오!”
다가온 이들은 스커필드의 부하들이었다.
스커필드는 출격을 가로막는 부하들의 외침 속에서 심히 거슬리는 말을 찾아냈다.
“기회를 주지 말라? 무슨 기회를 말하는 것이냐? 설마 놈에게 날 벨 기회를 주지 말라는 발칙한 뜻으로 한 말은 아니겠지?”
“세이렌 저항군과 접촉하여 놈의 정체를 알아냈습니다! 하니온 공국의 공왕이라고 합니다! 그랜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던 그자가 직접 온 거란 말입니다!”
“뭐? 하지만 놈은 혼자서 오지 않았느냐. 세상에 어느 왕이 저리 비참하게 혼자 다닌단 말이냐!”
마치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 사람을 흉보듯, 혼자 다니는 왕을 비참하다고 평하는 스커필드였다. 무릇 왕이라 불리는 자가 그런 꼴을 자처할 리가 없다는 양 한껏 부정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스커필드의 목숨과 직결된 사태이기에 부하들 모두 참수당할 각오를 하고서 그를 말렸다.
“세이렌 저항군이 직접 말해 준 내용입니다. 라이덴 님과 300명의 전사들도 저자의 일격에 쓰러졌다고 했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랜드마스터의 경지를 결코 만만히 봐선 안 됩니다.”
“역시 저놈이 죽였구나! 놈을 베어 라이덴의 혼을 달래겠다. 방해하면 네놈들부터 찔러 버릴 테니 비켜라!”
“제발 고정해 주십시오!”
스커필드와 그의 부하들이 실랑이를 벌이며 방벽을 여니 마니 다퉜다. 방벽 출입을 관리하고 있던 전사들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대화 내용으로 유추하건대 결국 세이렌 저항군도 루크를 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나 보다.
이 해저 섬에는 머메이드든 세이렌이든 제정신인 자가 없는 것 같았다. 분명 이곳은 바다 안일 텐데 해저 섬만 물이 고여서 썩어 있는 듯하다.
말미잘 안에서 오래 지낸 흰동가리일수록 위기의식이 옅어지는 것처럼, 소용돌이 방벽 속에서 안전하게 살아온 세월이 길어서 그런지 주제 파악이 안 되나 보다.
루크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위치를 점하며 스커필드의 신경을 한껏 긁었다.
“부하들이 말려 줘서 안심하는 것 같은걸? 속으로 계속 누군가가 말려 주길 바랐나 보지?”
“크아! 저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으란 것이냐! 그랜드마스터고 나발이고 난 용왕이다! 이 구역의 지배자는 나란 말이다!”
“일부러 저러는 겁니다! 전하께서 직접 방벽을 열고 나오게 하려고 아무렇게 지껄이는 것이니 무시하셔야 합니다! 조금만 참으면 아쿠아의 봉인이 해제되니 그때 가서 저 시건방진 놈을 정리해도 늦지 않습니다.”
루크의 등 뒤에서 떠오르고 있는 머메이드 전사들의 파편들이 스커필드에게 냉정을 가져다주었다.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라도 일이 틀어진다면 파편이 되어 부유하고 있는 전사들과 같은 꼴이 될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펄펄 끓어오르던 열이 차갑게 식었다.
부하들의 말마따나 아쿠아의 봉인이 풀리면 좀 더 안전하고 확실하게 루크를 제거할 수 있다. 이는 확실한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지 도망이 아니다.
스커필드는 속으로 도망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되뇌며 분을 삭였다.
“오냐, 조만간 준비를 갖춰 네놈의 공국부터 물바다로 만들어 주마. 그때 가서 네놈의 우는 얼굴을 찬찬히 감상해 주지.”
“그때까지 네가 목을 잘 간수하길 바라지.”
“크윽, 저놈의 주둥이를 당장 뭉개지 못하는 게 한이로구나.”
입심을 겨누려 들수록 되로 줬다가 말로 받으니 입을 다무는 게 상책이었다.
당장이라도 방벽 바깥으로 뛰쳐나가려던 스커필드였으나 부하들의 필사적인 만류 끝에 몸을 돌렸다.
방벽 바깥에 덩그러니 남겨진 루크는 방벽 아래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전사들을 보며 넉살 좋게 한마디를 날렸다.
“줄을 잘못 섰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말단에 있는 자들도 어렴풋이 윗선의 무능함을 느끼기 시작했는지 과감히 받아치지 못하고 대답을 얼버무릴 뿐이었다.
* * *
용왕의 침소로 복귀한 스커필드는 해초를 엮어서 만든 해먹 위에 몸을 누이며 호흡을 골랐다. 루크가 했던 말 하나하나가 감정에 칼집을 새겨 놓은 탓에 자꾸만 분노가 새어 나오려고 한다.
“쓰읍, 후우. 그랜드마스터가 뭐가 대수라고… 제길. 참자, 지금은 참는 거야. 아쿠아의 봉인이 풀릴 때까지만 기다리면 돼.”
참자는 말을 되풀이하며 봉인 해제 의식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칸트가 말하길 빠르면 반나절, 늦어도 하루 안에 봉인을 풀 수 있다고 장담했다.
한숨 자고 나면 봉인이 풀려 있을 것이다.
그때 가서 루크란 작자를 뭉개 버릴 것이다. 단숨에 죽이는 건 재미없다. 아쿠아의 힘으로 제압하여 생포하고 하니온 공국이 망가지는 꼴을 하나하나 눈에 담게 만들어 줄 것이다.
“제발 봐 달라고 비굴하게 빌 때까지 철저하게 무너뜨려 주마.”
