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112화 혈족 귀속(3)
해저 섬에 온 이후부터 감질나는 행동만 반복한 느낌이다.
조무래기만 왕창 베고, 정작 적의 수장이라 부를 만한 작자들은 라샤가 베어 냈다. 이래서야 마치 라샤를 보조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 같지 않은가.
모로 가든 수도로만 가면 된다고 했으니 라샤가 마무리 지은 것이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다.
단지 지금까지 적들을 베어 내려고 한껏 기를 모으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막상 참가하고 나니 상황이 모두 정리되어 있어서 허무한 감이 적잖이 있었다.
‘그래도 챙길 건 다 챙길 수 있게 되었으니 잘된 셈 쳐야겠지.’
데메그리 교 사제들이 모두 죽으면서 주변 환경이 급변했다. 사방을 메우고 있던 탁한 물이 맑아졌고, 넓게 뻗어 있던 워터 프레셔가 일제히 해제되었다.
탁한 물이 걷히면서 검은색 물로 이루어진 소녀의 형상이 나타났다. 그녀가 고대 물의 정령왕인 아쿠아임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몸체가 검은색인 것은 아직도 몸에 마기가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마물화가 되었어도 전투를 싫어하는 성격은 그대로인지 온화한 미소를 띠며 저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왔다.
“먼저 사과부터 드려야겠네요. 제 의지가 아니었다곤 해도 목숨에 위협을 가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릴게요.”
“싸움을 싫어한다는 말이 사실이었군.”
“어라?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제 없을 텐데, 별일이네요.”
세간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손에 꼽는 아쿠아인지라 자신에 대해 아는 자가 있는 것을 신기해했다. 그러던 차에 루크의 어깨에 올라타 있는 라그나로스를 발견하고선 화들짝 놀랐다.
“세상에! 라그! 못 보던 사이에 엄청 깜찍해지셨네요.”
라그나로스는 새침데기처럼 시선을 돌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흥! 깜찍은 개뿔! 마나를 못 받아서 그런 거야!”
“후후, 솔직하시지 못한 성격은 여전하네요.”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데메그리 교 녀석들이 널 조종했어.”
“알아요. 의식은 억제당하고 있었지만 제가 뭘 했는지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아쿠아가 시선을 내리며 해저 섬 전역을 훑어보았다. 해저 섬에 남아 있는 어인들은 없었다. 전사, 주민, 그리고 데메그리 교 사제들까지 모두 생을 달리했다. 해저 섬 안에 살아 있는 자라곤 루크와 라샤밖에 없었다.
그나마 해저 섬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세이렌 저항군의 생존자들이 남아 있을 터이나 그들에게 해저 섬으로 돌아올 용기가 있을 리 만무했다.
사실상 아리아구 해역의 해저 섬은 주인 없는 땅이 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스커필드 세력, 클로이 세력, 슈타인 세력, 게다가 배후 세력까지.
현재 해저 섬의 풍경은 제대로 된 구심점이 없는 나라가 어떤 꼴을 맞이하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표본이었다.
라그나로스는 아쿠아가 씁쓸해하는 것을 보며 불의 정령식으로 위로해 주었다.
“이용당한 게 무슨 자랑이라고 울상을 지어? 그런 표정 지을 거면 이용당하지나 말든가!”
“그러네요. 미안해요, 걱정하게 해서.”
“걱정은 무슨, 아무튼 여기 놈들은 하나같이 전부 자업자득이니까 그렇게 생각해.”
“네, 그렇게 생각할게요.”
불과 물이면 상극일 텐데도 대화만 들어 보면 각별한 감정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라그나로스와의 대화에서 기운을 얻었는지 아쿠아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그녀는 시선을 루크에게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오래전에 봉인을 택한 건 정답이 아니었나 보네요. 봉인이 풀리면서 이용당할 줄은 몰랐거든요.”
“봉인보다 더 좋은 해결책이 있는데 들어 보겠어?”
“계약을 말하는 거라면 받아들이겠어요.”
“고민조차 안 하는군.”
“전 라그를 믿거든요. 라그가 믿는 분이시라면 믿어도 되겠죠.”
