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역대급 재능으로 환생-113화 (113/200)

# 113

113화 혈족 귀속(4)

손바닥만 한 사이즈의 아쿠아가 루크의 손바닥 위에서 무릎을 살짝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

“아쿠아가 새로운 주인에게 인사드립니다.”

루크는 아쿠아를 어깨로 옮겨 라그나로스의 옆에 올려두었다. 루크의 오른쪽 어깨 위에서 쪼그마한 라그나로스와 쪼그마한 아쿠아가 나란히 섰다.

“나란히 서 있으니까 제법 어울리는걸?”

“퍽이나 어울리겠다. 볼일 끝났으면 소환이나 해제해, 사방이 물이라 갑갑해 죽겠네.”

“둘이 말하는 거 보니까 꽤 친했던 것 같은데, 오랜만에 회포나 풀지그래?”

“친했던 적 없어. 오히려 성가셨지. 뭐만 하려고 하면 방해하던 여자라니까.”

과거 얘기가 나오자 아쿠아도 할 말이 있는지 앙증맞은 볼을 살짝 부풀리며 라그나로스에게 반박했다.

“그거야 라그가 항상 문제를 일으키니까 그렇죠.”

“잘못된 걸 똑바로 잡으려고 했던 거야.”

“대화를 시도했다면 윈터도 다시 생각해 봤을…….”

“그만해 둬. 부탁인데 너까지 미워하게 만들지 마.”

과거에 고대의 정령왕들 사이에서 모종의 사건이 있었나 보다.

항상 의아하게 생각하긴 했다. 라그나로스든 아쿠아든 정령계에서 추방당할 만한 일을 벌일 성격은 아니다.

기억하기론 고대 바람의 정령왕이 윈터라는 이름을 가진 걸로 알고 있다. 먼 옛날, 바람의 정령왕과 라그나로스 사이에 불화가 있었던 듯하다.

라그나로스의 정색에 아쿠아가 시무룩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책임을 물으려던 의도는 아니었어요.”

“알아. 주인아, 이만하면 됐잖아? 이제 해제시켜 줘.”

루크도 분위기를 읽고선 말없이 라그나로스를 정령석으로 되돌렸다. 그러고는 아쿠아가 기분을 가다듬을 수 있게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몇 분 후에야 입을 열었다.

“이제 용건으로 넘어가도 될까?”

“아, 네. 얼마든지요. 저한테 따로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세요?”

“해저 섬 아래에 매장되어 있는 오션 마린을 캐내서 하니온 공국으로 옮기고 싶은데, 가능하겠어?”

“으음, 캐내는 것까진 가능해요. 근데 매장량이 너무 많아서 한꺼번에 옮기는 건 무리일 것 같아요.”

“굳이 한꺼번에 옮길 것까진 없어. 시간은 충분하니까 여러 차례에 걸쳐서 옮겨도 돼.”

“그리고 이제 계약을 했으니까 주인님의 마나를 빌려서 써야 해요. 모든 작업을 저 혼자 하려면 막대한 마나가 들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얼마나 드는데?”

“솔직히 채광에는 마나가 그렇게 많이 들지 않아요. 워터 프레셔를 얼음 형태로 굳히면 그 이뒤부턴 마나가 들지 않거든요. 그걸 도구로 활용하면 혼자서 수백 명분의 채광 작업을 할 수 있죠. 대신 캐낸 오션 마린을 운반할 때 마나가 많이 들죠. 5톤 분량을 하니온 공국까지 옮기려면 첨가 마나마스터 20명 분량의 마나가 소비될걸요?”

그 정도 마나라면 루크가 가진 마나보다도 더 많이 소모된다는 소리였다. 루크의 현재 마나 보유량이 마나마스터 5명 분량이니 가진 마나를 다 때려 부어도 모자라다.

해저 섬의 오션 마린 추정 매장량은 수백 톤에 이른다. 아쿠아 혼자서 채광과 운반을 모두 담당한다면 옮기는 데 한 세월 걸릴 것이다.

루크는 잠시 고민하다가 금세 절충안을 내놓았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걸로 하지. 하니온 공국에 돌아가서 화물선을 이곳 해역으로 보내겠어. 그럼 너는 이 밑에서 채광 작업을 하고 있다가 화물선이 도착하면 오션 마린을 싣기만 해.”

“주인님은 하니온 공국으로 돌아가시고, 전 계속 여기 남아서 작업하는 거군요.”

“외로울 것 같으면 라그 녀석도 남겨 두고 가겠어.”

“후후후, 그랬다간 제명에 못 죽을걸요? 전 상관없어요. 혼자 남아서 작업하다가 매장된 자원이 고갈되면 주인님 곁으로 복귀하는 걸로 하죠.”

“혹시 주인과 정령의 거리가 멀어지면 마나 공급이 끊긴다거나 그런 건 없지?”

