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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재능으로 환생-110화 (110/200)

# 110

110화 혈족 귀속(1)

도발하여 안에서 알아서 방벽을 열게 한다는 작전이 무산된 이상 루크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또 다른 방법 중에는 힘으로 연다는 선택지가 있었다.

하지만 득보단 실이 많은 방법이라 실제로 이행하기엔 무리가 있는 방법이었다.

소용돌이 방벽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세이렌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쌓아 올린 방어벽이다. 수백 년 분량의 노하우가 응축된 방벽을 억지로 깨부수려면 그만큼 강력한 공격을 가해야 한다. 제아무리 루크라 할지라도 가진 마나의 7할은 사용해야 뚫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루크로선 썩 내키지 않는 수단이었다.

‘그래도 아쿠아를 제압하려면 5할 이상은 남겨 두고 싶다만…….’

라샤에겐 아직 말하지 않았는데 사실은 머메이드들이 아쿠아의 봉인을 풀게 놔둘 생각이다. 그래야 아쿠아의 정령석을 얻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아쿠아의 정령석을 얻으려면 봉인에서 풀려난 아쿠아를 쓰러뜨려야 하고, 루크에겐 아쿠아의 봉인을 풀 기술이 없으니 봉인을 푸는 부분은 머메이드들에게 떠맡길 작정이었다.

아쿠아와 전투를 벌이게 될 테니 힘으로 뚫고 들어가서 스스로 전력을 약화시키는 건 악수나 다름없었다.

루크는 기둥만 덩그러니 남은 늙은 산호에 등을 기대며 느긋하게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뭐, 억지로 뚫지 않아도 아쿠아의 봉인이 풀리면 알아서 기어 나오겠지.’

조금 수동적인 작전이라는 게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현재로선 기다리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지였다.

라샤 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공기막의 건재는 그녀의 무사함을 뜻한다. 명색이 암살 전문가라 불리던 마나마스터이니 은밀하게 움직이는 데 있어선 도가 텄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 몸 하나 건사할 능력은 있는 기사였다.

이제나저제나 아쿠아의 봉인이 풀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산호 위로 다수의 어인들이 지나가는 것이 루크의 눈에 들어왔다.

머메이드 전사? 세이렌 저항군?

아니,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갑자기 해저 섬 근처에 나타난 이들은 하반신이 문어 다리로 되어 있고, 상반신이 인간의 모습이지만, 입이 있어야 할 자리에 대포와 같은 주둥이가 대신 달려 있는 자들이었다.

문어를 닮은 어인, 옥토버란 종족이었다.

입에서 독이 섞인 먹물을 내뿜고, 여러 개의 다리를 이용하여 6~8개의 무기를 한꺼번에 다룬다는 바닷속 전투 민족이었다.

개개인이 창, 칼, 방패, 해머, 메이스 등등 수많은 무기를 갖추고 있는 것에서 다른 어인들과는 남다른 전투력이 느껴졌다.

전투력도 전투력이지만 저 많은 무기를 갖추고도 가라앉지 않고 유유히 헤엄치는 것이 더 신기했다.

무엇보다 압권인 것은 옥토버들이 데리고 온 생물체였다.

선박 분쇄기로 유명한 크라켄이 그들과 함께 해저 섬으로 향하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아무래도 힘으로 길들인 건 아닌 것 같고, 어린 크라켄을 잡아다 몇 년간 키운 것으로 보인다.

인간도 비행 부대용으로 그리폰이나 와이번을 새끼 때부터 기르니까 그와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 같았다.

옥토버들이 어떤 경위로 해저 섬에 군단을 이끌고 오게 된 걸까?

의문이 풀리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옥토버 사이에 별나게도 세이렌 한 명이 섞여 있었는데, 그가 산호 기둥 위를 지나가다가 루크와 눈이 마주쳤다.

20대 초반 정도에 파래처럼 하늘하늘한 녹색 장발을 지닌 청년이었는데, 그는 루크를 목격하자마자 비웃듯이 피식 웃었다.

“네가 숙모와 손을 잡았다던 인간이로군.”

손을 잡았다고 할 만한 세이렌이라면 클로이밖에 없다.

클로이는 용왕의 동생, 그녀를 숙모라고 부르는 걸로 봐선 전 용왕의 아들로 추정된다.