“믿긴 누가 믿어? 계약이라서 따르는 거지 마음까지 준 건 아냐!”
“후후, 그거 알아요? 라그가 저렇게 말할 땐 부끄러워하는 거예요.”
“넌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아. 주인아, 쟤 그냥 다시 봉인해 버려.”
루크는 라그나로스의 항의를 깔끔하게 무시하며 검을 들었다. 현재 아쿠아는 마물화 상태라 몸체가 탁한 색을 띠고 있다. 하지만 한 번 죽어서 정령석 상태로 되돌아가면 육체를 구성하는 요소가 초기화될 것이다.
“어딜 찌르면 되는지 짚어 줘.”
몸이 탁한 색을 띠고 있어서 핵이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에 아쿠아가 자신의 가슴 정중앙을 짚었다.
“이곳을 찌르면 돼요.”
이내 보랏빛 검의 끄트머리가 아쿠아의 가슴을 겨누었고, 루크의 팔에 힘이 들어가면서 아쿠아의 가슴을 관통했다. 그와 동시에 검날을 통하여 단단한 무언가를 부순 감각이 흘러들어 왔다.
콰직!
* * *
아쿠아와의 계약은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아쿠아가 죽은 자리에 푸른 정령석이 생성되었고, 그를 회수하고 마나를 부여해 계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루크는 두 번째 정령왕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머메이드들이 전멸하여 다시는 그레이트 쉘 양식장이 습격당할 일은 없을 테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이젠 부가적인 이득을 취할 차례였다.
해저 섬 지하에 매장되어 있는 대량의 오션 마린이 모두 루크의 것이 되었다. 팔기만 해도 막대한 자금이 들어오고, 기사나 마법사 육성에 투입하면 어지간한 군사 강국은 저리 가라 할 정도의 군사력을 갖출 수 있다.
하지만 오션 마린을 채광하기 위한 방법이 문제였다.
“처음엔 세이렌들에게 시킬 생각이었는데 배신자로 처단해 버렸으니 시킬 사람이 없군.”
클로이가 배신할 생각만 하지 않았더라도 지금쯤 모든 것이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아몬을 타고 방벽 안으로 무혈입성했을 테니 루크가 직접 스커필드의 목을 쳤을 테고, 봉인이 풀림과 동시에 아쿠아를 저지했을 테니 주민들이 전멸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배신이라는 게 이렇게 악영향을 미친다. 원래라면 애초에 끝났을 것을 여기까지 질질 끌게 만드는 데다, 안 해도 될 일거리까지 만들어 버리니 말이다.
오션 마린을 어떻게 채광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아래에 머물러 있던 라샤가 다가왔다.
“전하, 몸은 어떠세요? 떨어져 계신 동안 별일 없으셨어요?”
“한 게 없으니 별일이 있을 리가 없지, 안 그래?”
“한 게 없으시다뇨!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전하께서 베신 머메이드 전사의 숫자만 350명이 넘어요. 게다가 방벽 바깥에서 시선을 끌어 주시지 않았다면 스커필드의 목을 딸 수 없었을걸요?”
“음? 스커필드도 죽였어?”
“네, 하니온 공국을 망가뜨리니 마니 하는 소리를 하길래 듀라한 꼴로 만들어 줬죠.”
“중요한 부분은 혼자 다 해치워 버렸군.”
“저기… 제가 하면 안 될 일을 해 버린 건가요?”
“아니, 잘했어. 널 과소평가한 걸 반성하는 중이야.”
“후후, 후후후.”
“뭘 그리 좋아해?”
“아뇨, 안심이 돼서요. 첫날에 실수해서 혼자 끙끙대고 있었거든요.”
루크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그리도 기쁜지 라샤는 얼굴에 순도 100퍼센트의 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항상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기사의 태도를 취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맨얼굴을 드러냈다. 지금의 미소에서 의지할 곳 없이 혼자 풍파를 맞아 온 지난 세월이 비치는 것은 착각일까.
루크는 민감한 주제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가 숨겨 왔던 사실을 언급했다.
“기쁜 와중에 미안하지만 이것만큼은 대답을 들어야겠어. 웬디가 워터 프레셔의 영향을 받지 않은 건 네 출신 덕분인 건가?”