“그런 건 없어요. 대신 원격에서 절 소환 해제해 버리시면 정령석을 찾으러 여기까지 오셔야 하죠.”

“마나 공급에는 문제없다는 거군.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하지. 최대한 빨리 복귀하는 걸 목표로 작업을 진행해 줘.”

“네.”

이리하여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해저 섬 원정이 마무리되었다.

수면으로 올라가기 위해선 바다 몬스터들의 영역을 지나가야 했으나 그 부분은 아쿠아가 길을 안내해 주면서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수면으로 올라간 루크와 라샤는 선박이 대기하고 있는 장소로 이동했다. 아리아구 해역으로 올 때 타고 온 선박은 해역 끄트머리에서 평온히 대기하고 있었다. 선장의 말에 따르면 해저에서 그토록 치열한 전투가 오갔는데도 수면 위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고 한다.

루크와 라샤를 태운 선박은 그대로 뱃머리를 돌려서 하니온 공국으로 이동했다.

파도를 부수며 질주하고 있는 배 위에서 루크는 갑판 난간에 기대어 따사로운 햇살을 만끽했다.

“확실히 물속은 살 곳이 못 되는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마찬가지로 난간에 기대어 광합성을 하듯 볕을 쬐고 있던 라샤 또한 루크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한편 루크가 자리를 비운 동안에도 하니온 공국에선 윗사람 아랫사람 할 것 없이 모두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법을 뜯어고치는 작업은 하루 이틀 논의하는 걸로 해치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당장 개선해야 할 큼직한 안건들은 루크가 신속하게 처리해 주고 가긴 했다. 하지만 루크가 처리한 안건 말고도 뜯어고쳐야 할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빈부에 따른 세율 차등 적용, 각종 부가세 조정, 행정 구역 재편성, 벤티버 시내 환경 개선 등등…….

미네르바와 외척 세력이 행정 업무를 얼마나 날림으로 처리해 왔는지 누락된 자료가 많아서 여러모로 애를 먹었다.

애로 사항이 많은 와중에도 집행부는 착실하게 하니온 공국의 내실을 다져 가고 있었다.

새 정권의 영향력이 이토록 빠르게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데는 드골의 공이 컸다.

옛날 드래프트 영지는 이보다 더 최악이었다. 당시에 허리띠를 조르고 졸라서 영지를 유지해 왔던 드골이다. 쓸 돈이 없어서 허덕이던 시절에 비교하면 하니온 공국의 장부는 양호한 편이었다.

“드골 백작님, 남부 지방의 영주들로부터 보고서가 올라왔습니다. 최근 몇 년간 마물에게 입은 피해를 통합한 자료라고 합니다. 금액별로 분류할까요, 지역별로 분류할까요?”

“지역별로 분류한 다음 하위 항목에서 금액별로 나열하게. 현지에 파견한 조사단의 보고서와 일치하는지 대조해 보고.”

“그리하겠습니다.”

드골의 밑에서 일하게 된 게데스 자작은 그간 드골의 업무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몸소 체감한 참이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조금 불안한 감이 적잖이 있었다.

집사 출신에 불과한 그가 중간 과정 없이 곧바로 일국의 중책을 담당하는 게 과연 옳은 판단일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막상 실제로 같이 일해 보니 의구심이 단방에 날아갔다.

루크의 성향상 훌쩍 원정을 떠나 버리는 경우가 잦았고, 드넓은 드래프트 영지를 드골 혼자 감당해 왔다.

직책만 집사였다 뿐이지 실제론 백작의 업무를 고스란히 이행해 온 것이다.

즉, 집사에서 갑자기 백작이 된 게 아니라 항상 백작을 업무를 맡다가 이제 와서야 집사의 탈을 벗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드골은 게데스 자작으로부터 보고를 받고선 마치 여전히 루크가 왕궁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오늘 처리해야 할 업무를 전하께 보고드리고 올 테니 그때까지 처리해 주게.”

루크가 해저 섬으로 떠난 직후 드골이 자체적으로 모든 집행부 사람에게 명령을 내렸다.

“전하께서 해저 섬으로 떠났다는 사실은 비밀에 부치게. 복귀하실 때까지 계속 전하가 왕궁에 남아 계신 것처럼 행동하게나.”

만약을 대비하여 기밀을 유지하자는 데 반대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루크에게 적이 많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데메그리 교에 겐크 왕국, 겐크 왕국에 딸린 아레나 공국, 그리고 해저 섬까지.

사방이 온통 적이다.

자그마한 정보가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기에 내부에서 똘똘 뭉쳐 루크의 야망을 원호하자는 게 집행부 전원의 뜻이었다.

특히 집행부에 속한 이전 장로회 출신들은 루크가 라그나로스를 쓰러뜨리는 것을 직접 목격한 자들이기 때문에 더더욱 루크에 대한 신뢰가 두터웠다.