전 용왕에게 아들이 있다는 얘기는 못 들었다. 아무래도 클로이가 일부러 언급하지 않은 듯하다.

용왕의 동생보단 아들이 왕위 계승의 우선순위에 놓이기 마련이다. 구태여 숨겼다는 건 왕위를 놓고 숙모와 조카 사이에 불화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안 봐도 뻔하다. 왕위를 놓고 막장 희극을 펼치는 거야 고대 때부터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던 일이니까.

청년은 뒤에서 모든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는 양 아는 체를 하였다.

“머메이드들을 끌어들인 반역자를 대신 제거해 준 것에 대해선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근데 말이야, 이건 집안싸움이거든? 뭍에서 온 사람은 이쯤에서 발을 빼 주면 고맙겠어.”

한마디로 꺼지라는 말이었다.

말만 들어 보면 클로이가 정권을 차지하려고 머메이드들을 부추기면서 반란이 일어났고, 반란이 성공하면서 왕자가 쫓겨났나 보다. 그 뒤에 클로이가 다시금 통수를 맞아 해저 섬에서 쫓겨난 것이고 말이다.

정황상 왕자가 복수를 위해 다른 어인 왕국인 옥토버들에게 군사 파견을 요청한 걸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모종의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약속이 오간 것 같다.

혈기 넘치는 애송이의 무례한 발언 속에서도 루크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제3 세력을 끌어들인다는 발상 자체가 클로이와 다를 게 없다. 게다가 문어 인간들이나 크라켄 따위로 감당할 수 있는 시기는 이미 한참 지난 지 오래인데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게 우스웠다.

루크의 눈에는 덧없는 발버둥으로 보일 따름이었다.

“내게 뭐라 할 시간에 가던 길이나 마저 가지그래?”

“흥, 숙모가 네게 무엇을 약속했는지 모를 거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해저 섬의 자원을 집어삼킬 생각이었겠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말해 두지. 난 숙모처럼 호락호락하게 불평등 조약을 받아들일 정도로 호구가 아냐.”

청년은 루크를 노려보며 강하게 쏘아붙이고선 옥토버 군단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조약까지 알고 있는 걸로 봐선 클로이의 저항군에 밀정이라도 심어 뒀나 보다.

루크로선 잘된 참이다.

어차피 아쿠아의 봉인이 풀릴 때까지 할 것도 없었는데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

저들은 어떻게 방벽을 뚫을 생각인 걸까?

어인만의 특별한 기술을 준비해 온 게 아닐까 싶어 기대에 찬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그러나 기대하던 것과 달리 특별한 기술 같은 건 없었다.

청년이 다가가자 머메이드 전사들이 알아서 방벽을 해제해 주었다. 스커필드와 클로이가 대치하는 동안 철저하게 물밑에서 작업했다는 증거였다. 저 꼬장꼬장한 머메이드 전사들을 어떻게 포섭했는지는 몰라도 음흉한 것만큼은 스커필드나 클로이보다 한 수 위였다.

크라켄이 들어갈 수 있게 모든 마법진을 일시에 중단하자 해저 섬을 감싸고 있던 소용돌이가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옥토버 군단이 차례차례 해저 섬에 입성했다.

* * *

세이렌 청년, 전 용왕의 양자인 슈타인은 옥토버 군단과 함께 해저 섬에 진입하며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해저 섬의 왕자, 나 슈타인이 스커필드의 폭정으로부터 해저 섬을 되찾으러 왔다! 저항하는 자는 죽을 것이고, 순응하는 자는 살 것이다!”

뜨거운 호응을 기대한 듯 트라이던트를 높이 들며 외쳤으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머메이드들은 고사하고 노예로 전락한 세이렌들마저도 그의 외침에 호응하지 않았다.

들려오는 것이라곤 비명 소리뿐이었다.

“으아아아아! 도망쳐! 어서!”

“엄마! 어디 있어? 엄마!”

“안 돼! 살려 줘! 죽고 싶지 않아! 끄르르륵!”

상상하던 것과 다른 반응에 슈타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하다. 그리 생각하기 무섭게 비명의 원인을 목격했다.

용궁에서 시커먼 물이 피어오르며 서서히 해저 섬 전역에 퍼져 나가는 중이었다.