전투 중에 만연하게 드러난 사실이니 숨길 여지가 없었다.
라샤도 질문이 날아들 것을 예감하고 있었는지 의외로 담담하게 반응했다.
“하아, 족보 따지는 집안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죠. 잡종은 인정할 수 없다면 박대하는 집안에서 뛰쳐나온 아이가 자수성가를 꿈꾸고 있다는 흔한 이야기죠.”
‘힘들었겠군’ 같은 촌스러운 발언 따윈 하지 않았다.
그녀의 과거를 동정하는 것은 그녀가 지금의 이 위치까지 오기 위해 거쳐 온 노력을 부정하는 거니까.
대신 루크는 고생한 세월을 보상받으리란 확신을 심어 주었다.
“그 족보 따지는 집안이라는 곳은 빠른 시일 내에 후회하겠군.”
“왜요?”
“엘프의 숲이 점령당하고 난 후에야 뛰어난 인재를 적에게 안겨 줬다는 걸 알아차릴 테니까.”
기사에게 있어 이보다 더한 찬사가 또 있을까.
라샤가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며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세상은 노력을 깎아내릴 줄만 알지 알아주려는 자는 거의 없다. 라샤는 그 몇 안 되는 자가 자신의 주군이라는 게 기쁠 따름이다.
루크는 그녀에게 혈통에 귀속된 능력을 숨긴 행동에 따로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만큼 민감한 사연이 담긴 능력이기도 했고, 뛰어난 부하에게 책임을 묻는 취미는 없다.
단지 앞으로 작전을 짜는 데 있어서 그녀의 능력을 배제하는 우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이참에 확실하게 파악해 두고자 했다.
“근데 구체적으로 어떤 능력인 거야?”
“그냥 확실하게 말씀드리는 게 서로 편하겠죠?”
“말할 것도 없는 부분이지.”
“후우,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혈통 귀속 능력의 일종이에요. 해당 혈통의 피를 절반 이상 이어받은 자만 사용할 수 있죠.”
“넌 엘프 쪽 혈통인 거고?”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엘프의 숲을 다스리는 요정왕 일족의 혈통 귀속 능력이에요. 저와 제가 부리는 정령은 다른 정령의 공격에 면역을 띠죠. 다른 건 없어요, 그것뿐이에요.”
“정령술이 기본인 엘프끼리 싸울 땐 거의 무적이겠군.”
“그래서 대대로 엘프의 숲을 지배해 온 것이기도 하고요.”
“아무튼 대답하기 어려운 주제였을 텐데 흔쾌히 대답해 줘서 고마워.”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말씀드릴 걸 그랬네요.”
정령왕이 가진 능력도 그렇고, 혈통 귀속 능력도 그렇고 인간들 사이에선 널리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은 것 같다.
전 대륙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은 고작 3할에 불과하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특히 아쿠아의 마나 동결을 겪고 나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모르는 능력에도 대처할 수 있는 수완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아직 갈 길이 멀다. 인간 사회에 국한된 것이 아닌, 전 대륙을 통틀어 정점에 오르려면 단순히 마나만 많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아직 더 발전할 수 있다.
지금 단계가 끝일 리가 있겠는가.
지금보다 더 발전할 여지가 남아 있다는 사실에 향상심이 들끓었다.
일단 당장 선결해야 할 과제부터 처리하자.
루크는 모처럼 의욕이 들끓는 모습을 내비치며 오션 마린을 채광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했다.
“흐음, 저 많은 광석을 어떻게 캐낸다…….”
그때 루크의 어깨에 올라타 있던 라그나로스가 하품을 하며 심드렁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흐아암~ 차라리 아쿠아에게 시키지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엥? 진짜로 시키게? 그냥 해 본 말인데.”
밑져야 본전이라고 물어봐서 손해를 볼 건 없다.
겸사겸사 조그마한 아쿠아는 어떤 형태인지 구경하고 싶기도 하고 말이다.
루크는 품에서 파란색 정령석을 꺼내어 소량의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정령석이 투명한 액체로 변하면서 작달 만한 소녀의 형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