각자 맡은 바 업무를 보기 위해 갈라지기 직전, 게데스 자작이 몸을 돌리다 말고 미처 못다 한 말을 전했다.

“아 참, 그거 들으셨습니까? 겐크 왕국에서 거인국과 새로운 협정을 맺었다고 하더군요.”

“음? 별일이군. 이전에 이미 두 나라 간에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던 걸로 기억하네만.”

“휴전은 말 그대로 전쟁을 잠시 중단하고 쉰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이번엔 아예 전쟁 종결을 선언하고 불가침 조약을 맺는 걸로 마무리했다더군요.”

“대놓고 우릴 경계하고 있군. 거인국과 미리 불가침 조약을 맺어 둬서 전력을 정비할 생각인 거겠지.”

“근데 불가침 조약을 맺으면서 누구를 볼모로 보낸 줄 아십니까?”

“보통은 왕족을 보내니 블린트 왕자님이나 엘리나 왕녀님을 보냈겠지.”

“두 사람 중에서 엘리나 왕녀님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 일을 전하께 보고드리긴 해야겠지요?”

“안 될 이유라도 있나?”

“그… 전하께서 엘리나 왕녀님과 그렇고 그런 사이이지 않습니까.”

공식적으로 해명한 적이 없어서 그런지 아직도 루크와 엘리나가 특별한 사이인 줄 알고 있는 자들이 많았다. 게데스 자작도 그중 한 명이었다.

둘 사이에 그렇고 그런 관계 따윈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다는 것을 아는 드골로선 헛웃음만 터져 나올 따름이었다.

“허허허, 기우일세.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니까 복귀하시면 바로 보고드리게.”

“아니었습니까? 끄응, 각별한 사이인 줄 알고 귀족 부인회의 중매 권유를 사전에 모두 차단했는데 괜한 짓을 해 버렸군요.”

“그건 잘한 행동일세. 어차피 지금은 아무한테도 관심 없으신 듯하니 전하께서 직접 말을 꺼내실 때까지 참견하지 말게나. 귀족 부인회에도 그리 전해 두게.”

“하아, 후계자를 기르는 데 20년이 넘게 걸리니 지금이라도 후손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셔야 할 텐데 말이지요. 전하의 나이가 벌써 서른이 넘으셨지 않습니까.”

“하아, 내 말이 그 말일세. 하지만 어디 말한다고 듣는 분이셔야지.”

드골이라고 여태까지 말을 안 꺼내 봤겠는가.

말하다가 지쳐서 이젠 알아서 하시겠거니 하고 손을 놓은 마당이다.

두 노인은 독수공방을 고집하는 루크를 걱정하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 * *

아리아구 해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옥토버들의 나라, 네튤 제도가 위치해 있다.

네튤 제도에서도 가장 큰 섬인 블루문 아일랜드의 해안 동굴 안에서 한 사내가 언성을 높였다.

“뭐? 전멸을 해? 슈타인 그놈을 믿고 네튤 제도의 귀한 아들들을 내주었건만 대체 뭘 했길래 전멸이란 결과가 나온단 말이냐!”

해저 섬 사태의 생존자는 클로이를 따르던 세이렌 저항군밖에 없다. 개중에는 슈타인의 명령을 받고 저항군에 잠입한 세이렌들이 더러 섞여 있었다.

잠입해 있던 세이렌들은 무리를 이탈하여 네튤 제도에 몸을 의탁했고, 자신들의 주인인 슈타인의 명예를 지키고자 거사를 실패한 원인을 엉뚱한 자에게 뒤집어씌웠다.

“전부 하니온 공국에서 온 루크란 자 때문입니다! 그자가 수작을 부리지만 않았어도 모든 게 순탄하게 진행됐을 겁니다! 슈타인 왕자님께선 최선을 다하셨으나 인간의 농간 때문에 억울하게 돌아가신 것을 헤아려 주십시오!”

“그러면 오션 마린은? 내게 주기로 했던 오션 마린은 어떻게 되었느냐?”

“모두 루크란 작자가 독차지했습니다.”

“이런 고얀 놈을 봤나! 놈은 어디 있느냐? 내 직접 놈을 베어 내겠다!”

“이제 막 아리아구 해역을 벗어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추격하실 거면 지금 출발하셔야 합니다.”

“해왕검을 가져오거라! 감히 바다 깊은 줄 모르고 발을 들인 뭍 놈에게 본때를 보여 주겠다.”

옥토버들의 왕인 엑튜러스. 그는 쥐기만 하더라도 범인을 마나마스터 이상의 강자로 만들어 준다는 바다 3대 신기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엑튜러스는 3대 신기 중에서도 바다를 가르고 해류를 바꾼다는 해왕검을 손에 쥐고서 오션 마린을 독차지한 인간을 베기 위해 크라켄에 올라탔다.

0