시커먼 물은 화재 현장의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퍼지는 것처럼 해저 섬의 주민들을 집어삼켰다. 시커먼 물에 뒤덮인 자들은 하나같이 비명을 지르며 익사를 면치 못했다.

어인이 물속에서 익사하다니, 이 무슨 얼토당토않은 현장이란 말인가!

먼 길을 헤엄쳐 온 옥토버 군단도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곤 의문을 표했다.

“이보시오, 슈타인 왕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단 얘기는 못 들었소. 이게 어떻게 된 거요?”

“나, 나도 모르겠어. 스커필드가 아쿠아 봉인석을 손에 넣었다는 것만 알지 그 이상은…….”

“아쿠아 봉인석을 손에 넣어?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말하지 않았단 말이오? 이건 명백한 계약 위반이오. 우린 손 떼겠소.”

“기, 기다려! 그러지 말고 내 말을 들어 봐. 여기까지 와 놓고 갑자기 발을 뺀다고? 그건 좀 아니잖아.”

“시끄럽소! 내 부대가 전멸할지도 모르는 불안 요소를 숨긴 것부터가 그쪽 잘못 아니오? 우린 물러나겠소. 여봐라! 어서 철수하거라! 한시라도 빨리 저 괴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옥토버 군단은 황급히 방향을 틀어서 도주에 나섰다.

하지만 아쿠아의 손아귀는 벌써 옥토버 군단의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옥토버 군단이 해저 섬을 벗어나기도 전에 시커먼 물이 박차를 가하며 뻗어 나와선 그들을 뒤덮었다. 안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비명 소리만이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슈타인은 야심 차게 준비한 것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광경을 보며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옥토버 군단을 삼키고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시커먼 물을 두고 밋밋하기 짝이 없는 유언을 남겼다.

“이런 빌어먹을…….”

꾸르르르륵!

* * *

한편 해저 섬 바깥에서 관전자처럼 찬찬히 상황을 지켜보던 루크는 드디어 움직일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예상보다 빠르게 봉인을 풀었군. 그나저나 고대 정령왕치고 꽤나 익숙한 기운을 품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지.”

겉보기에 마기를 연상하게 하는 시커먼 물은 마물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기운을 풍기고 있다.

데메그리 교가 연관되어 있기라도 한 걸까.

라그나로스 계획의 주동자가 누구인지 생각하면 아주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래도 루크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클로이, 그리고 슈타인. 해저 섬의 정통 후계자 자격을 지닌 자들이 모두 죽었으니 아쿠아만 처리하면 해저 섬이 통째로 굴러들어 온다.

해저 섬을 어떻게 관리할지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아쿠아의 정령석부터 확보해야겠다.

문제는 아쿠아의 본체가 어디 있냐는 것이다.

기름이라도 한가득 퍼부은 듯 시커먼 물만 번지고 있을 뿐, 아쿠아로 짐작되는 존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시커먼 물 안으로 들어가 직접 탐색하자니 저것에 뒤덮여 죽은 자들의 선례가 마음에 걸린다.

칼로 물을 벨 수 없듯 투영검으로 벤다고 베어질 것 같지도 않았다.

현재 가진 수단 중에서 꺼내 들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시커먼 물속에 포함된 마기를 통째로 태워 버리는 것.

루크는 품에서 라그나로스의 정령석을 꺼냈다. 라그나로스가 지닌 마나번 능력이라면 시커먼 물에 담긴 마기를 태워 버릴 수 있을 터이다.

루크는 일일이 마기를 태우면서 전진하다 보면 본체를 찾을 수 있을 거라 판단하였다.

정령석에 마나를 부여하자 구슬 표면에 화염이 일면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라그나로스가 소환되었다.

라그나로스는 갑자기 물속에서 소환된 탓에 사정없이 몸을 비틀었다.

“으아아! 정령 살려! 누가 물속에서 소환하래! 누구 정령신 곁으로 승천하는 꼴 보고 싶어?”

하도 물속에 오래 있다 보니 여기가 물속이라는 걸 깜빡했군.

루크는 개업을 축하하는 풍선처럼 격렬하게 상체를 흔드는 라그나로스를 위해 자그마한 구체형 실드를 둘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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