“그때까지 네가 살아 있을까?”
분명 침소 안에는 혼자 있을 텐데 누군가가 그의 혼잣말에 딴지를 걸었다.
화들짝 놀라 상체를 일으키려던 순간, 단검 두 자루가 X 자로 교차하며 스커필드의 목에 닿았다.
조금만 더 빨리 몸을 일으켰다면 스스로 단검에 뛰어든 꼴이 될 뻔했다.
단검을 겨눈 자는 놀랍게도 여성이었다. 어디에, 언제부터 숨어 있었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아랫것들은 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하기에 인간이 해저 섬에 들어온 것조차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아니, 해저 섬에 들어온 것까진 납득한다 치더라도 용궁 안, 그것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용왕의 침소에 들어올 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다는 게 납득이 안 간다.
스커필드는 곧 죽어도 그녀가 잘 숨어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속으로 오로지 부하들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탓하며 얼굴을 구겼다.
“공왕 놈의 끄나풀이더냐?”
“여기선 아니라고 대답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어?”
“인간 놈들은 하나하나 말꼬리를 잡는 게 종족 특성인가 보구나.”
“지느러미 달린 게 유일한 자랑거리인 종족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당장 검을 뗀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마. 해저에 묘비를 세우고 싶진 않겠지?”
“유머 감각이 꽝이네. 바다 여자면 몰라도 육지 여자한텐 씨알도 안 먹힐 멘트인걸?”
치욕스럽기 짝이 없었다.
백성들 앞에서 루크에게 모욕당하고 부들거리는 모습을 보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치욕스러운데 웬 이름 모를 계집에게 목이 달아나게 생겼다.
이따위로 죽으려고 기를 쓰고 용왕이 된 게 아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해저 섬에서 최강이라 불리는 내가 암살에 의해서 죽는다고?
인정할까 보냐, 이딴 걸 인정하란 말이냐!
완력으로 검을 뿌리치기 위해 기습적으로 두 팔을 사용하려던 찰나.
라샤는 시간 따위 주지 않겠다는 양 가차 없이 단검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그었다.
서걱!
숙련된 조교의 움직임처럼 스무스하기 짝이 없는 동작이었다.
마나가 깃든 단검 두 자루가 멈추면서 라샤의 발밑으로 한껏 구겨진 표정의 머리가 떨어졌다.
암살의 기본은 은밀함에 있다. 라샤의 사정권에 들어온 순간 소리 소문 없는 죽음은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야 1인분 몫을 했다고 판단한 라샤는 본래의 자신감을 되찾았다. 주눅 든 기색이 사라진 자리에는 30대 특유의 원숙미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는 고혹적인 눈매로 죽은 스커필드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그거 알아? 생선이 위협한다고 발톱을 거두는 고양이는 없단다.”
일단 제거 대상 1순위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데메그리 교 사제들만 제거하면 된다. 이 이상 루크가 나서지 않고 그녀의 선에서 사태를 마무리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
데메그리 교 사제들에게 하니온에는 루크만 있는 게 아니란 것을 알려 주리라.
라샤는 기민한 움직임을 선보이며 창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물속이라 건물 높이는 의미가 아예 없기 때문에 육지에서 잠입 임무를 수행하는 것보다 몇 배는 편했다.
본래의 기동력과 웬디의 능력을 적절히 조합하여 라샤는 궁내 경비병들의 눈을 피해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 근처까지 접근했다. 입구 앞에는 경비병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경비병은 두 명. 두 명이면 조용히 제압하는 거야 식은 죽 먹기지.’
쥐고 있는 단검 두 자루를 던지려고 각을 재던 중.
의도치 않은 사태가 발생했다.
갑자기 지하 통로 안에서 시커먼 물이 간헐천처럼 지하 통로에서 뿜어져 나오며 사방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물줄기에 담긴 불길한 기운만 봐도 보통 먹물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에겐 매우 익숙한 기운이었다. 왜냐하면 마물 토벌에 참가했을 때 마물들이 줄곧 내뿜던 기운과 매우 비슷했기 때문이다.
믿기 힘들지만 예상보다 훨씬 빨리 봉인이 풀린 것 같다.
그것도 정령의 마물화라는 말도 안 되는 형태로 말이다!
마기가 담긴 물줄기는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심지어 머메이드들까지도 말이다. 처음부터 아쿠아의 조종권을 내줄 생각이 없었는지 용건이 끝나자마자 칸트가 머메이드들의 몰살을 명한 것 같다.
시커먼 물줄기 속에서 미처 피하지 못한 머메이드들의 비명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게 뭐야? 시커먼 게… 꾸르르륵!”
“아악! 전하! 전하! 사제 놈들이 배신을… 끄르륵!”
원체 물이 시커먼 탓에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저 시커먼 물은 아쿠아의 공격 수단이고, 한번 갇히면 목숨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더 이상 혼자서 무언가 해 보려는 건 욕심에 불과했다.
라샤는 당장에 생각을 고쳐먹고 루크에게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이거 일 났네. 이렇게 빨리 봉인을 풀 줄이야. 나 혼자선 감당이 안 돼. 어서 공왕 전하께 알려 드리러 가야겠어.’
웬디에게 최대 출력으로 추진력을 붙여 줄 것을 부탁하며 몸을 돌리려던 찰나, 아쿠아가 그녀의 존재를 감지했는지 시커먼 물줄기가 그녀를 향해 뻗어 나왔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웬디가 추진력을 붙여 주기도 전에 라샤의 몸이 시커먼 물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